38화
트래스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규모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사는 마을인가 싶을 정도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큰 마을인데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다니, 이 정도면 마치 폐허와 같은 유령마을이었다.
-도대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단체로 증발이라도 한 건가.
울프릭도 수상함을 눈치챘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하였다.
-날도 어둡고 일단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재워달라 할까요?
-그게 좋겠군.
울프릭도 재빨리 동의한다. 목소리도 많이 갈라진 상태인 데다 블랙서클이 있던 얼굴엔 빨갛게 충혈되어 보이는 눈도 보였다. 제아무리 체력이 강한 울프릭이라도 거인에게 쫓기고 뱀에게 잡아먹힐 뻔한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냈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울프릭이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집 문을 두드리는데 안에선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이 마을, 정말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진짜 한 명도 없는 거 아니야?
이번엔 문이 부서져라 쾅쾅 두들겼다. 그러자 랜더가 말렸다.
-그러다 문 부수겠어요! 이 정도 두들겨도 안 나오면 집에 없는 거겠죠.
마을에 도착했다 해도 잠을 요청할 곳이 없으면 마을에 도착한들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집에 들어가 잠을 청하였다가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면 그 자리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혀 앞으로의 임무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결국 잘 장소를 다시 물색하러 떠나려던 그때,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거, 지금 들어오라는 신호 맞지?
“글세... 나도 어떻게 된 건지.”
이차원과 울프릭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이차원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차원은 어떠한 공격을 받아도 다 통과하는 몸이기 때문이다.
멀쩡해 보이는 집안 내부는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어. 아무도.”
이차원 말에 랜더와 울프릭도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요! 누구 안 계세요?
랜더는 텅 빈 집안을 향해 외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빈집이 지금 이 집뿐만이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드는데 나만 그러냐?
이차원은 어쩐지 스산한,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던 마을의 분위기를 수상해 하는데 울프릭은 소파에 털썩 눕는다.
-아 모르겠다, 지금은 모두 피곤하니 생각은 나중에 하자고.
-그래요. 이따 집주인 오면 은화 몇 닢 주면 되겠죠.
랜더도 피곤했는지 몸을 눕힌다.
‘딱히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특색 없는 마을이었는데.’
이차원, 자신이 알고 있던 게임시나리오와 다른 마을 풍경이 아무리 봐도 수상했다.
그의 직감이 이곳은 위험하다고 알리는 것 같았다.
“일어나. 좀 더 마을을 돌아보고...”
이차원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둥 번개가 내려치더니 이차원의 말소린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쏟아지는 비가 창문을 세차게 두들긴다.
-이래서야 어디 돌아다닐 수도 없게 되었네. 오늘은 이만 여기서 자자.
울프릭은 이차원을 보며 말을 끝낸 후, 눈을 감는다. 랜더도 마찬가지.
이차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문 밖 쏟아져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
랜더 역시 피곤했는지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울프릭도 평소와 달리 깊은 잠에 빠졌다. 오직 이차원 혼자 수상한 분위기에 잠이 들지 못한 채 비를 가릴 우산 대용으로 쓸 판자를 주워 트래스 마을을 살펴봤다. 원래 시나리오와 달라진 점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오는데... 원래 이 맵에선 분위기가 이랬었나?”
이차원이 그렇게 맵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다.
“저건... 분명 저러지 않았는데..?”
이차원이 발견한 것은 바로 젖소 농장이었다. 젖소 농장에는 항상 젖소 NPC가 있어서 소의 울음소리가 항상 들려왔었는데, 지금 이차원이 있는 게임 속에서는 소의 울음소리는커녕 개미 한 마리가 풀숲을 지나가는 소리마저 다 들릴 정도로 농장은 조용했다. 또한 칸막이마저도 손상이 되어있었다.
확실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자 이차원은 트래스 마을에 대해 점점 하나씩 생각이 떠올랐다. 이어서 다른 곳 또한 조사하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벌써 이차원이 발견한 것만 해도 무려 세 개였다. 원래 게임시나리오에서 멀쩡했던 대장간과 의상제작소, 우유를 짜는 젖소 농장까지 폐허가 되어있었다.
의상제작소엔 만들다 만 도안과 면 자투리만이 널려있고 대장간은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각종 도구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제일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건 대장간이었다. 대장간은 차가운 철처럼 딱딱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대장간을 둘러보던 이차원의 머릿속으로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이곳 트레스 마을에 오면 분명 대장장이 퀘스트가 있었는데.’
원래 게임시나리오대로라면 트레스 마을의 대장장이 퀘스트를 통해 방패를 얻을 수 있었다.
빛의 심판자의 검 정도의 값어치는 아니더라도 초중반에 유용하게 쓰이는 방패였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방패를 얻기 위한 퀘스트를 주던 대장장이가 보이지 않고 있다. 먼지가 쌓인 걸로 봐선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듯 보였다.
이차원이 이를 수상히 여기며 대장간을 나가는데 빗속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듯하였다. 바람이 수풀을 지나가는 소리인가 했었는데 그러기엔 소리가 너무 불규칙하여 알 수 있었다.
‘설마 이 소린... 자객?’
이차원은 마을에 자객이 나타났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하였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자고 있을 텐데, 혹시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기습을?’
이차원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여기 계셨네요!
발소리의 주인은 자객이 아닌 렌더였다. 이차원은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주무시다 말고 왜?”
-목이 말라서요. 여긴 우물도 없나 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색이세요?
렌더는 아무것도 모른 채 손으로 빗물을 받아 목을 축였다. 이차원은 당신 때문에 심장 멎을 뻔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였다.
“우물이라면 저쪽에 있어요.”
미리 마을을 돌다가 우물을 봤던 이차원이 우물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렌더는 이차원이 알려준 우물로 잽싸게 달려갔다.
-아이고 죽겠다.
우물에 도착한 렌더는 물을 퍼내기 위해 밧줄을 잡아당겼다. 다행히 우믈 속은 비어있지 않은 듯 나무통에 물이 한가득 담겨 올라왔다. 렌더가 허겁지겁 나무통에 담긴 물을 들이켰다. 그런데 물을 들이켜자마자 곧바로 물을 토해내듯 뱉어내 버린다.
“왜 그래요?”
갑작스런 행동에 이차원이 렌더에게 달려갔다.
-이거 물이 상했나. 비린데요?
“제가 준 전등 꺼내서 우물 좀 비춰보세요.”
이차원 또한 뭔가 수상함을 느끼고 렌더는 이차원이 준 손전등을 꺼내 우물 안을 비춰보았다. 손전등에 비친 풍경은 가관이었다. 수많은 시체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물에 오랫동안 있었는지 시체들의 피부가 모두 불어터질 것만 같았다.
-서, 설마 저거.
구토를 하던 렌더를 이차원이 다급히 불렀다.
“다시 비춰보세요.”
-저딴 걸 또 봐서 뭐하시게요.
“이따 말씀드릴게요, 빨리요.”
렌더가 마지못해 다시 우물 안을 비추자 안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반사된다.
‘저건... 대장장이가 줘야 될 방패?’
이차원은 재빨리 스킬 [포세이돈]을 사용하여 우물의 물을 위로 쏘아 올리고 방패를 우물에서 건져내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대장장이의 서브 퀘스트를 마쳐야 얻을 수 있는 그 방패가 맞았다.
-어이, 한참 찾았잖아.
잠에서 깬 울프릭은 이차원에 이어 렌더까지 사라지자 수상하다 생각해 마을을 뒤져 두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렌더의 고함 덕분에 위치를 파악해 둘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방패, 못 보던 건데?
“이 우물 안에서 발견한 거야, 필요하면 너한테도 줄게.”
이차원은 [강화]를 거쳐 [복사] 스킬을 이용해 울프릭에게 방패 복사품을 건네주었다.
“이거 써라.”
울프릭이 이차원이 준 방패를 건네받은 뒤, 방패를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단단해 보이네.
“당분간 가지고 다니면 좋을 거야.”
-이 방패에 대해 잘 아나 보네?
“언제는 모르는 게 있었냐.”
이차원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받아쳤다. 그때, 갑자기 가만히 서 있던 렌더가 눈이 처지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이봐, 왜 그래? 정신 차려!
“일단 머무르던 집으로 가자.”
***
집으로 도착한 울프릭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 렌더의 상태 확인하고 상의를 벗겨보니 핏줄이 초록색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냐?”
쓰러지기 전까지 일을 생각하던 이차원은 순간 우물을 떠올렸다.
-아까 우물에 있는 물을 마셨어. 그것 말곤... 어?
이제야 상황파악이 되었다. 이 마을에 사람들이 없는 이유. 바로 누군가가 이 우물에 독을 탔고 그 사실을 모른 채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신 주민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몰살당한 것으로 봐선 아마 조촐하게 연회라도 열었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듣자 울프릭은 우물로 가서 안을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저질렀다는 증거나 남아있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울프릭은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아무런 정보도 찾지 못했어.
“일단, 렌더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야.”
이차원이 아는 정보로는 이 게임에서 DLC가 나오기 전까지 독은 총 세 종류다.
‘히프족의 맹독, 아니카스 버섯의 중독, 하급 악마 서큐버스가 쓰는 신경독. 이 중에 사용된 독이 있는 걸까?’
각각의 독마다 치료하는 방법은 다르다. 하지만 이 근처에서 아니카스의 버섯에 중독된 NPC를 구하면서 플레이어는 세 가지 독에게 모두 효과적인 약초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차원도 알고 있었다.
이름하여 만년초. 한 번 피면 만 년은 거뜬히 살아간다는 뜻으로, 잎은 일반 잡초처럼 생겼지만, 붉은색의 작은 열매가 매달려있는 게 특징이다.
‘기억이 맞다면 이 마을 어딘가에서 만년초를 구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이 트레스 마을은 어두워진 데다 비까지 내려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땐 혼자 찾는 것보다 둘이서 찾는 것이 조금이라도 낫다.
“울프릭, 좀 도와주겠어?”
-알겠어.
울프릭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이차원은 울프릭에게 만년초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그 후 그들은 서둘러 만년초를 찾아 숲속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으면 렌더는 죽게 된다.
만년초를 찾으려 전등을 비춰가며 찾아보지만 역시나 잘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다 비슷해 보이니 더욱 마음이 초조해졌다.
“분명 이 마을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 시각, 렌더는 독 때문인지 구토에 이어 피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제 시간이 정말 없을 때...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