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거대하고 긴 히프족 여왕이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울프릭은 일행들 앞으로 나서서 빠르게 검을 꺼내 여왕의 공격을 맞받아쳤지만, 간신히 공격을 막아냈을 뿐 반격까진 무리였다.
-뭐야, 이 녀석. 아까 싸우던 작은 애들과는 차원이 다르잖아.
울프릭은 단 한 번의 겨루기로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잭도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고 공격하려는데 이차원이 말린다.
“당신 예전에 거인에게 다쳐서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한다고 했잖아요? 오히려 도와주려 하다가 울프릭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잭이 울프릭을 보는데 낫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뒤로 밀려나는 울프릭이 고전 중인 것이 보였다. 체격 차이는 물론 조금 전의 전투에서 힘을 너무 많이 뺀 탓이다.
몸놀림도, 공격하는 타이밍도 울프릭이 히프족 여왕보다 훨씬 뛰어나지만, 문제는 체급 차이가 심하다 보니 힘에서 벌써 밀려버린다. 딱 보기에도 히프족 여왕의 덩치가 울프릭의 6배는 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빛의 심판자의 검이 선방을 하고 있다는 거다. 십자가가 떨어질 때마다 괴기한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히프족 여왕. 그러나 이걸로는 목숨을 끊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키아악!
-무슨 소리가 이렇게 커?
-울프릭 씨, 곧 여왕의 비명을 들은 다른 히프족들이 몰려올 겁니다. 어서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렌더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한다. 여왕을 추종하는 다른 히프족들이 몰려오기 전에 끝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졌다.
-역시 안 되겠습니다. 저라도 도와야겠습니다.
“모두 조용히 하세요!”
허둥지둥하는 렌더와 잭에게 이차원이 소리를 지르자 둘은 조용해졌다.
발 가만히 좀 계세요. 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차원은 그대로 얼어붙은 둘을 놔두고 눈을 감는다. 지금까지 능력치보다 강한 몬스터들을 상대해왔다. 그리고 그들을 공략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약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전에 상대했던 해골왕, 좀비 덩어리, 임프까지. 약점을 몰랐다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잡을 수가 있는 건가 싶었던 놈들이지만 막상 약점을 파악하기만 하면 모두 수월하게 잡았어. 분명 히프족 여왕의 약점도 있을 거야.’
눈을 뜬 이차원은 울프릭과 싸우고 있는 히프족 여왕을 유심히 살펴본다. 심판의 검이 던진 십자가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낫을 휘두르는 중이다.
‘몸통과 꼬리로 중심을 잡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히프족은 뱀이다 보니 다리가 없다. 몸통과 꼬리로 중심을 잡고 싸우는 중이었던 것. 이차원이 계속 머리를 돌리는데 순간 번뜩 생각이 스쳐 간다.
‘뒤. 뒤를 잡힌다면 상대적으로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어.’
지금 히프족 여왕은 앞에 있는 울프릭과 싸우는 중이라 중심이 앞으로 쏠려있는 상태다. 그렇기에 뒤에서 공격하기만 하면 쉽게 넘어트릴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문제는 여왕이 들고 있는 낫이다. 낫이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공격 범위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울프릭에게 뒤를 잡을 각이 안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차원은 점점 뒤로 밀려나는 울프릭을 보며 초조해지는데 잭이 또다시 나서려는 그때,
‘이거다.’
“안 되겠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서-”
활을 들고 달려가려는 잭이 갑자기 달리던 발걸음을 뚝 멈추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렌더는 잭을 툭툭 쳐본다.
-이봐요. 왜 그러세요?
-렌더 씨, 가만히 계세요.
[빙의]기술로 잭으로 빙의한 이차원이 히프족 여왕 뒤로 내달렸다.
***
순식간이었다. 이차원은 잭이 메고 있던 화살을 꺼내 여왕 척추에 내리꽂았다. 방심한 사이 뒤를 잡히자 깜짝 놀라는 히프족 여왕. 뒤늦게 여왕은 몸을 돌려 공격을 막으려 하지만 늦었다.
울프릭이 빠르게 검을 휘둘러 심판자의 십자가를 연이어 떨구자 몸통에서 꼬리로 이어지는 지점의 힘줄이 끊어지면서 앞으로 고꾸라진다.
-됐다! 공격이 먹히기 시작했어!
한 번 쓰러진 히프족 여왕은 다시 움직이기 힘들어 보였다. 그 틈을 타 울프릭과 잭으로 빙의한 이차원이 동시에 공격을 가하였다.
그렇게 서서히 히프족 여왕의 움직임이 둔해지더니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뜨는 상태창.
[새로운 스킬이 개방되었습니다. {VR}창조LV1 : 호감도 최대치를 쌓은 캐릭터를 만들어서 1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쿨타임 (5시간) 킬 레벨 상승 시 캐릭터 사용 시간이 늘어나고 쿨타임이 감소됩니다.]
이차원이 때마침 원하던 스킬이 개방됐다.
‘...!’
-이제 죽은 건가요?
공포심에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렌더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울프릭은 고갤 끄덕이며 칼을 다시 등에 메자 렌더는 곧장 죽은 여왕을 향해 달려간다. 대체 뭐하냐는 듯 그를 지켜보는데 렌더는 여왕의 독니를 추출하더니 유리병에 담는다.
-이게 무지하게 비싸거든요.
“이봐, 너 뱀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어?”
-아, 하하. 시체이기도 하고... 정말 좋은 것도 있으니까요.
렌더가 당황한 듯 어색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때 잭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지더니 이차원이 나왔다. 빙의가 끝난 것이다.
-또 너냐.
울프릭은 이전에도 이차원이 그렉에게 빙의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갤 절레 젓는다.
-언제 봐도 정말 놀라운 기술이야.
-깨어나면 출구 찾아서 나가자.
그러나 이 모습을 처음 본 렌더는 들고 있던 유리병을 떨어뜨리고 이차원과 쓰러진 잭을 번갈아 본다. 범상치 않은 요정이라곤 생각했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던 걸까.
“주워요. 비싸다면서요.”
-아, 네, 네.
다행히 잭은 얼마 안 있어 깨어났고 이차원 일행은 히프족을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뱀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행히 히프족 여왕의 비명 소리를 듣고 히프족이 몰려오기 전에 탈출을 한 것이다.
이차원 일행은 다시 볼 산맥을 지나기 위해 나아가는데 뒤에서 빠르게 쿵쿵쿵! 소리가 들려왔다. 이차원 일행은 식겁하였다.
잠깐 뒤를 돌아봤을 뿐인데 거인이 그들을 향해 손아귀를 뻗고 있었다. 렌더는 누구보다 놀라 비명을 질렀다.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잭의 안내가 시작되면서 거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거인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도망치는 이차원 일행에서 유독 렌더의 호흡이 가빠지더니 서서히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빨리 뛰세요, 조금만 더!
거인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이차원의 눈앞에 푸른 빛이 반사돼서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호수였다.
-이봐, 혹시 길 잘못 든 거 아니지?
더는 갈 곳 없는 막다른 길. 잭을 포함한 일원들이 당혹해하였다. 이차원만을 제외하고.
꽤 많은 양의 물. 이차원에겐 반가운 일이었다. 이차원은 스킬 [포세이돈Lv1]를 활용해 물을 공중으로 끌어모아 거대한 창을 만든 후에 거인의 눈을 향해 내던졌다.
렌더와 잭이 손아귀에 잡히기 직전 거인이 물로 형성된 창을 맞고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땅이 크게 뒤흔들리는 바람에 언덕을 구르고 굴러 이차원 일행이 호수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도 물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거인을 따돌렸다 싶은데 발에 뭔가가 느껴졌다. 흐느적거리며 툭툭 쳐지는 무언가가. 그리고 다들 이상한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표정이 어두워지는데 렌더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
렌더의 발을 문 것은 피라냐였다. 자세히 보니 호수에 피라냐가 가득했다. 이차원 일행을 감지한 피라냐 떼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며 깨물기 시작한 것이다.
-앗 따가워! 누가, 누가 좀 살려주세요!
피라냐들은 한 번 걸린 사냥감은 절대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없다. 그렇기에 일 분 일 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오는 게 시급했다. 이차원은 [제우스] 스킬을 발동하여 커다란 파도를 만들고 순식간에 모두를 뭍으로 내보내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이차원이 일행을 살펴보는데 다들 몸에 조금씩 상처가 난 것을 제외하고는 괜찮았다.
-하아, 하아, 정말 죽다 살아나는 줄 알았어요.
-다행히 거인들도 이쪽으로 넘어오지는 않는군요.
다시 묵묵히 트래스 마을로 향해 볼 산맥을 넘어가는 이차원 일행. 해가 지기 시작할 때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볼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집니다.
잭의 말에 일행들은 아쉬운 듯 그를 돌아보았다.
-무사히 돌아가세요.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고 무사히 도착했어요.
-고마웠다, 덩치.
이차원은 혼자서 다시 산맥을 넘어야 하는 잭을 걱정하는데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다시 안 볼 것처럼 그러지 마세요. 저도 고향으로 돌아가 하고 있는 일만 정리되면 모험을 떠날 거니 언젠가 다시 만나겠죠. 혹시 아나요? 모험을 하다 보면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는 일이니.
“그렇겠죠, 그럼 어서 빨리 그날이 오길 바라고 있을게요.”
이차원 일행은 그새 정이 들었는지 돌아가며 악수를 청하였다.
-저도 당신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언젠가 또 봅시다.
잭은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볼 산맥으로 들어갔다. 부디 거인들의 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리프 마을에 도착하기를, 이라고 이차원은 빌었다.
‘나중에 꼭 아내의 무덤에 튤립을 가져다주러 갈게요.’
그렇게 잭과 헤어지고 트래스 마을에 도착한 이차원 일행.
-너무 힘든 일이 많았어요, 이제 마을에 도착했으니 푹 쉬었으면 좋겠네요.
“모험가의 꿈이 사라지거나 그런 건 아니야?”
-에이 서, 설마요. 아직 이렇게 같이 다니고 있잖아요.
이젠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렌더가 속을 감추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하지만 뭐, 이런 일은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이니 이해가 가는 마음도 들었다. 이번에도 죽을 고비를 여럿 넘겼고 앞으로도 수도 없이 힘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마 그 힘든 일이 지금 일어날 거 같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싫은 생각이 실제로 일어나는 거 같았다.
“수상해.”
-뭐가?
“저녁인데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지 않잖아”
-제발, 이젠 날도 어두워지고 있으니 푹 쉬면서 자고 싶어요.
울프릭 말을 듣고 보니 어느 집 하나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곳이 없었다.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 불도 제대로 켜진 집이 보이지 않고 있다. 사람 사는 마을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이 마을, 수상하다.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