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잭의 손에 들려 있던 위장복을 건네받은 울프릭과 렌더는 그 자리에서 곧장 입어보았다.
-이거, 좀 크지 않나요?
-아닙니다. 지금 이게 딱 맞는 크기입니다.
저번에 가져온 자작나무 가지와 이파리를 의상제작소에 맡겨 만든 옷이었다. 그때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들의 업적이 알려진 상태였고 이차원의 발 빠른 대처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우리는 이거 입어서 괜찮은데, 넌 괜찮겠냐?
“걱정 말아, 누가 날 죽일 수 있겠냐.”
이차원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음을 지었는데 지미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다.
-제가 특별히 요정님 생각해서 작은 사이즈의 옷도 만들어왔는데 입으시지 못하신다니 아쉽습니다.
지미가 만들어준 위장복은 이차원이 입을 수 없었다. 입으려 하여도 옷은 그대로 이차원을 통과해버릴 뿐이었다.
게임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나 괴물들은 이차원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가 없었다. 물론 의복과 무기도 마찬가지였다. 시야에 보이기는 하지만 이차원의 존재는 무형. 즉 유령과도 같았다. 그러니 애초에 위장복을 입을 필요가 없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걱정은 덜 들겠지만, 그래도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이차원 일행은 마을 어귀까지 자신들을 배웅해주러 온 마을 주민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었다. 그곳엔 의상제작소에서 일하던 여성들도 있었다.
-저번 반지에 관한 일을 사죄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인데요. 그리고 저를 위해 해준 일이잖아요?
울프릭은 자신이 난폭하게 손을 잡은 여성에게 사과를 하였다. 여성도 다행히 울프릭을 용서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잭.
지미와 잭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지금처럼 지내왔듯이 내일도 앞으로도, 언제든 또 볼 것처럼 커다란 인사도 나누지 않고 헤어졌다.
‘저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점이 부럽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이차원 일행은 마을을 떠났다.
***
-일렉시아 성은 동쪽에 있으니 이쪽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지리를 잘 아는 잭이 앞장섰고 울프릭과 이차원, 잭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시선을 압도하는 볼 산맥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볼 산맥입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 돋네요.
-돌아갈 거면 마음이 바뀌기 전 지금 가는 게 나을 거다.
-아닙니다.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하하.
렌더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먼저 입구로 들어갔고 이차원과 울프릭, 잭이 뒤를 따라 들어갔다. 산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빼곡한 소나무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듯 떠다니는 안개 때문에 신선이 살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풍경 자체는 좋았다. 악명이 자자한 산맥이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산.
-산맥을 관통하는 지름길이 있으니 거기로 안내하겠습니다.
잭의 안내를 받은 이차원 일행이 산맥을 통과하는데 산속엔 의외로 임프와 고블린 등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위장복의 효과 때문에 그들 중 누구도 이차원 일행을 의식하진 못했다. 아마 이 위장복이 없었더라면 벌써부터 전쟁을 치르느라 힘을 다 뺐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후로 길이 험하니 오늘은 이만 여기서 쉬어가는 것이 좋겠는데요.
-얼마나 온 겁니까?
-3분의 1 정도 왔습니다.
-그렇게 걸어온 거 같은데 이제 3분의 1이에요?
길을 잘 아는 잭 덕분에 이차원 일행은 지름길을 통해서 왔다. 하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에 벌써 기운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기운 내, 지름길이 아닌 본래 길로 갔다면 지금쯤 아직도 시작 부근에 머물러 있었을 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생각보다 너무 멀어요.
-이쪽 땅이 가장 완만하니 여기서 하루를 보내면 되겠군.
그렇게 잠시 쉬어가기 위해 자리에 앉으려는 일행 사이로 울프릭이 어디론가 가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어디 가냐?”
-네가 요정이라고 여기서 그냥 이러고 자려 했던 건 아니지? 적어도 제대로 쉴 공간을 만들어야지.
말을 마친 울프릭은 근처에 있던 돌과 주변 나뭇가지를 챙기더니 금방 편히 쉴 수 있는 텐트를 만들었다.
-울프릭 씨, 손기술이 장난 아니신데요?
렌더는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이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바닥에 제일 먼저 앉더니 다리를 펴고 지친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제 나이쯤 되면 안 아픈 곳이 없어요. 6시만 넘어가도 눈이 껌껌해서 길도 안 보인다니까요.
-이봐, 그 전에 나는 쉬라고 한 적은 없는데.
-앗, 그랬나요? 하하.
울프릭의 말에 렌더가 다시 멋쩍게 웃고는 다시 잽싸게 몸을 일으켜 텐트 만드는 일을 도왔다. 그렇게 만들어진 간이 캠프는 모양은 허술했지만, 추위를 피하기엔 딱 적당했다. 텐트가 완성이 되자 하늘은 어느새 별이 하나둘 보이더니 이내 밤하늘을 수놓았다.
다들 피곤했는지 말없이 잠을 청하는 모습이 오늘 집으로 돌아와 바로 잠에 빠진 이차원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이차원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모니터를 끄고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스피커는 켜두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면 소리가 들릴 수 있게 해놓았다. 하지만 이차원은 낮에 잠을 오래 자서 그런가 이런저런 생각만 들고 금방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모니터를 켰다. 그러자 텐트 밖에서 잭이 홀연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난히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잠이 안 오시나요?”
이차원의 갑작스런 물음에 잭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이 남자, 점술사 때도 느꼈던 거지만 덩치에 비해 은근 겁이 많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거기에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이차원을 보고는 황급히 눈물을 훔치는 잭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겁이 있다는 거에 마음이 여리기까지 하니, 무서웠던 첫 만남 때와는 전혀 다른, 친근함이 느껴졌다.
-아, 이거 별거 아닙니다.
이차원은 잭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기에 묻지 않고 가만히 옆에 있어 주었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은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둘은 함께했고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서서히 올라올 때였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가 그립습니다.
긴 시간 침묵을 깨고 말한 건 잭이었다. 그리고 잭의 말에 이차원은 문득 게임의 서브스토리가 생각났다.
‘백합을 구해 달랬지. 아내 무덤에 가져가고 싶다고.’
백합은 잭의 아내가 살아생전 가장 좋아했던 꽃이다. 당시엔 게임상이라서 아내가 왜 죽었는지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무리 게임 속 세상이라도 이차원에겐 현실 못지않은 곳이 됐고 인물들 하나하나가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시 자세한 얘길 들을 수 있을까요.”
이차원이 슬퍼 보이는 잭에게 조심스럽게 묻자 다시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들을 낳다 죽었습니다. 아들은 건강해요. 어미만 없을 뿐이지. 원래 이맘때쯤 생각이 나서 종종 그러니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이차원의 침묵에 먼저 웃음을 흘리며 별거 아니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잭은 여전히 겉으로만 슬픔을 감추려 하는, 괜찮은 척, 강한 척만 하려 하는 자신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잭의 마음을 더욱 절실히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자신이 봤던 만화책에 있던 구절이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던 한 구절을.
-누가 말해준 건데 사람은 기억에서 잊혀질 때 비로소 죽은 사람이 된답니다.
인간은 두 번 죽는다. 육체적인 죽음.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죽음.
이차원 말에 잭의 가슴이 찌릿해진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제가 있는 세상에 있는 말이에요. 비록 당신과 저는 사는 세계는 다르지만, 목숨이 있는 존재라는 건 같잖아요. 제게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이에요.”
-...
“누구에게나 소중한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을 잃는다고 그 사람이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으면 평생 함께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차원은 아무 말이 없는 잭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면 어쩌지 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광경이 이차원의 앞에 나타났다.
잭은 아무 소리 없이 눈물만을 흘려내고 있었다.
-전 제 아내를 평생 못 잊습니다.
“그럼 영원히 함께하는 거네요.”
이차원은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어주었다.
-저에게 이렇게 다정히 말해주는 사람은 지미 빼곤 없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잭도 진심이 담긴 고마움의 미소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상태창이 뜬다.
[ 잭의 호감도 100 달성. 호감도 최대치를 올려 스킬이 개방됩니다. ]
[ {V/R} 패시브 사냥꾼의 지혜 : 당신은 이제 캠핑 전문가입니다. 숲속에서 자는 것 따위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
‘캠핑 기술? 이것도 토벌 작전에 필요한 기술인 건가?’
이차원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잭의 호감도 능력을 이어받게 되었을 때다. 숲속에 있던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발소리로 바뀌었다.
이차원은 무슨 일인가 싶은데 잭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곧장 움막으로 들어가 울프릭과 렌더를 서둘러 깨웠다.
-모두 일어나세요! 거인... 거인이에요!
***
땅이 뒤집히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시각 거인은 배가 고픈 모양인지 숲속을 가로지르며 나무 사이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봐. 지금 그딴 거 치울 때가 아니라고!
울프릭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잭을 향해 외친다. 잭은 홀로 남아 캠핑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요. 거기 남아 발각되는 것이 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겁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캠핑 흔적을 지우던 잭을 향해 점점 거인의 발소리가 커지며 가까워져 갔다.
-젠장! 할 수 없죠.
나무에 숨어있던 렌더가 달려가 잭을 붙잡더니 수풀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거인이 쓰러진 움막을 발견하였다. 렌더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잭은 거인들에게 발각되었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거인들이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차원 일행은 나무에 몸을 가리느라 무슨 상황인지 볼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의 귓가로 무언가가 크게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야? 거인 하나가 넘어지기라도 한 거야?’
바깥 상황을 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바깥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차원 자신은 어차피 공격이 통하지 않아 상관이 없었으나 자신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까지 거인들에게 걸리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무서운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때 이차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자신의 주변에 있던 나무 그림자들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 이 소리는 바로 거인들이 주변 나무를 손등 날로 쓱, 하고 밀어버리는 소리였다.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그들이 눈치챔과 동시에 나무가 쓰러지면서 이차원 일행의 모습이 그대로 발각되어 버린 것이다.
-하필 여기서 걸리다니, 도망칠 곳도 없잖아!
-제가 유인할 테니 북쪽으로 앞만 보고 달리세요!
어느새 렌더의 팔에서 빠져나온 잭이 먼저 나가 손을 흔들며 거인을 유인하였다. 거인은 그런 잭을 쫓기 시작한다.
울프릭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빠른 몸놀림으로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동선을 헷갈리게 만들었더니, 거인이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좋아, 이대로... 엇?’
갈팡질팡하던 거인이 정신을 차리더니 이내 아예 속도를 높여서 잭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젠장.
잭은 멀리 보이는 작은 구덩이를 발견하고 몸을 피하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데 그의 동선을 미리 파악한 거인이 손바닥으로 잭의 앞길을 쳐서 잭을 뒤로 넘어뜨렸다.
-잭, 도망쳐!
이차원 일행이 도와주러 달려갔지만, 시간과 거리가 그들을 도와주지 못할망정 방해하였다.
거인이 가소롭다는 듯 손바닥을 펴 잭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지미... 미안해.
잭은 생을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려 하였다. 바로 그때,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더니 땅이 꺼지면서 그대로 잭이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