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뭐? 갑자기 끼고 싶다니,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이차원이 렌더에게 묻자 표정이 진지해졌다.
-인생이 지겨워서요.
이차원과 울프릭이 그의 말을 듣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갑자기 훅 나타나서 뚱딴지같은 소리를 내뱉기는...
-전 평생을 몬스터의 언어를 배워온 사람입니다. 여기저기 모험을 하면서 몬스터 언어로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문화 방식을 배우는 게 꿈이었어요.
“탄광에서 일하던 사람으로선 꿈같진 않은데.”
렌더는 멋쩍게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렇죠. 막상 절 필요로 하는 곳은 몬스터를 죽여야만 하는 존재로 여겼거든요. 그래서 일을 그만두고 탄광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내가 배운 언어가 몬스터를 죽이는 데 쓰이는 것보다 나았으니까요.
어느새 렌더의 눈에 조금 눈물이 고이는 게 보였다. 이에 안쓰러움을 느낀 이차원과 울프릭은 모두 잠잠히 그의 뒷말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러다 여러분들을 만난 거고 마침내 제가 원하던 꿈을 찾은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험과 소통이요.
렌더는 모험을 할 생각에 금세 신이 났는지 얼굴에 활기가 가득했다. 탄광촌에서 처음 봤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그렇다, 이것이 렌더의 진짜 모습이었다.
“난 상관없어. 그런데 당신이 괜찮을지 걱정이야.”
울프릭과 이차원이 하는 모험엔 언제든 죽을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저번 해골왕 때도 하마터면 전멸할 뻔했다. 게다가 지금 당장만 해도 거인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중이었으니까.
-괜찮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한 번쯤은 목숨 걸고 하는 일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렌더가 통쾌하게 웃는다. 아무래도 그동안 탄광촌에만 박혀 있다 보니 지나치게 모험심이 폭발한 감도 없지 않아 있는 듯하였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선 이런 용기도 필요하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사이 그들의 뒤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뒤를 돌아보니 다시 나타난 트롤들의 손에 자작나무 이파리와 나뭇잎이 가득 들려 있었다.
-저희가 대화하고 있던 사이에 모두 준비를 해준 모양입니다.
-뭐야, 되게 힘든 일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이었어?
역시 무슨 일이든 해봐야 아는 것이다. 그들이 가져온 양은 지미가 알려준 양보다 몇 배나 많은 양이었다. 얼마나 많은지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동산을 이룰 정도였다.
울프릭과 이차원은 어쩔 줄 몰라 하다 트롤의 언어를 모르기에 일단 그저 꾸벅 인사를 하는데 트롤도 같이 고갤 숙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울프릭이 렌더에게 무언가를 부탁하였다.
-혹시 우리들도 저들에게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수 있나? 도움을 받았으니 무언가 답례를 해주어야지.
이런 상황에서도 도움만 받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울프릭이었다. 렌더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동안 트롤과 다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대화를 마친 렌더는 이렇게 말했다.
-폭포가 막혀서 강물이 마르고 있다고 도와줄 수 있겠냐는 데요? 보통 트롤은 강에서 식수를 해결하니 급한 문제일 겁니다.
***
트롤을 따라가니 폭포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있는 트롤들은 폭포에서 힘들게 돌을 치우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면 작은 돌을 금방 치우고 큰 돌을 힘겨워할 것이다. 하지만 트롤들은 그 반대였다. 큰 돌은 쉽게 쉽게 치우지만, 자잘한 돌이 꽉 찬 곳은 힘들어하고 있었다. 트롤들의 손이 워낙 크기 때문에 섬세한 작업이 안 되고 있는 것이었다.
-저것만 치우면 되는 거지.
다행히 자작나무 가지와 이파리를 모으는 것보다 에너지 소비가 적고 쉬운 일이었다. 울프릭이 몸을 풀며 폭포로 이동하였다.
“잠깐 기다려.”
이차원이 그를 불러 세우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이 Lv1] 스킬을 사용하여 심판자의 검을 건네주었다.
“이걸로 하면 더 빠르게 할 수 있을 거야.”
이차원이 울프릭에게 검을 건네주었지만 울프릭은 그것을 선뜻 받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검을 받았을 때 이차원이 좋아하던 것이 머릿속에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아챈 이차원은 [전이 Lv1]으로 복사한 또 다른 심판자의 검을 보여주었다.
“난 하나 더 있으니까 받아.”
-어째서 너한테 하나가 더 있는 거야?
울프릭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두 개의 심판자의 검을 보며 놀라움과 당혹감을 금치 못하였다.
“난 요정이잖아, 이런 일은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다고.”
-아 맞다, 넌 요정이었지. 아무튼 고마워, 잘 쓸게.
이차원이 건네주는 검을 받고 울프릭은 트롤들이 일하고 있는 폭포로 다가갔다. 울프릭이 심판자의 검을 휘두르자 무형의 십자가가 떨어지면서 폭포를 막고 있는 돌들을 전부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그 뒤, 이차원이 제우스를 사용하여 바람을 일으켜 기루들을 전부 날려버렸다. 순식간에 폭포의 물을 막고 있던 돌들이 사라지고 엄청난 양의 물들이 강을 향해 질주하였다.
이를 본 트롤들이 놀라고 기쁜 마음을 표현하듯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역시 성능 하나는 최고잖아.
검의 능력을 보고 감탄했는지 한동안 손에 쥐고 있는 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울프릭이었다.
-고맙다고 뭐 더 필요한 거 없냐고 묻는데요?
“염색약이랑 실타래가 필요하긴 한데 여기선 구하기 어려우니 이만 가죠. 그리고 기꺼이 보답해주었는데 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렌더는 알겠다고 한 뒤 트롤들에게 모두의 고마움을 대신 표현하였다. 트롤들 또한 그들에게 마치 인간처럼 감사의 인사를 하듯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였다.
-그나저나, 염색약이랑 실타래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알아?
“일단은 마을로 돌아가서 더 알아보고 오자.”
이차원 일행은 리프 마을로 돌아와 염색약과 실타래에 대해 알만한 장소에 대해 찾아갔다. 이차원이 울프릭과 렌더를 끌고 간 곳은 바로 의상제작소였다. 그곳에 있는 의상제작소에는 여성들이 분주히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 정도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느냐면 여성들은 딸랑거리는 도어벨 소리가 들리는데도 일하는 데 바빠 손님이 온 줄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실례합니다.
렌더가 말을 건네는 데도 그 누구도 응답해주지 않았다.
-혹시 우리 말이 안 들리는 거 아니야?
울프릭은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려 하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이차원이 울프릭을 잡아 다가서지 못하게 하였다.
-어이, 왜 그래?
이차원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제각기 맡은 일을 하느라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어느 무리가 왁자지껄하며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뭘 저리 재미있게 구경하나 싶어서 여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가는데 한 여자가 길 가다가 주웠다며 손가락을 뽐내고 있다.
-이거 오늘 길을 걷던 중에 땅에서 주웠어.
-어머, 정말 예쁘다. 심지어 손가락에 딱 맞네.
-어디서 주웠어? 정말 복도 많아.
장식이 없는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매끄러운 곡선과 빨간 잉크로 가문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다.
그런데 이차원을 따라와 반지를 확인한 울프릭이 여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반지를 가진 여성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 이 반지 어디서 났지?
여자의 손을 거칠게 잡고 매섭게 묻자 여자들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곤 울프릭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여자들 또한 울프릭과 이차원이 세운 공에 대해 익히 전해 들었고 그들의 얼굴도 다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거칠게 몰아가니 안 무서워할 수가 없었다.
-집에 가는 길에 떨어진 걸 주운 것뿐이에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반지를 소유한 여성은 목소리를 벌벌 떨며 울프릭한테 잡힌 손을 빼내려 하였지만 어째서인지 울프릭이 여자의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진정하고 일단 손부터 놓으세요.
렌더 역시 울프릭의 손으로부터 갇혀있는 여성의 손을 빼내려고 하였다. 그제서야 울프릭은 여성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차원은 분명 처음 보는 반지이다. 하지만 울프릭이 이런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분명 중요한 물건이라고 판단을 하였다.
-갑작스레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반지는 돌려주세요.
-네..?
여성은 아직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는지 반지를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이차원은 조심스레 다가가 악의는 전혀 없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 두 손을 어깨까지 올려 보였다.
“그 반지는 원래 제 것입니다. 저주받은 반지라 끼고 있는 사람에겐 언제 저주가 내릴지 몰라 제가 관리하고 있었던 건데 어느 순간 사라져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차원은 최대한 말을 둘러대며 여성을 설득하였다. 결국 여성은 반지를 빼내어 이차원에게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반지를 돌려받는 데 성공한 이차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회의실로 올 수 있어요?
김역전의 전화에 재빨리 휴대폰 시간을 확인해보는데, 벌써 하룻밤이 지나있었다. 이 게임 속에서 꼬박 하룻밤을 센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챈 순간, 피로가 트롤들의 파도처럼 몰려와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참아내었다.
“곧장 가겠습니다.”
***
회의실에 먼저 모인 최번개와 은지, 예리나는 김역전에게 간단한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용산구청에서 게이트 의뢰가 왔습니다. 이틀 후 용산역에 게이트가 생긴다는데 근래 성과가 뛰어난 이차원 팀을 쓰고 싶다 하네요. ”
“조건은요?”
“조건도 괜찮습니다. 계약금이 높은 건 둘째치고 구울이 나오는 게이트라고 합니다.”
김역전의 말에 은지의 표정이 밝아졌다.
“구울이라면 핏빛결정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핏빛결정은 지배자의 반지를 만드는 핵심 재료며 지배자의 반지는 각자 고유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요새 쉴 틈 없이 버프를 돌리다 보니 마나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은지에게 있어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설마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불렀어요?”
“정보가 화랑 길드한테 새어나갔습니다.”
화랑 길드라면 김역전의 여왕벌 사건의 장본인인 예원이 몸담고 있는 길드였다.
“아마 그날 게이트에서 C급 헌터인 이지스 그룹을 마주칠 확률이 큽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따로 회의실로 부른 거고.”
“화랑 길드는 둘째치고 구울은 암 속성 계열 아닌가? 저번에 된통 당해서 찝찝한데.”
“은지 씨. 힐러니까 빛 속성 능력이 있지 않나요?”
“네? 그렇긴 한데 전 쉴드 쪽에 능력이 높아서요. 빛 속성 공격은 [빛의 구슬]이 있지만, 그것도 레벨이 높진 않아서...”
은지는 미안함에 말끝을 흐렸다. 힐러지만 팀에 힘이 돼주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 사람들은 누구야? 김역전의 새로운 똘마니들인가?”
이지스 그룹의 리더 예원이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기어들어와?”
“돈은 우리가 적당히 줄 테니까 이번 토벌에서 빠져.”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동과 말투에 그곳에 모여있던 인원들은 전부 기가 막혀 했다.
“저희가 겨우 그쪽에게 돈 받으려고 여기에 모인 줄 알아요?”
“제가 당신들보다 훨씬 유능하기 때문에 그러는데요? 최번개 씨?”
최번개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약한 내면이 예원의 말 한마디에 깊이 찔린 것이다.
“그럼 그런 줄 알고...”
그리고 그 순간 문 앞을 막아서고 있던 예원이 앞으로 밀려났다.
“뭐야 당신,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길 막지 말고 앞에서 나오시지.”
예원을 밀친 사람은 바로 이차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