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이차원과 울프릭, 그리고 그렉까지 성 밖으로 무사히 나오자 트롤을 피해 숨어있던 주민들이 하나둘 거리로 나오고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 너 나 할 거 없이 주민들이 전부 나와 그들을 둘러싸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찬양의 목소리를 키웠다. 성안에 남아있던 트롤들도 이차원 일행을 지켜보며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차원 일행은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하지만 누군가 이차원의 옆을 지나가 선두에 섰다. 바로 울프릭이었다. 울프릭은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왕은 죽었다!
이차원 일행의 생각과는 달리 울프릭의 말을 들은 주민들의 박수 소리가 왠지 모르게 점차 잦아들더니 주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왕이 죽었다고?
-이거, 기뻐해야 하는 거 맞지?
-그놈들 뒤져서 좋긴 한데 새 왕이라고 더 나을 법이 있나 어디. 그 나물에 그 밥이지.
주민들 반응도 각자 달랐다. 이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주민들도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새로운 왕이 왕좌에 앉게 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마을 촌장의 물음 하나에 주민들의 관심과 집중이 하나로 모이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왕은 이제 누군겨?
새롭게 왕좌의 자리에 앉을 사람. 왕이 죽은 이상 새 왕을 앉혀야만 한다. 그것이 이치였다. 그런데 주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선가 나타난 귀족인이 말을 꺼내었다.
-왕좌에 오를 사람은 나다.
이차원이 갑작스러운 귀족인의 등장에 얼굴을 살펴보는데 자신이 기억하는 게임 시나리오상 중요하지 않았던 NPC 같았다. 중요 NPC의 얼굴은 지금까지 다 알아 왔으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어이, 저 녀석 혼자 무슨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릴 하고 있냐? 아무것도 안 해놓고선. 뭐? 자기가 왕좌에 오른다고?
울프릭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 화도 못 내고 있었다.
‘이것도 변형된 시나리오의 일종인가.’
이차원이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조금 의아해하는데 귀족인 스스로 자신이 왕이 될 이유에 대해 설명하였다.
-나디저스 5세는 핏줄이 없으니 왕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없다. 그동안 우리 호퍼 가문이 이 나라에 기여한 공을 생각한다면 응당 내가 새 왕이 돼야 한다고 보는데, 불만 있는 사람 있나?
불만이 있느냐고 묻지만 절대로 저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질문을 하는 순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에 가까웠지. 그리고 그 뜻을 아는 주민들도 쉬쉬거리며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귀족인이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되자 역시 그래야지, 라는 듯이 비릿하게 웃고는 그렉과 울프릭 그리고 이차원 쪽으로 몸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심판자의 검을 내놔라.
-싫다면.
울프릭의 건방진 태도에 화가 난 귀족인이지만 그들이 성에 있는 몬스터를 처치한 것을 알기 때문에 쉽게 덤비진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귀족인이 아니었다.
-어디 외부인 주제에 남의 나라 일에 간섭질이냐!
-그럼 외부인만도 못한 당신은 뭔데 간섭질이야.
울프릭이 귀족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마을에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땐 조용히 숨어있다가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기어 나오는 꼴이 너무나 얄미웠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생각할수록 재수가 없어 당장에라도 쳐내버리고 싶었다.
그때, 뜻밖의 인물이 귀족인에게 말을 던졌다.
-나으리. 그런데 그동안 뭐 하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신 겁니까?
그 뜻밖의 인물이란 바로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가 던진 귀족의 뼈를 때리는 말을 끝으로 주민들도 여기저기서 야유를 퍼부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 맞아! 저 전사들이 몬스터 소굴로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동안 당신은 뭐 하고 있었어?
-이제 와 상황이 다 끝나니까는, 뭐? 자기가 왕좌에 올라야 한다고? 뻔뻔해도 저리 뻔뻔할 수 있나?
-왕좌에 올라가 놓고선 이번처럼 그저 방관하기만 할 생각인 거냐!
여기저기 불만의 소리가 자신을 향해 날아들며 자기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게 되자 분노한 귀족인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경비병들을 불러왔다.
-지금부터 내 말을 거역하는 놈들은 그 책임이 따를 것이다!
귀족인의 수하인으로 보이는 경비병들이 귀족인의 지시를 받아 몰려있는 주민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 행동에 주민들 모두 공포심과 당혹감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채로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런 모습에 울프릭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일부러 귀족인이 볼 수 있도록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웃어? 이놈부터 처리해라!
귀족인이 자신의 경비병들에게 명령하였다. 경비병들 중 일부 인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울프릭에게 다가서려 할 때였다. 울프릭은 눈 깜짝할 새 귀족인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버렸다.
-네... 네 녀석 따위가 감히..!
아킬레스건을 다친 귀족인이 고통에 사무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에 주민들을 둘러싸고 있던 경비병들이 모두 경직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울프릭이 그렉을 끌고 나왔다.
-인사해라, 앞으로 이곳의 왕이 될 사람이다.
울프릭 말에 이번에도 주민들이 모두 동요하였다.
-저놈 착한 거야 알지만, 집안이 좀 그렇지 않나.
주민들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렉의 심성이야 마을 주민들 모두 알았지만, 왕좌에 오를 가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렉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에 대해, 자신을 주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그래서 이차원이 그렉에게 왕위에 오르라고 하였을 때 심히 놀랐던 것이다.
그렉은 주민들 앞으로 홀로 나아가 섰다.
-맞습니다. 주민분들의 생각에 저도 동감합니다. 저보다 더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도 있고 전 왕에 오를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렉의 말 한마디에 소곤거리던 주민들의 소리가 모두 조용해졌다. 아무리 업적을 쌓아도, 얼마나 큰일을 해내어도 결국 집안 내력의 힘이 없으면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그렉도 자신의 가문을 알아서 왕위에 오르길 거절하려고 한 그때-
-한 사람의 목숨도 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나라의 명운을 이끌 수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던져가면서 구한 사람이 있다면 어디 한번 손들어 보세요.
어느샌가 이차원이 그렉의 옆에 서서 외쳤다. 이번엔 이차원의 물음에 주민들 모두 조용히 침묵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이 성에 처박혀 목숨만 영위할 때 이 사람은 목숨을 던져서 마을을 구했습니다. 전 이 사람이 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보는데요.”
이어지는 이차원의 말에 하나둘 주민들의 표정이 바뀌며 옳소, 옳소, 하며 박수를 한두 명씩 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마을을 가득 메울 정도로 크게 쳐대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가문이 좋았던 자들이 하나같이 마을의 독재자가 되어 핍박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가문이란 것이 허울뿐인 거라는 걸 그들도 충분히 깨달았다.
-새로운 일렉시아를 위하여!
-그렉을 왕으로!
주민들이 그렉을 박수로 맞이해주는데 새롭게 족장이 된 트롤이 이차원과 울프릭 앞으로 다가와 섰다.
트롤 족장의 표정에서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
이차원과 울프릭은 렌더를 데리고 트롤 족장이 이끄는 서식지를 찾아갔다. 서식지에 있는 트롤들은 나무에 걸린 허수아비 인형을 부지런히 떼는 중이었다. 다행히 인형에 깃든 흑마법은 효과를 다해서 지금은 트롤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왜 부른 거래요?
-그날 일을 더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답니다.
렌더는 한참을 트롤 족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흥미로운데요.
-뭐라고 합니까?
-그 여자가 카타브리아를 깨울 방법을 찾아냈다고 기사와 사제들에게 말하는 걸 들었대요.
‘카타브리아면... 상위 악마 중 하나인데, 그런데 왜 그 녀석을 깨우려는 거지?’
의아해하던 이차원은 이내 그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만큼 재밌는 건 없다고 트래스 마을로 가서 재미난 실험을 할 거라고...
통역하던 렌더도 소름 끼쳐 하며 말끝을 흐리고 울프릭의 표정 또한 더욱 굳어졌다. 이차원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데 울프릭이 먼저 침묵을 깼다.
“트래스 마을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나?”
-설마 가시게요?
렌더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같이 가잔 말 안 하니까 길이나 알려주지.”
-굳이 간다면 말리지야 않겠지만 조심하십쇼. 거기 있는 거인한테 발견되면 그대로 황천길 건너는 거니까.
‘거인이라면 혹시...’
이차원은 렌더가 무슨 얘길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트래스 마을은 세크라이아 영지에 속한 마을인데 세크라이아와 일렉시아의 경계선인 볼 산맥, 그곳에 거인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만나보겠군.’
***
볼 산맥에 사는 거대한 거인의 존재는 이차원도 만나보지 못했다. 예정대로라면 ‘DARK HORN의 DLC-불타버린 존재’에서 나오게 될 예정이었으나 전작의 평가가 워낙 좋지 못한 탓에 DLC가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차원 자신도 게임 플레이를 하면서 거인이라는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이다.
“울프릭. 가기 전에 리프 마을에 들리자.”
-왜?
“유능한 사냥꾼을 찾아야 하니까.”
울프릭은 이차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정이니 뭔가 아는 것이 있겠거니 하며 이차원의 뒤를 따랐다.
“그새 많이 바뀌었네.”
리프 마을의 노예 취급받던 주민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거리엔 활기가 가득했다. 울프릭도 바뀐 마을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는지 오랜만에 표정이 밝았다.
-그래서 사냥꾼은 왜 찾는 건데?
“당장 거인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까. 유능한 사냥꾼을 찾아 안내를 부탁하는 편이 낫잖아.”
이차원 말에 울프릭도 고갤 끄덕이는데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이 울프릭과 이차원을 알아보더니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웅이 돌아왔다며?
-어디? 어, 저깄다.
현실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차원은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들한테 적응이 되지 않는데 울프릭은 그러든 말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의외로 관종인가.”
-관종? 그게 뭐냐?
“그걸 또 들었어? 별 상관없는 이야기니 무시해.”
이차원의 혼잣말에 울프릭이 궁금증을 가지려 할 때, 갑자기 인파를 헤집고 점술사 하나가 나오더니 둘을 붙잡는다.
-당신들이 찾는 그 사람 내가 찾아줄 수 있는데.
이차원과 울프릭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점술사 등장에 뭐냐는 표정을 짓자,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점술 집에 데려다 놨으니 따라만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