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꺼지라는 말에도.
김인성은 울상 지으며 늘어졌다.
“정말, 미안해. 두 시간 전에 연락이 왔어. 30분 지나면 합정역 근처에 게이트 하나가 열릴 거야.”
일반적으로 게이트가 생성되는 건 며칠 전에는 알아차리고 준비하는 게 지금까지 일반화된 기간이었다.
허나 최근 사태처럼 준비할 새 없이 나타나는 게이트들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지금 군 쪽 헌터들은 물론이고 민간 길드 헌터들 중에서도 마땅히 갈 인원이 없어.”
“김인성 씨. 당신이 자랑하는 헌터들은 어쩌고 우리 같은 애송이들한테 도와 달라는 겁니까?”
과거 자신을 무시할 때 들었던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니 김인성 자신도 지금까지 했던 행동을 알기에 더욱 낯뜨거웠다.
하지만 차원에게 고개 숙일 수밖에 없으니.
“지금 근방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은 전부 경기도 쪽에 생긴 대형 게이트로 지원 나갔어.”
김인성의 어투가 점점 절박해 졌다.
“게이트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믿고 맡길 실력을 지닌 소규모 헌터 팀이 꼭 필요해.”
동시에 진심으로 반성한 듯한 표정으로 허릴 숙이고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에 사과했다.
“말뿐인 사과만큼 허울인 건 없는데. 대가는 있겠죠?”
“이번 게이트 토벌로 나오는 것들 전부 가져도 상관없다.”
전부 가져도 상관없다는 말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앞에 있는 이 인물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연한 조건 같은데요?”
“게이트 권한을 팀 하나에 전부 넘겨주는 건데…… 그럼, 따로 원하는 거라도 있는 건가?”
최번개와 은지가 한창 김인성을 상대로 협상을 진행하는데 옆에 있던 김역전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씁쓸하겠지.’
한때는 대단했던 길드였지만 지금은 예전에 잘 나갔다던 허울만 남아있는 남자.
아버지인 이재배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그에게 약간의 동정심이 들기까지 했다.
‘누구에게나 다시 일어날 기회는 필요하다.’
만약 게임 폐인으로 살았던 자기에게 각성의 기회가 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을 거다.
그러나 이차원은 기회를 받았다.
사람의 마음엔 저마다 열정의 불꽃이 있다는데 이차원은 이 사람의 마음엔 얼마만큼의 열정이 남아있나 궁금해졌다.
“협상은 길드장님이 하시는 게 낫지 않나? 이런 건 우리보다 경험 많으실 테니까.”
대뜸 일행의 말 허리를 자른 차원의 말에 두 사람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김역전도 놀란 눈빛으로 바라봤다.
“형, 벌써 정한 거예요?”
“고민한다고 더 좋은 선택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앞으로의 활동엔 자신을 진심으로 케어할 길드가 필요했으니 말이다.
그에 은지와 최번개도 고갤 끄덕이며 차원의 선택에 동의했다.
“맞아요. 조건도 괜찮고.”
“나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셋의 시선이 이제 김역전한테 꽂혔고, 따가운 시선을 한몸에 받던 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느꼈다.
“저랑 이야기하시죠. 게이트 스캔 결과는 가져오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김역전의 눈알은 김인성이 건넨 서류 위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E등급의 게이트.
하지만 스캔 결과 특수 개체 같은 변종이 출연할 확률이 높아 위험도는 D급 이상이었다.
“계약금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변종 게이트지만 E급입니다. 덕분에 법으로 정해진 계약금을 최대로 지불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변종 게이트죠. 특수 개체 하나만 해도 전투 양상이 바뀌는 건 어린 애도 아는 사실입니다. 당장 지난 E급 거미 게이트만 해도 특수 개체가 낀 것만으로 군부대가 손도 못 쓰지 않았습니까?”
“그럼 대체 얼마나 원하시는 겁니까?”
“그건 저희가 아니라 국가 측에서 제시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역전의 말에 김인성은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30분만 있으면 게이트가 나타나는데, 여기서 입씨름하다 시간을 허비할 순 없는 일.
“4천 드리겠습니다.”
원래 생각한 것보다 몇 배는 높은 계약금.
하지만 E급 변종의 위험성은 물론이고 긴급 의뢰라는 걸 포함한다면 의뢰주와 헌터, 양측이 모두 인정할 만한 금액이었다.
결국 김인성은 금액이 달라진 계약서를 내밀었고, 이제 사인만 하면 이차원 일행은 역전 길드 소속으로 일을 하게 될 거다.
“저, 그런데 서류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요.”
김역전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차원을 보는데, 최번개와 은지는 그 생각을 읽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
한창 사람들로 북적여야 할 합정역 4번 출구는 스산할 정도로 한적했다.
이미 게이트 발생이 확인된 순간 주민들은 미리 대피했고, 오직 차원 일행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김인성이 말한 시간이 되자 열리기 시작하는 게이트.
허나 차원 일행은 당장 게이트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자 저 멀리서 예리나가 달려왔다.
“좀 늦었네.”
“미안. 근처 도로 다 막혔더라고. 돌아서 오느라.”
차원은 길드장한테 예리나도 길드에 넣어주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고 김역전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도 예리나의 능력과 차원 팀과의 시너지를 고려했고, 전위가 부실한 편이니 예리나는 훌륭한 팀의 벽이 되어줄 테니까.
그리고 예리나까지 도착하자 차원 일행은 성큼 게이트로 들어가려는데 최번개가 그들을 붙잡았다.
“잠깐, 형. 우리 사진이라도 하나 찍고 가요.”
“뭐?”
“길드원 완전체가 처음 모인 역사적인 날이니까.”
귀찮다는 표정이지만 최번개가 카메라를 꺼내 들자 억지로 웃어주고는 곧장 게이트로 들어갔다.
분명 화창한 낮이었는데,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자 차가운 공기가 네 사람을 휘감았다.
주변에 수백의 비석들이 수를 놓은 묘지 위로 어둑해지는 파스텔톤의 하늘에 구름이 끼어있다.
“지형을 보니 언데드 계열이 나올 것 같은데.”
예리나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땅이 푹 꺼지며 그곳에서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썩은 손아귀들.
삐걱거리는 관절과 성한 곳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처참한 신체까지.
언데드 몬스터 하면 떠오르는 존재인 좀비였다.
“역시 그쪽에서 준 정보대로네. 차분하게 대응하죠.”
차원의 말에 다른 팀원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어기적거리며 다가오는 좀비들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좀비 떼를 향해 달려가는 일행들의 발목을 붙잡는 지형.
비가 시원하게 내린 다음 날처럼 찐득한 진흙 바닥 때문에 이동 자체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래에선 불쑥 좀비들의 손이 튀어나와 발목을 잡으려 하니 피하기 바빴고, 차원 뒤에 있던 최번개와 예리나는 좀비들 손에 두 다리가 묶인 상태다.
“은지 씨, 저 둘 좀!”
은지의 몸을 중심으로 퍼지는 밝은 빛.
언데드는 태생적으로 빛에 약한 몬스터들이라 은지가 사용한 천상의 빛에 닿은 언데드들은 마치 타오르는 듯, 메케한 연기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 덕분에 차원 일행은 급히 묘지 밖으로 나섰다.
“와, 죽다 살았네.”
아직 발목을 감싸던 좀비의 썩은 손바닥 감촉이 남아있던 최번개는 고개를 흔들어댔다.
“아니, 안심하긴 이른 것 같은데.”
예리나가 저 멀리서 들썩이는 땅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정상적인 성대에선 나올 수 없는 그르렁 소리와 함께 좀비들이 일어섰다.
“내가 할게!”
최번개가 앞으로 나서며 땅거죽 위로 올라오는 좀비들 머리에 낙뢰를 뿌려댔다.
번쩍이는 푸른 빛과 함께 볼을 스쳐 지나가는 짜릿한 감각.
지난 게이트 공략 이후로 최번개도 레벨이 올랐고, 스킬들의 위력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그워어어.”
전기 계열 스킬의 최대 장점은 뭉쳐 있는 적들에게 더욱 효과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언데드들에게 전류는 그다지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저 낙뢰에 적중당한 언데드 몇 놈만 새까맣게 타버렸을 뿐, 주변에 있는 언데드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흐르는 전류를 무시하며 계속 다가왔다.
“뒤져라 좀!”
몇 번이나 낙뢰를 떨어뜨렸지만, 저 많은 수를 상대하기엔 역부족.
결국 차원이 앞으로 나서며 슈퍼노바를 사용했다.
그가 내민 발끝을 중심으로 진흙투성이 땅은 부채꼴 방향으로 하얗게 얼었고, 이내 좀비들 대부분이 발목부터 서서히 얼어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발목이 얼어붙으면 당황한 나머지 움직임을 멈추지만, 저 녀석들은 이미 죽어 두려울 게 없는 좀비들.
자신의 발목이 부서지는 것쯤은 아무런 상관하지 않고 전진을 이어갔고, 이내 온몸이 얼기도 전에 발목만 희생한 좀비들과 그 위를 발판삼아 다가오는 좀비들의 모습에 팀원들 모두 치를 떨었다.
“변종 게이트라더니, 이거 끝도 없잖아?”
차원과 최번개가 아무리 스킬을 써대도 의미 없는 소모전만 계속될 뿐이니, 결국 서서히 안 좋은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잠깐 후퇴하면서 게이트 쪽으로 움직이는 게 어때요?”
“그게 좋겠습니다.”
은지의 말대로 잠시 물러나야만 할 때.
다른 일행들도 그 의견에 맞춰 물러나며 좀비들을 제압해나갔지만, 한 놈 쓰러뜨리면 그 자리에 두 놈이 다시 일어서니 도대체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때 물러나던 일행들 사이로 좀비 몇 마리가 튀어나왔고, 덕분에 두 팀으로 나뉘자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변했다.
“리나 누나, 그 앞에!”
“번개 넌 뒤로 물러나!”
전위를 맡은 예리나가 앞으로 나서며 좀비들을 막고, 그 뒤편에선 최번개가 푸른 번개를 쏘아댔다.
허나 서포터가 없는 전위가 전선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결국 사색이 된 두 사람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방법, 방법이 있을 거야.’
팀원들이 가지고 있는 스킬들을 하나씩 전부 정리하며 지금 상황에 쓸만한 것이 있나 고민하다 은지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다시 한 번 은지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천상의 빛.
그 성스러운 빛줄기에 겁을 지레 먹은 좀비들은 포위망을 풀었다.
“이건 연달아 쓸 수 없어요! 이 틈에 빨리!”
덕분에 예리나와 최번개는 다시 합류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 스킬 숙련도가 낮아 천상의 빛의 지속시간은 극히 순간이니 다시 제정신을 찾은 좀비 놈들은 이어서 네 사람을 포위했다.
썩은 고기로 만든 벽이 다가오는 것 같은 모습에 최번개의 눈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역시 김인성 그 인간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괜히 이딴 델 와서.”
“자꾸 재수 없는 말 좀 그만하고 살아서 나갈 생각을 하라고!”
일갈과 함께 땅을 흔들어대는 예리나지만, 최대한 좀비들의 전진을 막아도 역부족이었던 탓에 속으론 진땀을 빼는 상황.
“죄송해요. 제가 레벨이 부족해서.”
결국 은지도 이제 이 상황에 체념한 듯했다.
“은지 씨 잘못 아닙니다. 방법이 있을 테니 아직 포기하지 마시죠.”
오직 유일하게 차원만이 방법이 있을 거라 스스로 타일렀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끗 하늘을 보는데, 은빛으로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거대한 원반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들이 걷히고 나타난 구원의 보름달.
그리고 때마침 차원의 눈앞에 안내창이 하나 떠올랐다.
[특수조건 달성으로 히든 스킬 {VR} 보름달 LV1이 해금되었습니다.]
그걸 읽는 순간 차원의 몸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근육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 입고 있는 옷들을 찢어발기기 시작했고, 그 사이로 잿빛 털이 자라나며 덥수룩하게 뒤덮었다.
주둥이는 삐죽 튀어나오며 그 끝은 촉촉한 흑요석 같은 것이 자릴 잡으니.
“늑대인간?”
옆에서 그 광경을 보던 은지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순간 차원은 다가오는 좀비 떼를 향해 두 손과 발로 땅을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