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드레이크의 손길을 따라 급히 들어온 마법 연구실.
말이 연구실이지 플라스크였던 걸로 보이는 유리 조각이나 정체 모를 액체들이 흩뿌려져 있는 게 완전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연구실에 들어온 울프릭은 급하게 차원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요정. 저놈들은 성벽도 부수고 들어오는 놈인데, 이런 얇은 벽 안에 숨어서 어쩌자는 거야?
-마법사들의 연구실은 주인의 방어 마법들로 무장된 장소야. 여차하면 성벽보다 든든한 곳이니까 걱정 마.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작게 중얼거린 울프릭은 이번엔 드레이크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트롤들이 세뇌당한 놈들인가?
네. 복잡한 술식에 묶여있는 터라 저희는 알 수 없었지만, 대마법사님이라면 풀 수 있으시겠죠.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마법사는커녕 촛불 수준의 불꽃도 낼 수 없었으니까.
그 사이 차원은 연구실을 빙 둘러보기 바빴다.
여러 몬스터의 표본이나 서책들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 왕국 마법사들이 뭐라도 해보려고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던 건 사실인 모양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이차원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으니, 구석진 자리에 있는 서책 하나.
표지에는 오크와 임프들이 약식으로 그려져 있었는데, 차원은 문뜩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강한 생명체를 강제로 세뇌시키는 임프들과 그런 임프들을 좋게 보지 않는 오크들은 둘도 없는 원수 사이였다.
그런 두 생명체가 같은 책 안에 그려져 있는 덕에 차원은 저절로 그곳에 눈길을 보냈고, 그걸 본 드레이크가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역시 대마법사님과 함께 다니는 영적 존재시군요. 이 교본들 중에서 그걸 먼저 고르시다니.
“이게 무슨 책입니까?”
-세뇌에 대해 연구를 시작했을 때 저희가 가장 먼저 연구한 분야에 관한 책입니다.
강한 자를 따르는 습성이 있는 오크들에게 나약한 임프에게 세뇌당해 노예처럼 살아가는 건 최악의 불명예였고, 그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세뇌를 푸는 신비한 가루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크들 머리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학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크들 사이에서도 가끔 임프 마법사 같은 존재들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덕분에 비정상적인 지능을 가지고 연구를 이어온 게 현재 학계의 정설입니다.
-그럼 그 가루라는 걸 만들면 되는 일 아닌가?
-죄송합니다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대마법사님. 이 가루는 오직 오크들만 정제할 수 있는 가루라서 저희가 아무리 연구해도 제작하는 건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직 오크들의 도움을 받아야 제작할 수 있는데, 오크들이 인간을 돕는다는 건 그 몬스터들이 농경 생활을 시작하는 것과 비슷할 법한 일이라는 것.
하지만 차원과 울프릭의 상태는 달랐다.
무려 오크 우두머리를 직접 쓰러뜨리고 지도자로 추앙받았으니,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
그런데 문득 차원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원래 게임 시나리오대로라면 일렉시아 성은 보수적이지만 평화로운 분위기다.
그런데 지금은 트롤들에게 붕괴 직전까지 갔으니, 어떤 식으로 가야 게임 시나리오를 바꿀 수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성을 구해야 하는지 트롤에게 점령당할 때 지켜봐야 하는지 모르겠어.’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자신이 게임 시나리오를 진행하는 게 아니라, 게임이 자신을 테스트하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
어떤 선택을 할지 모르겠지만 당장 마을의 일을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저번에 불구덩이에서 마을 주민들을 방관했을 때 경험치가 소멸되는 패널티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나서야 경험치는 다시 돌아왔었고.
“울프릭. 나가서 좀 더 둘러보자.”
당장은 막는 것이 최선 같았다.
***
연구실에서 있던 잠깐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바깥은 태풍이 지나간 것 같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석벽을 부수며 들어온 트롤들이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짓밟으며 전진한 발자국이 보였고, 여기저기엔 미처 피하지 못한 희생자들의 사체가 굴러다녔다.
-이곳 왕가는 영토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뭘 한 거지?
울프릭은 처참해진 마을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저 왕성을 지키는 병력들이 조금이라도 내려와 주민들을 대피시키려는 노력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진 않았을 거다.
‘어느 곳이든 가장 밑에 있는 사람이 먼저 고통받는 건 다를 바가 없네.’
아무리 현실적이라도 이곳은 게임 세계다.
그러나 게임 세계에서조차 가장 약자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 먼저 죽어나가니 이젠 이곳이 게임인가 현실인가 구분되지도 않을 것 같았다.
트롤들은 이미 사라졌으나, 울프릭은 무너진 성벽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만 다셔댔다.
“여긴 그냥 지나치자.”
-뭐?
솔직히 차원도 그냥 지나치는 걸 생각하긴 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울프릭의 안위와 메인 시나리오뿐이었으니 말이다.
허나 울프릭의 성격상 절대로 지나치지 않을 거란 걸 아니 이걸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와중 그가 직접 지나치자 말하니 놀란 것이다.
-이곳은 심판을 받아야 해.
“심판이라니.“
-성이 무너진다 해서 백성들이 죽진 않아. 체제만 무너질 뿐이지.
”왕가를 심판하자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울프릭은 마을을 나서려는데 차원이 그를 잡기도 전에 드레이크가 울프릭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대마법사님! 이대로 가시다니!
“비켜.”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대마법사님이 아니면 이곳 사람들은 이젠….
드레이크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으나 울프릭의 표정은 하나도 변함없었다.
-너도 목숨줄 붙어있을 때 떠나. 이딴 희망 없는 곳에 붙어있지 말고.
그대로 무릎 꿇은 드레이크를 지나쳐 걷는데 이차원 앞으로 안내창이 뜬다.
[메인 NPC와의 호감도가 떨어졌습니다. -50]
[EXP 1500이 소멸되었습니다.]
‘메인 NPC? 이 드레이크란 놈이?’
만약 저 눈앞의 젊은 마법사가 중요한 NPC라면,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멸망으로 가는 게임 시나리오를 막는 방법이란 것.
그러기 위해선 울프릭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울프릭, 잠깐 기다려봐.”
-설득할 생각은 마라, 요정.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 생각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니까.
울프릭의 단호함에 드레이크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드디어 실낱같은 희망을 찾았다 생각했는데, 이대로 그마저 등 돌리고 떠난다면 이곳은 진정 끝이었다.
“이대로 떠나시면 안 돼요. 영적 존재시여. 제발 대마법사님을 설득해주세요.”
드레이크는 목표를 바꿔 차원을 붙잡고 매달렸고, 그는 거절당한 사람치고 꽤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차원은 울프릭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물론 플레이 중 게임상에서 울프릭이 가진 과거가 다 밝혀진 건 아니다.
단순히 유저들끼리의 떡밥으로 남아 있던 거지만, 확실한 건 울프릭이 명문 있는 가문의 자제라는 거다.
그리고 명문가 자제가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건 뻔했다.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거지.’
울프릭의 성격으로 보자면 그가 부정한 일을 저지른 건 아닐 테니 분명 정치 놀음에서 누명을 쓰고 몰락한 것이 뻔했다.
그 말은 즉 울프릭의 신념 중 정의가 높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차원은 그 부분을 살짝 건드려주기만 하면 됐다.
“심판을 우리 손으로 하는 건 어때?”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가 직접 왕을 바꾸자고.”
울프릭의 놀람 가득한 표정에 차원의 표정은 점점 능글맞게 변해갔다.
“고작 쓰레기 왕 때문에 여길 지나치는 건 울프릭 너답지 않아. 왕을 바꾸는 것. 그것이 네가 말하는 정의고 심판이다.”
***
차원의 말을 들은 울프릭은 다른 의미로 조금 놀랐다.
자신이 봐온 이차원이 그렇게 이타심이 있는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울프릭과 스스로에게 이익이 될 법한 행보를 원하던 요정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그리고 그 얘길 가만히 듣고 있던 드레이크가 끼어들었다.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세요! 우린 버티고 또 버티고 있어요. 대마법사님께서 떠나시면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지는 거예요.
결국 울프릭은 드레이크와 차원을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 사람들은 죄가 없어. 여길 지나친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심판을 받을 거 같아? 그들이 얌전히 죽을 것 같냐고. 그 과정에서 또다시 마을 사람들이 희생당할 거야.”
차원의 말에 울프릭이 고갤 주억거리고 드레이크는 감동한 표정으로 이차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뜨는 상태창.
[메인 NPC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소멸되었던 경험치가 복구됩니다. EXP 1500 +]
마을을 구하자는 차원의 발언에 호감도가 다시금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상태창이 뜨기 무섭게 저 끝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레이크!
상처투성이 낡은 갑주를 두르고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기름기라곤 없이 핏물이 꾸덕하게 굳어 있었다.
무장한 인원이 다가오자 울프릭은 저절로 스턴건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드레이크는 급하게 그의 손을 막고선 말했다.
-저희 형입니다. 이곳의 기사예요.
“형이 기사라고?”
-네. 제가 리프 마을로 도망가려 했던 건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그 신신당부 와중 왕국기사인 그렉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차원과 울프릭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드레이크. 이 사람들은 누구지?
-형, 내가 리프 마을에 가서 귀한 분들을 모셔왔어.
-마을이 쑥대밭이 된 지금 찾아온 외부인들이? 대체 누군데.
-대마법사님이랑 요정님이야. 우리 마을을 구해주신대.
이미 울프릭이 마을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 이미 기정사실이 됐다는 듯 말하자 울프릭은 어이없지만, 딱히 토를 달진 않았다.
허나 그렉은 동생의 말에 코웃음을 쳐댔다.
-대마법사라니. 그런 대단하신 분이 뭐 얻을 게 있다고 이런 촌마을까지 오겠어?
-형, 진짜라니까. 이분은 손짓만으로 전기 마법을 펼치는 분이야.
-대단하다는 왕실 마법사들도 트롤 전쟁 때 전부 죽었어. 너 같이 현실 파악한 소수 마법사만 살았잖아.
그렉이 스스로 왕실이란 단어를 말하고도 벌레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어댔다.
기사란 원래 검을 바치는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존재였고, 그렉에겐 이곳의 왕실이 그 주인일 텐데 왕실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진짜야, 형! 대마법사라면 방법을 알고 계실 거야!
-…일단 저놈들 세뇌를 끊는 게 우선이겠지.
그리곤 울프릭한테 악수를 청하는데 그다지 고까운 얼굴은 아니었다.
-방금 행동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기사 나부랭이인 그렉이라고 합니다.
-울프릭이라고 하오.
그때 뭔가 울프릭의 감각에 위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하늘 위, 검게 물든 그곳을 보자 갑자기 외각에서 거대한 돌이 날아들더니 넷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