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개인 사무실에 홀로 남아 스카우터 군무원들이 보낸 이메일을 확인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이름은 김역전.
벌써 며칠째 집에 가지 못한 그는 덥수룩하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다면 다냐. 망할 새끼들.”
그는 한때 잘나가는 길드장이었지만, 최근 한 헌터가 소란을 일으키고 소속 헌터들을 전부 데리고 나가 기세가 급격하게 기울고 있는 추세였다.
“망할. 처음 그년을 들이는 게 아니었다.”
처음엔 사근거리는 행동에 괜찮다 생각했다.
허나 조금 지나자 숨겨져 있던 여왕벌의 본능이 발동하고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에게 꼬리란 꼬리는 다 쳐대자 김역전도 이상함을 느꼈는데, 이미 늦은 뒤였다.
“미꾸라지 하나가 물 흐린다고 하던 게 정확히 들어맞았네. 그 망할 년 하나 때문에.”
김역전은 이를 갈며 거칠게 책상을 내려찍었다.
물론 남아 있는 헌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길드를 이끌던 메인급 헌터들이 죄다 나가버린 바람에 일이 끊긴 것이 가장 큰 타격이었다.
사실 스카우터 군무원들이 길드와 게이트 토벌 일로 계약할 때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단 하나.
메인 헌터가 누구인가.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수많은 길드를 다 조사해서 헌터 능력을 엑셀로 저장해둘 수 없는 노릇이니 대표할 수 있는 헌터를 보고 길드에게 의뢰하는 게 일반적이라 길드를 운영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간판으로 내세울 헌터를 구하는 거였다.
하지만 현재 김역전의 길드엔 그럴 능력을 지닌 헌터가 없다는 것.
결국 의뢰는 싹 끊기고 수입은 0.
그는 휴대폰을 들어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데, ATM에서 지폐를 뽑을 액수도 없었다.
“젠장. 여왕벌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몰리다니.”
김역전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게다가 여왕벌은 되도 않는 소문을 퍼트리기까지 해서 그의 길드에 가입하고자 하는 헌터들도 없었다.
그딴 개소릴 믿는 멍청이들이 아직도 있다니.
작게 중얼거려 봐도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일인극을 펼치는 것과 비슷한 상황.
처음 여왕벌 사건이 벌어진 이후 밑바닥까지 추락한 길드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으나 이제 한계였다.
벌어놓은 자금도 바닥을 드러냈으니 당장 소속된 헌터들을 케어해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그의 친형 김부상이 들어왔다.
“아직도 그러고 있냐?”
헌터 관련 법 전문 변호사인 김부상은 자신의 동생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홀랑 넘어간 멍청이들도 문제지만, 그딴 멍청이들 설득 못 한 너도 문제 있는 거 아냐?”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동생 괴롭히려고?”
“목소리가 좀 커야지. 복도까지 다 들리더라.”
“됐어 온 김에 나 한강 좀 태워다줘.”
“그래. 여기서 가만히 죽치는 것보단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낫지.”
“아니. 죽기 전에 온도 체크 좀 미리 해두게.”
김부상을 콧방귀를 뀌어댔다.
그가 아는 동생은 자살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라 그저 허투루 하는 말인 걸 알고 있었고, 그 유머 감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농담에 자신의 휴대폰을 보였다.
“머저리같이 있지 말고 이것부터 봐라.”
화면엔 차원과 더불어 최번개, 은지, 예리나에 대한 내용이 가득했다.
도심가에 긴급 출몰한 게이트를 가장 빠르게 처리한 네 사람.
그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근방이 불바다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예상 결과가 나왔고, 이내 칭찬 일색이 연이었다.
그리고 김역전 본인도 여기저기서 대서특필된 내용이라 이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잘난 사람들이 길드가 없겠어?”
“없다더라.”
순간 자신의 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정보가 없는 신규 몬스터가 등장한 D급 게이트를 단 세 명이서 닫고, 현재 C급으로 추정하는 오크 게이트를 네 명이서 닫은 능력자들이 프리랜서라니.
“진짜 이 사람들 프리야?”
“그럼 내가 농담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냐?”
그 말에 김역전이 벌떡 일어났다.
어쩌면 지금 상황을 역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었으니까.
허나 화색이 도는 것도 잠시, 그는 다시금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폭삭 내려앉은 표정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앞길 창창한 헌터들이 우리 길드에 왜 들어오겠어.”
한순간에 스타가 됐으니 굳이 이런 길드 말고도 다른 길드장들이 접촉을 시도할 거였다.
자신보다 더 좋은 대우, 좋은 장비, 좋은 정보들로 밀어줄 길드를 놔두고 다 헤집어진 이런 길드에 오고 싶을까?
김역전이 헌터라 해도 절대 아닐 일이다.
“그래서 여기서 그냥 가만히 앉아서 한강 수온이나 체크할 셈이냐? 거절당하면 뭐 어때서?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
“…….”
“지금 너 아무것도 없어. 다시 말해서 잃을 게 없는데, 막말로 맨땅에 헤딩이라도 할 수 있다는 거 아니냐?”
그 말에 김역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평소 친분이 있는 기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마찬가지로 헌터 전문 정보를 취급하는 기자로, 예전 김역전이 길드장으로 꽤나 이름을 날릴 때 연을 쌓아둔 터라 아직 연락이 닿긴 했다.
“박 기자. 나 김역전이야. 혹시 이번 게이트 닫은 헌터들 번호 알 수 있어?”
-지금 그런 고급 정보를 어디서 구합니까? 그래도 흔하게 알려진 건 최번개 헌터뿐인데, 그거라도 드릴까요?
너튜브와 스트리밍으로 활동하는 최번개의 전화번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김역전은 자신에게 날아온 전화번호를 계속해서 빤히 바라봤다.
‘그래 형 말대로 맨땅에 헤딩이라도 해 봐야지.’
***
스킬을 얻은 이차원은 현실에서 보름달 스킬을 사용하려 하지만 작동이 되지 않았다.
R이면 현실에서도 작동이 돼야 했는데, 이상했다.
혹시 뭔가 특수한 조건이라도 붙은 건가 싶은 와중, 어느새 울프릭은 저만치 리프 마을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가는데, 그새 울프릭은 마을 경비병과 얘길 나누고 있었다.
경비의 채찍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걸 보니, 핍박받는 마을 주민 사이로 끼어든 모양이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난 이렇게 해야 하는 입장이었어.
만약 이 모든 만행을 리지가 저질렀다면, 오빠인 자신이 만회해야만 했다.
“괜한 사람들은 그만 괴롭히고, 성으로 안내해라.”
허나 쉽게 물러날 경비병들이 아니었다.
-이 새끼 아까 그 새끼구만. 대장님한테 뇌물 준 새끼. 근데 어쩌냐? 나한텐 그딴 거 안 통하는데?
-줄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안내하라고.
-너 아까부터 뭐라고 설쳐 대냐? 평생 여기서 노예처럼 일하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그럼 잘 봐라. 내가 뭔데 설치는지.
울프릭이 쥐고 있던 채찍을 자신 쪽으로 당기자, 그 궤를 달리하는 완력에 경비가 끌려왔다.
갑작스러운 당기는 힘에 균형을 잃고 그대로 울프릭을 향해 끌려가는 경비병.
그리고 동시에 뻗어 나간 손이 그의 턱주가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맥없이 쓰러졌다.
-이 새끼들 뭐야! 잡아!
그걸 보던 경비대장의 외침에 경비 몇이 울프릭을 향해 다가왔지만, 늑대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초식동물의 운명이었다.
품속에서 스턴건을 꺼내 든 울프릭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주변 경비병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당장 성으로 안내해라.
-이 새끼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당장 잡아!
-그만.
경비대장 뒤편, 연갈색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앳돼 보이는 목소리로 두 사람을 말렸다.
-마법사님.
-마법사?
경비대장이 설설 기는 걸 보면 꽤나 고위 자리에 있는 마법사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차원은 머릿속으로 최대한 게임 지식들을 끌어올리기 바빴다.
‘이 근방에 네임드 마법사 NPC가 있었나?’
그의 기억으로 능력 있는 마법사 NPC는 대부분 나이가 있는 설정이었고, 이 근방도 그러했다.
저 나이대의 젊은 마법사라면 견습 마법사 수준일 텐데, 경비대장이 저렇게 설설 기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허나 차원은 그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거기 모험가분은 성으로 가고 싶은 겁니까?
-그렇소만.
-그럼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는 누군데?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일렉시아 성의 왕실 마법사인 드레이크라고 합니다.”
***
-전부 죽었습니다.
다른 왕실 마법사 행방에 대한 드레이크의 답이었다.
-얼마 전, 야밤에 트롤들이 서식지를 벗어나 한꺼번에 성을 침공했었습니다.
-트롤들이?
트롤은 성체가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 홀로 생활하는 경향이 있는 몬스터다.
덕분에 하나하나의 강함은 오우거와 견준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절대로 무리를 짓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몬스터였다.
그런 몬스터가 떼를 이루고 한 곳을 집중적으로 침공했다는 건.
-당시 트롤들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질된 걸로 봐선 흑마법에 세뇌를 당한 것 같았는데 해독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렇다면 다른 마법사가 죽었다는 건….”
-트롤들의 대규모 침공, 편하게 트롤 전쟁이라 부르죠. 그때 모든 왕실 마법사가 차출됐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죽거나 도망갔지요.
“그럼 그쪽은?”
-저야 후자입니다.
울프릭의 물음에 드레이크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덧붙였다.
-그런데 왜 나를 성으로 안내하는 겁니까?
-바로 당신이니까요.”
그 말에 차원과 울프릭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드레이크는 계속 자신의 말만 이어나갔다.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와서, 저를 포함한 도망친 마법사들도 해결책을 알아내기 위해 트롤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분노한 레오 왕께선 왕실 마법사를 하나둘 감옥에 가두기 시작하셨죠.
해독법을 찾지 못하면 감옥에서 썩어 죽어야 한다는 어명과 함께 마법사들은 최대한 사태의 원인을 알아내려 노력해왔다 한다.
-저희의 능력이 미천해 그럴 순 없었지만, 당신 같은 대마법사라면 해독할 수 있을 겁니다.
-대마법사라니?
-기이한 영체를 다루고, 주문 없이 강대한 전류를 다루실 정도면 필시 그렇겠죠.
옆에 떠다니는 차원과 스턴건을 보고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울프릭은 당장 정정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대로 입 다물고 성까지 가는 게 먼저라는 식으로.
결국 이런저런 착각과 함께 성에 도착하자 멀리서 보았을 때랑은 다르게 상태가 더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성벽은 죄다 허물어졌고 그 위엔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으며 성안의 상점들과 거리는 불에 타 잿더미로 변모하고 있었다.
거기다 성문도 반쪽으로 쪼개져 문이라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오히려 이곳에서 아직도 죽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다.
-성문을 지키는 병력은?
-그들은 왕가의 일원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 벽면이 갑자기 허물어지며 거대한 트롤이 등장했다.
트롤이 세 사람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는데-.
-이쪽으로 오세요!
드레이크는 급히 두 사람을 잡고 근처에 있는 마법 연구실로 피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