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여자의 외침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비 대장처럼 보이는 남자가 난동을 부리는 여자를 곧장 제압했기 때문이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시킨 일이나 하라니까! 채찍 맛 좀 보고 싶어?
경비 대장은 산발이 된 여자의 머릴 움켜잡고 윽박질러댔다.
차원과 울프릭은 그 쓰러진 여자를 도와주러 가까이 가는데, 집시 복장이나 그녀가 있는 장소를 봐선 점술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점술사는 경비 대장의 얼굴에 침을 뱉어댔다.
얼굴에 묻은 걸쭉한 타액을 닦아낸 경비대장은 헛웃음을 한 번 짓곤 허리에 말려 있던 채찍을 허공에다 휘둘러댔다.
-안 그래도 오늘 기분 개 같았는데, 너 오늘 잘 만났다.
채찍 끝이 공기를 찢자 점술사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보다 못한 울프릭이 경비 대장을 말리려 나서는데 차원은 다시 그를 불러 세우곤 단단히 일렀다.
“여태처럼 싸우지 말고 회유해.”
-저런 놈들은 사람 말은 안 통해.
“누가 혓바닥만 놀리랬어?”
다크 혼에서 회유란, 반짝이는 동전과 함께하는 게 기본이었다.
결국 울프릭은 스크롤 상점에서 거슬러 받은 은화를 탈탈 털어 경비 대장에게 건네줬다.
-그냥 지나가시오. 저 여자와 나눌 이야기가 있소.
-남자라고 꼴에 여자 앞에서 영웅 행세 좀 하려는 모양인가 본데.
하지만 울프릭의 손바닥 위에 가지런히 겹쳐진 은화는 꽤나 두둑했는데, 아마 그의 봉급의 반 정도는 돼 보였다.
결국 경비대장은 한 번 헛기침을 하곤 재빨리 은화들을 챙겨 자신들의 부할 데리고 자릴 떠났다.
분명 울프릭이 도왔지만, 점술사의 눈은 계속해서 표독이 묻어나왔다.
-말 좀 묻겠습니다. 방금 말하던 죽였어야 할 여자가 누굽니까?
여동생에 관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한 질문.
그에 점술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 여자에 대해서 왜 묻는 거야?
-네?
-너도 그년과 한패지? 그놈들이 보낸 거야. 그놈들이 날 죽이라고 보낸 거지!
점술사는 계속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을 지껄였고 울프릭의 인내심에도 점점 한계가 왔으나 참아야 했다.
당장 점술사가 말하는 ‘그 여자’가 동생 리지일 수도 있었고, 작은 단서라도 절박한 울프릭의 말투는 아직까지 친절함을 유지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아까 언급한 여자는 누구죠?
그러나 여자의 반응은 똑같았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말을 중얼거리기만 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내가 말해볼게.”
-요정, 네가?
차원의 지식으로 점술사란 족속들은 영체에 민감한 나머지 대개 이런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몇백 번을 점술사 NPC와 교류해본 차원은 이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법 정돈 다 꿰차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제가 보이십니까?”
-뭐? 넌 뭐야?
“전 요정입니다.”
-요정?
엘프의 곁을 수호하는 최강의 영적 존재.
요정이라는 말에 점술사의 눈에 일었던 공포가 조금 걷히더니, 흥미가 그 자릴 대신했다.
완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아니지만, 대화는 가능할 정도.
“저흰 당신이 말한 그 여자와 한 패거리가 아닙니다.“
-그럼?
“오히려 그녀가 하고 다닌 짓거릴 수습하려는 거죠.”
짓거리라는 단어 선택에 울프릭이 발끈했지만, 확실히 점술사는 처음과 달리 경계를 풀고 조금이나마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신이 진짜 요정이란 걸 어떻게 믿지? 이렇게 생긴 요정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이 세계엔 인간이 아직 모르는 다양한 요정이 존재합니다.”
허나 점술사는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고, 결국 차원은 제우스를 이용해 돌풍을 일으켰다.
“집을 아예 날려버리면 믿으실 겁니까?”
아주 여유롭게, 돌풍을 일으켜내다니.
마법인가, 스크롤을 사용한 건가.
정작 자신을 요정이라 소개한 자는 입으로 호 불었을 뿐인데, 엄청난 돌풍이 불었다.
그가 실제로 힘을 사용한다면 그 위력은 얼마나 될 것인가.
점술사의 생각에 눈앞의 차원의 존재가 와닿는 순간이었다.
“아……. 죽음과 삶의 경계의 존재시군요.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요정님.”
결국 끔뻑 넘어간 점술사는 차원과 울프릭을 점술집 안으로 데려가 차를 대접했다.
물론 차라고 해봤자 쓰디쓴 약초를 우린 물이었고, 울프릭은 그 기이한 빛깔을 띠고 있는 액체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요정, 이거 마셔도 되는 거 맞나?
“점술사의 차는 맛이 최악으로 유명하지만, 반대로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는 기가 막힌 걸로 유명하지.”
예전 다크 혼에서 읽었던 설명문을 그대로 읊자 울프릭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차를 들이켰다.
혀끝만 살짝 닿았는데도 올라오는 쓴맛에 얼굴이 자연적으로 찌푸려지는데, 그 모습을 보던 차원은 슬쩍 웃음을 보였다.
“그것보다 아까 당신이 말하던 여자는 대체 누굽니까?”
-이 마을과 일렉시아 성에 파멸을 몰고 올 마녀죠.
“마녀?”
-전 그 마녀가 이곳에 몰고 올 재앙을 예언했는데, 아무도 제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 미친 여자 취급하기 바빴습니다.
“예언이라면?”
점술사는 조금 한숨을 쉬더니 그간의 일을 설명해줬다.
-얼마 전에 마을에 머리를 땋은 금발 여자가 들어선 일이 있었습니다.
이 위험한 땅에서 아녀자가 홀로 다닌 것은 아니고, 사제 복장을 한 수상한 남자들과 용병으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곱게 자란 귀족이 급히 어디론가 향하는 건가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어요. 흑마법이죠.
-흑마법?
울프릭은 여동생이 남겼을 거라 예상하는 저주인형을 떠올리곤 목소릴 높였다.
-진짜 흑마법이었나?
점술사는 고갤 끄덕였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모양의 주술인형에서 흑마법의 기운을 감지했으며 실제로 새벽에 몰래 그들의 뒤를 쫓았다고 한다.
-똑똑히 봤어요. 트롤 서식지에서 풍겨오는 그 검고 사악한 기운. 분명 사특한 주술을 벌이고 있던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울프릭은 점술집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
해가 지니 스산해진 공기는 절로 차갑게 식었다.
마치 어둠이 만들어낸 손길 같은 냉기가 울프릭의 가죽옷 매무새 사이로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떨림 한 번 없이 그윽한 눈길로 산 끄트머리에 걸린 달 덩어릴 보며 생각했다.
‘대체 리지가 왜?’
대사제에게 관심을 듬뿍 받을 정도로 신에 대한 믿음이 독실하던 소녀인 리지.
대사제는 바쁜 일정에도 리지를 보기 위해서 고향을 자주 들렸을 정도로 리지를 예뻐했다.
그런데 리지가 갑자기 흑마법의 세계에 빠져 이런 일들을 벌이고 다니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걸리는 게 있잖아.’
과거 억울한 누명 때문에 가문이 몰락하고 한순간에 천시를 받게 되자 동생이 했던 말이 울프릭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가문을 되살리고 말 거야.’
그 짓이 바로 이것인가?
지나가는 길 족족마다 흑마법을 흩뿌리며 남들에게 고통을 주는 거?
어쩌면 리지가 말한 무슨 짓에 흑마법이 포함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게다가 실종되기 전 리지는 우리 가문에게 뒤집어 씌워진 누명을 풀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한데 그 증거를 모으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조직된 군대가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했었다.
당연히 울프릭은 사병을 운영할 자금은 없다고 거절했으나, 며칠 뒤 리지는 그 거액을 마련할 방법을 찾았다 전해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기껏해야 허드렛일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울프릭 자체도 모험가로 활동하는 것 정도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사병은커녕 내일 저녁거리나 살 돈밖에 구할 순 없는 게 현실이었다.
울프릭은 눈을 감았다.
시리게 불어오는 밤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꾸 자신도 모르게 리지가 잘못된 길로 빠진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저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상황이 해결됐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요정.
기척을 느낄 순 없지만, 그가 자신의 뒤에 있을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봐온 요정이라면 그럴 테니까.
“트롤 서식지라는 숲에 가볼 생각이야?”
-가야지. 리지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럴 줄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봐.”
그에 차원은 잠깐 자릴 뜨고 괜찮은 물건 하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포탈을 열고 그 안에 손전등을 넣음과 동시에 전에 얻은 스킬을 하나 발동시켰다.
[{VR} 강화 Lv1 발동합니다]
울프릭은 허공에서 떨어진 물건을 낚아챘다.
-생긴 건 다르지만, 그때 준 마법봉이랑 사용하는 건 비슷해 보이는데?
특유의 눈치로 스스로 사용법을 익힌 울프릭이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검은 하늘을 반으로 가를 기세로 강한 빛줄기가 뿜어져 올라갔다.
-허. 이런 마법봉이 있었나.
차원이 건넨 건 다름 아닌 손전등.
허나 강화 스킬로 인해 가진 능력이 강화되어 보통 손전등의 밝기보다 몇 배는 강화된 놈이었다.
-요정, 네가 사는 세계엔 정말 별게 다 있군,
“이것만 있으면 밤길도 문제없겠지?”
살짝 고개만 끄덕인 울프릭은 어두컴컴한 숲길에 몸을 담그고 앞으로 나아갔다.
기름이 떨어질까 신경 쓰지도 않아도 되는 이 신비한 마법봉 덕분에 울프릭은 거침없이 밤길을 걸을 수 있었고, 얼마 안 가 점술사가 말했던 저주 인형이 걸려있는 게 보였다.
“…….”
울프릭은 슬쩍 손전등을 든 손목을 돌리며 주변을 확인했는데, 형체만 보면 마치 빼빼 마른 사람의 손처럼 보이는 나뭇가지마다 인형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게다가 이 냄새는….’
힘을 대부분 잃은 세피리티 숲의 저주 인형과 다르게 이곳의 저주 인형들에게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이내 찡그리던 울프릭의 콧잔등이 점차 악취에 익숙해지자 이내 그 주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시체 썩은 내도, 동물의 대변도 아니야. 그렇다고 트롤의 체취도 아닌데.’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비정상적이고 역겨운 냄새.
그걸 참아내던 둘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니 이번엔 코를 턱 하니 찔러오는 피비린내가 대량으로 맡아졌다.
울프릭은 냄새가 나는 곳에 손전등을 비췄고, 큰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그곳에 인간의 시체가 잔혹한 형태로 쌓아져 있었다.
시체 더미를 발견한 울프릭은 설마 하는 생각에 시체들 하나하나 얼굴을 비추며 일일이 확인에 나섰다.
‘울프릭에겐 지금 이 상황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지.’
게임을 할 때는 몰랐지만, 막상 게임 속에 들어와 그와 함께 동생을 찾고 지금 울프릭의 행동을 보니 그가 동생에 대해 애착이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여동생의 얼굴을 찾을 수 없는지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짓는 울프릭.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감정들이 거기에 뒤섞였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리지가 이 구덩이 속에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이런 잔혹한 일을 벌이는 놈들과 한패라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내 동생이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가? 이제 리지가 누군지 더는 모르겠어.
“주저앉지 마라. 동생이 아직 살아있다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차원의 말을 들은 울프릭, 멀뚱히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왜?”
-아니.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여태껏 있었나 생각해봤어. …고맙다, 요정.
그때 뜨는 알림창 하나.
[울프릭의 호감도 200을 달성했습니다. <히든 스킬 :{R}보름달>이 개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