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울프릭은 나무에 걸린 기이한 표식을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임프들이 자신의 영역에 해놓는 일정한 표식으로, 저걸 따라가면 분명 임프 영역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 터.
“울프릭, 앞에.”
-나도 알아!
중간중간 뛰쳐나온 임프들이 몇 있었지만, 차원의 경고에 울프릭은 재빨리 스턴건을 꺼내 들어 그들을 퇴장시켰다.
그 물보라 이후에도 제대로 작동하니, 차원은 내심 스턴건의 방수 기능에 놀랐다.
강철 체력을 자랑하는 울프릭은 불규칙한 숲 바닥을 뛰어다니는데도 거칠어지는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고, 마침내 숲 끝자락에 있는 임프들의 본거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저기! 대장 놈이다!
울프릭이 가리키는 곳은 거대한 나무.
성인 남자가 몇십 명이 끌어안아야 할 정도고 굵직한 나무 위에는 목재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요새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임프 대장이 바로 그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내 머리만 빼꼼 내민 대장 녀석이 손을 들어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요새에선 임프 궁수들이 튀어나왔고.
-젠장.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숲을 메움과 동시에 하늘에선 화살 비가 쏟아져 내리니 울프릭은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몇몇 화살이 바람을 타고 울프릭을 향해 날아들었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그 순간.
-괜찮으십니까?
울프릭의 앞에 반투명한 마력의 벽이 생겨나며 눈먼 화살들을 막아냈다.
그에 뒤를 돌아보자 뒤늦게 울프릭을 쫓아온 왕국 마법사가 보였다.
-타이밍 좋네요.
-단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런 잔챙이는 저희가 처리할 테니 대장을 잡는 데만 집중해 주십쇼.
그 말에 울프릭은 재빨리 요새 나무로 다가갔는데, 묵직한 뜀박질 소리와 함께 수풀을 헤치며 오우거 두 마리가 모습을 보였다.
그 두툼한 어깨 뒤편엔 각각 임프 마법사로 보이는 임프를 태우고 있었고, 목에는 기이한 기운이 맴도는 목줄이 걸려 있었다.
“누가 봐도 저게 약점이지? 목걸이를 노려.”
-말은 쉽지!
오우거 가죽은 상상 이상으로 두터운 터라 스턴건은 통하지 않았고, 두 마리가 동시에 협공을 해대니 쉬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결국 회피 일색인 고착 상황이 되자 상황을 지켜보던 차원은 제우스 스킬을 발동하여 바람을 일으켜 주술사를 떨어뜨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울프릭의 눈가가 매섭게 빛났다.
명령자를 잃은 오우거가 우왕좌왕하니 재빨리 그 위로 뛰어오른 울프릭은 목줄을 잘라냈다.
-그워어어어!
목줄이 잘리자 주술에 풀려난 오우거들은 지금껏 조종당한 것에 대한 복수인지 괴성을 지르며 반대로 임프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진동과 굉음이 끊이지 않는 세피리티 숲.
뭔가 상황이 잘못 돌아가는 걸 느낀 임프 대장은 그 틈을 타 도망가려는 움직임이었는데, 울프릭의 눈썰미에 그대로 걸려들었다.
“활!”
-뭐, 네?
“활 달라고!”
근처에 있던 활잡이의 활을 빼앗아 든 울프릭은 조금 앞에 꽂혀있던 화살 하나를 뽑아 들었고 순식간에 활시위를 당기며 도망치는 임프 대장을 겨눴다.
활의 명수라 해도 맞추기 어려울 것 같은 먼 거리.
게다가 날뛰는 오우거가 일으키는 풍압 같은 갖가지 요소들이 있었지만, 활시위를 당기는 울프릭의 동작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때가 됐음을 느낀 울프릭은 시위와 깃을 집고 있던 손가락을 놓았고, 화살은 구부렁 휘어지며 헤엄치는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공기를 갈랐다.
날카로운 파공음 후에 이어지는 묵직하게 박히는 금속음.
도망치던 임프 대장의 왼쪽 가슴에 정확히 화살이 박혀 들었고, 그에 균형을 잃은 녀석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놈들이 후퇴합니다!
대장만 있다면 빠르게 밀집하지만, 반대로 대장이 없다면 흩어지는 것도 빠른 임프들이 대장이 저격당하자 사방으로 도망쳐댔다.
“힘만 센 줄 알았더니.”
그 멀리 떨어진 목표물을 정확히 맞힐 줄이야.
내심 울프릭이 가지고 있던 능력에 차원이 놀라고 있자 상처를 치료한 왕국 기사단장이 직접 울프릭을 찾아왔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사단장이 허릴 숙여 인사하자 그 뒤로 그의 부하들 또한 일제히 허릴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마땅히 할 일을 한 겁니다. 가자.
울프릭이 차원을 데리고 숲을 나가려는데, 기사단장이 그들을 붙잡았다.
-이런 영웅들을 그냥 보낼 순 없죠. 가시죠. 성으로 모시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갈 길이 멀어서.
단장의 호의를 거절하고 가려는데 차원은 울프릭을 한 번 보더니 기사단장을 따라갔다.
“따라와. 동생을 찾을 단서를 얻을 수도 있잖아.”
울프릭을 움직이게 하는 데에 이것만큼 편한 단어가 없다.
결국 동생이 언급당하자 울프릭은 기사단장의 뒤를 따랐다.
***
세디우스 왕은 직접 나와 울프릭과 차원을 맞이했다.
-편하게 들라, 영웅들이여.
식탁엔 만찬이 차려져 있었고 세디우스 황제는 흡족한 듯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차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까지 따라온 울프릭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임프의 결계는 왕실 마법사들도 해결하지 못한 난제였도다. 게다가 단장에게 들었던 무용들까지. 그대들은 실로 이 나라의 영웅이었다.
거기다 숲에 알박기를 하던 임프들 때문에 프라하 성은 자금난에 쪼들리고 있었으니, 모든 일을 해결해준 울프릭과 차원이 굴러들어온 복덩이 같은 것이다.
-두 사람 덕분에 왕국의 큰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됐으니, 응당 보상을 내려야 위에 선 자의 도리겠지.
이게 바로 차원이 성까지 따라오려던 이유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거라.
그리고 그 말에 음식을 먹던 울프릭의 손길이 멈췄다.
-세디우스 폐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한다.
-제가 얻고 싶은 건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엇이냐?
-저는 지금 사라진 여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허나 세피리티 숲에서 그 행방이 끊겼는데, 혹시 왕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왕국을 도운 영웅의 청이니 기쁜 마음으로 돕겠노라.
다음으론 머리만 떠다니는 차원의 차례가 다가왔다.
-그대는 요정이라 들었다. 맞는가?
“그렇습니다.”
차원을 관찰하던 세디우스가 잠시 갸우뚱했다.
세디우스 역시 요정이 인간에게 달라붙는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더더욱 솜뭉치처럼 생긴 요정은 그가 길고 긴 여행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요정이라 하면 인간의 모습과 흡사하나 인간보다 훨씬 작은 키에 형형색색의 빛을 발산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아무리 봐도 이차원은 평범한 요정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왕국을 도운 영웅인 건 변함없으니, 뭔가 보상을 내려야 하긴 했다.
-그대는 무얼 원하는가?
“최근 이 세계 마법에 흥미가 있는데, 참고할 교본을 구하고 싶습니다. 또, 말씀하셨던 금괴는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말에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세디우스, 곧장 마법사 단장을 부른다.
그리곤, 금괴 5G를 내려놓곤 말했다.
-금괴는 가져가고. 교본은, 우리 왕국 최고의 마법사 단장인 이 친구한테 부탁하게.
눈앞의 번쩍이는 금에, 차원은 순간 고민했다.
밖으로 가져나가서 현금화를 시켜? 이곳에서 속성 변환 스크롤과 아이템들을 구입해?
그 고민은 잠시 미뤄두었다, 어쨌거나 자신에겐 좋은 일이었으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만찬이 끝난 후 마법사 단장은 울프릭과 이차원을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리고 그가 데려간 곳은 바로 왕국 마법사들을 위해 지어진 도서관으로 온갖 교본들과 선배들이 일전에 써 내려간 노하우들이 빼곡히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배울 수 있는 스킬이라고 생각한 이차원은 군침이 돌았다.
-원하는 교본이 있으면 하나만 고르시면 됩니다.
“하나?”
-네. 단 하나뿐입니다.
더 뜯어낼 방법이 있을까.
당장은 없다. 차원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차원은 속으로 말을 숨기며 도서관에 있는 마법 관련 교본들을 뒤지는데, 뭔가 눈에 띄는 표지를 가진 것이 눈에 보였다.
“울프릭, 저거로 해.”
-저거?
[대재앙의 활용법]
마법 계열 교본들 중에서 최상위 위력을 지닌 대규모 살상 마법.
한 번 쓰면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에서 불기둥이 떨어져 내리는데, 최종 마법답게 그래픽도 화려하게 넣어 차원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마법 1순위다.
게다가 저 능력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것을 상상하니,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대체 이 능력의 한계는 어디야.’
더군다나 앞으로도 얻을 수 있는 스킬과 아이템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때.
울프릭에게서 대재앙의 교본을 건네받은 차원은 기대감에 잔뜩 차서 교본을 펼쳤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뭔가 잘못된 건가 연속해서 교본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지만, 역시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해당 교본을 익히기엔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현재 레벨 4 / 필요 레벨 10 ]
레벨 제한이라니.
그에 차원은 대재앙 교본을 뱉어내고 다른 교본을 찾아냈다.
[천둥과 번개에 대한 고찰]
[해당 교본을 익히기엔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현재 레벨 4 / 필요 레벨 10 ]
[수룡의 둥지를 불러내는 법]
[해당 교본을 익히기엔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현재 레벨 4 / 필요 레벨 10 ]
[중력을 이용한 101가지 마법]
[해당 교본을 익히기엔 레벨이 너무 낮습니다. 현재 레벨 4 / 필요 레벨 10 ]
점점 수준을 낮추며 교본들을 펼쳐봤지만, 몇십 권의 교본들 모두 레벨 부족으로 인해 원래 자리에 꽂아 넣었다.
‘내가 헌터로서 레벨을 높여야 이곳에서 얻을 것도 더 많다는 건데.’
기대감을 깨트린 충격이야 컸지만,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게 차원의 성격이었다.
“울프릭 미안한데, 저걸로.”
-그래……. 그런데, 이거 이렇게 계속 해야되는거야?
구시렁거리면서도 여러 번 책을 교체해주지만, 어찌 된 게 전부 다 레벨이 부족하다고만 떴다.
“혹시 입문서 교본 없습니까?”
울프릭도 눈치로 상황을 확인하며 마법사 단장에게 물었고, 그에 차원은 자신만 들리는 자존심이 상하는 소리와 함께 입문서가 꽂힌 구역으로 갔다.
[{R} 라이트 LV1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발산하는 구체를 소환합니다.]
[{R} 디텐션 LV1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 상대방과 자기의 위치를 바꿀 수 있습니다.]
[{R} 전류 LV1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 자기 몸에서 전류를 흘려보내 주변 몬스터를 기절시킬 수 있습니다]
입문서는 밖에서도 흔히 구할 수 있었기에 여러 권을 고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득인 상황이다.
밖의 세상에 있는 헌터들은 이 스킬을 얻기 위해 실제 목숨을 내걸어야 했으니까.
디텐션과 전류는 대상이 자신보다 레벨이 높아야 된다는 제한이 있긴 하지만.
‘말도 안 된다.’
그래도 D급 게이트에 가기 전에 히든카드를 여러 개 모아두는 게 도움이 될지언정 절대 방해는 아닐 것이다.
교본을 습득한 두 사람은 세디우스의 배려로 왕실에서 하룻밤 묶게 됐다.
밀짚으로 대충 만든 여관 침대가 아니라 부드러운 양털로 만든 고급스러운 침대.
허나 울프릭은 비단으로 만든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은빛만 바라보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제발 왕국에서 자그마한 단서라도 하나 찾아줬으면 하는 바람뿐.
울프릭을 보는 이차원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슬며시 위로의 말을 던졌다.
“아직 희망은 있어. 포기하지 마.”
-고맙다, 요정. 매번 도움만 받네.
“도움은 무슨.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래. 찾을 수 있겠지.
그에 두 눈을 감은 울프릭의 모습에 차원은 속으로 착잡한 마음이었다.
원래 게임 시나리오대로라면 울프릭이 세피리티 숲에서 동생이 떨어뜨린 지도를 발견해야 하는데 아무리 난잡한 상황이긴 했어도 차원이 둘러본 바로는 지도 같아 보이는 건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으니, 일단 왕국을 믿어봐야지.’
대충 이쪽 일도 끝났으니, 내일 있을 게이트 공략을 준비해야 했다.
“라이트. 디텐션. 전류.”
당장 자신이 얻게 된 새로운 스킬로 어떤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