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근처에 말을 세우고 갈대숲으로 들어선 울프릭은 스턴건을 쥐고 겁도 없이 갈대들을 헤치며 비명이 들린 곳을 향해 다가갔다.
차원의 말대로 그곳엔 난쟁이 여성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피 냄새에 잔뜩 흥분한 늑대는 침을 질질 흘리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짧게 숨을 들이켜고 앞으로 나선 울프릭.
동시에 스턴건을 내지르며 스파크를 일으켰는데, 정확히 목가에 스턴건의 전류가 늑대의 털가죽을 뚫고 흘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란 늑대가 흠칫 뒤로 물러나는데, 울프릭은 오히려 앞으로 더 다가가며 다시 스턴건을 휘두르며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확실히 일반 무기랑 다르다!’
큼직한 늑대도 고통에 겁을 지레 먹을 정도로 강렬한 충격에 다시 한 번 차원이 준 마법봉에 감탄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차원 역시 울프릭의 몸짓을 지켜보며 그의 몸짓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그가 직접 키보드와 마우스로 조종하던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통해 스스로 움직이는 울프릭.
원래 그의 몸만 본다 해도 스턴건이 없더라도 늑대 두 마리 정도는 맨손으로 충분히 때려잡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역시, 괜히 체력 네 자리가 아닌 건가.’
저번 편의점 음식을 먹을 때도 느꼈지만 울프릭은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 그에 못지않은 엄청난 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내 몇 번인가 스파크를 튀겨대며 위협하는 울프릭에 나머지 늑대들은 슬금슬금 도망쳤고, 차원의 도움 없이 혼자서 늑대들을 물리친 그는 쓰러진 상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감사합니다, 여행자님.
난쟁이족답게 자그마한 몸집과 그 몇 배는 될 정도로 커다란 배낭.
허나 울프릭은 쓰러진 난쟁이 상인을 번쩍 들어 올리곤 이리저리 몸 상태를 확인했다.
“크게 다치신 곳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친절하신 분이시군요. 제가 뭐라도 보답해야 하는데. 아, 잠시만요.
이내 그녀는 큼직한 배낭 안에 상체를 집어넣고선 짧은 다리만 버둥거렸다.
-괜찮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도와드린 게 아니니 넣어두세요.
“준다는데, 뭘 거절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여상인이 뭘 줄지 알고 있는 차원은 울프릭을 말렸고, 이후 그녀가 꺼낸 건 낡은 책 한 권이었다.
‘역시, 이걸 슈퍼노바로 주는구나.’
초신성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마법 교본.
허나 실상은 숙련 마법사들이나 사용할 법한 마법이었다.
도대체 떠돌이 잡화상인으로 살아가는 난쟁이가 저런 교본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원에게 중요한 건 저걸 자기가 사용할 수 있냐는 것.
-지금 드릴 만한 게 이것밖에 없어서. 혹 나중에 다른 곳에서 본다면 꼭 아는 체해주세요.
여상인은 피를 질질 흘려댔지만, 난쟁이족 특유의 튼튼함을 보여주며 다시 배낭을 메고 짧은 다리로 자리를 떠났다.
다시 울프릭과 차원만이 남은 갈대숲.
그에 울프릭은 자신이 받았던 마법 교본을 차원의 머리 근처로 가져다 댔다.
-요정, 네가 가지는 게 좋겠지.
어차피 마법에 관해선 손톱만 한 불꽃도 못 일으키는 재능을 가진 울프릭에겐 필요도 없는 물건이었고. 교본은 차원의 방 키보드 앞에 툭, 떨어졌다.
낡은 책 표지의 질감을 느끼던 차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후우.”
심호흡으로 떨림을 어떻게든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다.
혹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싶지만, 이대로 멈춰 설 순 없는 법이니 교본의 표지를 넘기고 맨 첫 장을 펼쳤다.
책장에선 푸른빛이 샘솟음과 동시에 차원의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동시에 안내창이 떠올랐다.
[{R}슈퍼노바 Lv1를 습득하였습니다]
스킬을 배웠다는 알림이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다른 스킬과는 다르게 설명법이 적혀져 있지 않고 효과 또한 나와 있지 않았다.
‘R? 레어의 약자인가?’
하지만 단순히 Rare의 약자라고 하기엔 지금껏 배웠던 스킬들 앞에 있던 ‘VR’이라는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VR이란 글자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Virtual Reality의 약자라는 걸 안다.
그리고 이 R이란 글자도 Rare가 아니라 Reality의 약자라면?
그런데 그때.
콰아아앙!
“으.”
-왜 그래, 요정.
그 순간 베란다 너머로 펑! 소리와 함께 근처 아파트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차원은 울프릭에게 조금 있다 돌아오겠단 말을 남기며 베란다 밖으로 나갔다.
굉음이 들려온 곳의 중심부에서 멀어지려는 사람들과 반대로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헌터들.
게다가 카메라를 들고 뛰는 몇몇 사람들도 있는 걸 보니 스트리머도 있는 모양.
‘게이트가 터졌구나.’
마음 같아선 당장 전투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스킬이 현실에서 발동되는지 확실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은 몸을 사리며 조심해야 했다.
게이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전투 소리가 한데 뒤섞이며 커져갔다.
게다가 간간이 총기 소리들까지 들리는 걸 보면 군대까지 동원한 모양.
현대식 무기가 괴물들에게 살상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괴물을 잡기 위해 특수 제작된 탄환이나 폭발물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규모가 작으면 그냥 헌터끼리 해결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대체 얼마나 큰 구멍이 뚫린 거야?’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 얻은 스킬이나 확인해 볼까 하는 마음이었던 터라 위험할 수도 있겠단 기미가 보이자 차원은 그대로 몸을 돌리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와 부딪혔는데, 그의 목 언저리에는 군부대 측에서 나온 인물임을 증명하는 카드키가 걸려 있었다.
‘김인성. 스카우터구나.’
카드키에 적힌 정보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은 차원.
정식 군인은 아니고 군무원인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차원은 먼저 살짝 고갤 숙이고 가려는데, 김인성은 자신의 어깨에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툭툭 털어대며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요즘 개나 소나 헌터라고 나대네.”
그의 눈엔 선글라스 비슷한 것이 걸려 있었는데, 헌터가 가진 능력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장비를 차고 있었다.
“지금 긴급 게이트 난이도 모릅니까? 당신 능력으론 개죽음당하기 십상이니 꺼지세요.”
차원의 능력치를 보고 잔뜩 비웃으며 가던 길 가려는데 그도 욕을 먹고도 가만히 넘어갈 성격은 아니었다.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뭐? 나한테 한 말이야? 개죽음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야. 응? 능력은 없는데 근자감만 넘치는.”
차원의 말에 걸음을 멈춘 김인성이 코웃음 치며 게이트로 들어가는데 그 순간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E등급으로 알려진 거미형 몬스터.
타란튤라의 하위 호환이라 불리는 놈이라 개체 하나하나가 가진 위험도는 낮지만, 쏟아져 나오는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사수들, 전방으로 조정간 연발! 계속 화망 유지해!”
방탄모 가운데에 중사 마크를 달고 있는 남자의 외침에 일렬종대로 늘어선 총열에선 더욱 뜨거운 불길과 많은 탄환들이 쏟아졌다.
탄두에 화약을 집어넣은 폭발탄들에 의해 거미들의 진격이 조금 늦춰지나 싶더니, 저 거무튀튀한 거미의 파도가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어가는 게 보였다.
검은 갑각이 아니라 붉은 갑각을 가진 거미들이 늘어난 것.
이내 붉은 거미들이 선두에 서자 군부대의 사격에도 물러섬 없이 진격했다.
‘폭발에 저항력을 가진 붉은 거미라면… 화염 속성!’
게이트 근처에 있던 차원은 급하게 몸을 피했다.
특수하게 화염을 속성으로 달고 있는 거미 몬스터의 등장은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으니까.
“화염 속성 몬스터예요! 모두 조심하세요!”
최강힐러라는 닉네임으로 더 친숙한 헌터인 은지의 외침이 뒤집힌 아스팔트 도로 위로 쩌렁쩌렁 울렸다.
붉은 거미의 꽁무니에서 발사된 거미줄은 건물, 가로등, 헌터 가리는 것 없이 퍼져 나갔고, 조금 있다 새하얀 거미줄에선 선홍색 불꽃이 피어오르며 주변을 불바다로 만들어대기 시작했다.
“화염 저항 능력 가진 헌터들이 앞으로 나서!”
“물! 물 능력 가진 놈 어디 없어?! 빨리 불부터 꺼!”
“화재보다 저놈들 나오는 걸 막아야지!”
고작 E급이라곤 하지만 대량의 거미들이 화재를 일으키자 게이트 주변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후끈한 열기가 가득 차올랐다.
군부대도 순식간에 통제를 잃고 우왕좌왕 물러나기 바쁘고, 평범한 시민들도 도망가느라 순식간에 일어난 아수라장.
사람에 깔리고, 치이고, 밀리고.
이대로 놔두면 대참사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지나가던 버스가 급정차해 신호등과 들이받고 도로에서는 연쇄 추돌이 일어나고 이 지옥과 같은 모습을 하늘에 떠있는 헬기가 실시간으로 송출 중이다.
-화염 속성을 가진 E등급 거미의 출연으로 도심지가 불바다가 된 모습입니다. 주민들이 급하게 대피를 하고 있지만….
현장에 있는 차원도 주민들 틈에 섞여 빠르게 현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슈퍼노바 스킬을 확인하기도 전에 통구이가 되거나 벌레 밥이 되거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는 건 매한가지.
그런데 사람에 치이고 밀리다 보니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뒤로 밀려만 갔다.
“제발, 좀 비켜라!”
마지막 힘까지 끌어올리며 인파를 헤집고 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부웅 날아오더니 몇 미터나 미끄러졌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빤히 바라보니, 고등학생이라고 봐도 무방한 앳된 모습의 청년이었다.
‘최번개?’
수많은 구독자를 보유한 꽃미남 헌터.
능력은 일정 지역에 낙뢰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위력이 크지 않고 범위도 아직은 좁아서 헌터로서 가지는 능력은 그리 강하진 않지만, 저 연예인 뺨치는 잘생긴 외모로 인해 여자 팬들이 상당했다.
아니, 그것보다 상황 파악이 우선.
쓰러졌던 최번개가 간신히 일어났는데,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렸다.
이후 자신에게 돌진하는 화염 거미를 막아내려고 남은 힘을 끌어모아 번개를 떨어뜨려 댔으나, 역시 역부족으로 보였다.
‘저거 죽겠는데.’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최번개의 상태는 처참했다.
하지만 지금 순간만 해도 내 목숨 하나 간수하기 힘든 게 차원의 상태였다.
결국 그를 외면하고 가려는데 순간 차원과 최번개, 서로 눈이 마주쳤다.
뭔가 간절한 표정으로 차원을 바라보는 최번개의 눈빛에 강하게 흔들렸다.
‘제기랄.’
절뚝이는 최번개를 향해 달려나갔다.
현재 그가 믿는 구석은 단 하나.
[{R}슈퍼노바 Lv1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바로 시야 한쪽에서 껌뻑거리는 안내창이었다.
그런데, 차원의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본능은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
목숨을 건 도박.
그 간절함을 담아 안내창에 떠오른 ‘슈퍼노바’란 글자를 속으로 되뇐 차원.
순간 그의 몸에서 충만하던 기운이 무언가에 뽑혀 나가는 감각이 느껴지더니, 이내 으슬으슬한 냉기가 느껴졌다.
‘된다.’
차원을 중심으로 강렬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근방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을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백색 얼음으로 변한 풍경에 차원은 물론이고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라 입만 벌리고 있었다.
스스로 벌인 일에 놀라워하던 차원은 꾹 쥐고 있던 주먹을 살며시 폈는데, 동시에 얼어붙었던 거미 몬스터들에 균열이 일며 모두 자잘한 얼음 가루가 되어 불어오는 바람에 허무하게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