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차원은 기억을 되짚어보니 지금처럼 신났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학교에선 엄마 없다며 손가락질받고 차별당한 적도 있었고, 막연하던 꿈은 가로막혀 현실과 타협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선택을 받아 헌터가 됐다 하니 가만히 있어도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비록 게임과 연결됐다는,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이지만 그나마 전문분야라 할 수 있는 게임과 연결된 이상 어떻게든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 능력으로 성장할 구체적인 방법은 없으려나?’
단순히 게임과 연결되고 아이템만 얻는 게 아니라 헌터로서 가져야 할 능력들을 키워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가전제품 판매 업체를 스윽 보던 그는 뭔가에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망겜을 한다고 컴퓨터 사양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거기다 지금 자신의 능력은 게임과 관련된 것이니, 이것도 모두 능력을 위한 투자라고 할 수도 있었다.
300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본체는 물론이고 모니터까지 세 대를 주문한 차원.
물론 금은방에서 들고 나온 현금으로 결제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그렇게 포장된 박스들을 챙겨가려던 찰나, 오른쪽 손바닥에서 뭔가에 찢어진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두 눈을 찡그리던 차원은 손바닥을 돌려보는데, 손금을 따라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다.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을 리는 없으니, 분명 ‘빨간 실’로 연결된 울프릭에게 무슨 일이 터진 것이다.
다급해진 차원은 서둘러 집에 돌아와 새로 산 장비들을 세팅할 틈도 없이 낡아빠진 컴퓨터 전원을 눌러 다시 게임을 가동시켰다.
확인해보니 세레칸의 마을에 도착하기 무섭게 노예들과 울프릭을 추적한 도적단 후발대가 마을을 습격해 칼부림이 난 상황.
-아아악!
도적이 휘두르는 날붙이 궤도를 따라 시뻘건 핏줄기가 노예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전투라곤 해본 적 없는 노예들은 무기까지 들고 있는 도적들에게 속수무책이었지만, 그나마 울프릭은 술집 안에 떨어진 농기구 따위로 도적들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무장과 숫자의 차이로 점점 힘에 부치는 게 보이자, 차원은 급하게 자기 방 내부를 돌아봤다.
‘지원으로 게임 속 아이템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반대도.’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 게임 속 타파이트 목걸이가 현실 세상으로 나왔고, 차원이 직접 ‘지원.Lv1’ 이라는 스킬을 이용해 바람도 불어넣은 적이 있었으니까.
‘도와줄 수 있을 거야.’
그때 자신의 서랍 속에서 쓸 만한 걸 찾을 수 있었다.
재빨리 단축키를 눌러 지원 스킬을 발동시키자 모니터 위로 다시 안개로 된 게이트가 열렸고, 차원은 그 안에다 서랍에서 꺼낸 물건을 던졌다.
-요정?
허공에 또 차원의 얼굴이 나타나자 날아오는 검격을 도리깨로 흘리던 울프릭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차도 뒤집어버린 저 존재라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줄 터.
그에 허공에서 뭔가가 생겨나자 슬쩍 눈을 흘기며 그 요상한 물건을 쳐다봤다.
날붙이도 없고, 둔기로 사용하기엔 너무나 작은 이상한 물건이다.
-이게 뭐지? 이걸로 뭘 어쩌란 거야?
“내가 특별히 준비한 마법봉이야.”
울프릭은 믿기지 않지만, 일단 도적들을 밀쳐내고 급하게 차원이 보내온 물건을 집어 들었다.
금속도 아닌 기이한 재질과 끝부분엔 두 가닥의 금속 막대기.
흔히 보는 기다란 막대 끝에 보석이 달린 마법봉과는 궤를 달리하는 모양이었다.
-이게 마법봉이라고?
“그래. 가운데 동그랗게 튀어나온 거 보이지? 금속 부분을 놈들에게 갖다 대고 그걸 누르면 돼.”
-젠장, 나도 모르겠다!
어차피 변변찮은 무기도 없으니, 요정의 말을 믿고 도박수에 나선 울프릭.
도적놈이 휘두르는 단검을 미묘한 차이로 피해냈는데, 날을 잘 세운 덕에 스쳐 지나간 머리카락 끝부분이 사락 잘려나갔다.
회피와 동시에 들고 있던 마법봉을 휘두른 울프릭.
그리고 요정의 말대로 금속 부분을 접촉시키고 동그란 부분을 누르자.
-으그그극!
금속 부분에서 번쩍이는 스파크가 튀어 오르자 도적놈의 몸뚱이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고, 어느새 오줌까지 지리며 기절했다.
-진짜 마법봉이었구나!
물론 차원이 던진 물건은 마법봉이 아니라 단순한 스턴건.
허나 쓸만한 무기가 생긴 울프릭은 순식간에 홀로 도적들을 제압해 나갔다.
결국 도적들 몇을 더 처리하자 남은 도적들은 살기 위해 도망쳐댔다.
그런 그들을 빤히 바라보던 울프릭은 피식 웃으며 차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 마법봉 효능 장난 아닌데?
다른 마법봉처럼 원거리에 대응할 순 없지만, 사용법은 단순하고 강력한 효과를 가졌다.
- 직히 생김새만 보고 의심했는데, 이런 귀한 물건을 그냥 줘도 되는 거야?
이것만 있으면 열 살 된 어린아이라도 도적들을 처리할 수 있을 터.
그리고 울프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내창이 떠올랐다.
[울프릭의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오랫동안 다크 혼을 플레이해왔지만, 호감도가 올랐다는 안내창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울프릭의 상태.
울프릭은 도적들을 처리하며 레벨이 올랐는데, 덕분에 새로운 스킬이 활성화됐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지원 발동 후 E : 복사 Lv1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이제 당신은 전송하는 아이템을 복사하여 개수를 늘릴 수 있게 됩니다. 최대 배수 : 3]
‘빨간 실 덕분인 건가.’
울프릭과 연결되고 신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경험치도 공유되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에 새로운 사실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싸움이 난 술집 밖으로 주민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 대신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도망치던 도적단 놈들이 다시 돌아와 방화와 약탈을 시작할 것이다.
다크 혼에선 흔하게 일어나는 이벤트였고,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
그에 차원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나는 울프릭 하나 돌보기도 벅차. 게다가 어차피 데이터 쪼가리들인데, 내가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각성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게임 속 세상이다.
가상의 마을 하나 정돈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니, 그저 울프릭만 죽지 않게 돕다가 세계가 멸망하기 전까지 괜찮은 게임 아이템을 현실로 가져오기만 하면 그만인 거 아닌가?
그런데 상황을 파악한 울프릭은 고민에 빠진 이차원을 두고 곧장 주민들을 도우러 나갔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저 사람들 도우러.
“지금 네가 남 챙길 처지인가?”
-여기가 이놈들 습격을 받는 것도 우리가 여기로 왔기 때문이야. 나쁜 건 저놈들이긴 하지만, 원인 제공은 우리가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차원은 어떻게든 울프릭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결국 술집 밖으로 향했고 동시에 방금 전투로 얻은 경험치가 하락했다.
[EXP 5500이 소멸되었습니다.]
갑자기 경험치가 이유 없이 소멸될 리는 없다.
‘방금 나는 울프릭을 막으려고 했어. 하지만 원래 시나리오는 울프릭이 마을 사람들을 돕는 방향이지. 혹시 게임 시나리오를 따르지 않으면 얻은 경험치에 패널티가 생기는 건가?’
그리고 가설이 맞다면 이번 세레칸의 사태를 막으면 소멸됐던 경험치가 롤백 될 수도 있다는 말.
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선 이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잠깐만 기다려.”
이미 마을에 번진 불을 끌 방법이 없어 망연자실한 울프릭을 두고 사라졌다.
그리고 이차원이 향한 곳은 현관문 앞.
그곳엔 두 대의 소화기가 비치돼 있었다.
차원은 소화기들을 포탈 내부로 던졌고, E키를 눌러 방금 얻은 복사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두 대만 보냈던 소화기가 6대로 늘어 울프릭 앞에 나타났는데, 그는 어리둥절하며 소화기를 이리저리 만지다 실수로 자기 얼굴을 향해 분말 가루를 쏴댔다.
“엣, 퉤퉤. 이건 또 뭐야?”
“얼굴에 분칠은 그만두고, 일단 그걸로 불부터 꺼. 사용법 알려줄 거니까 잘 듣고.”
새하얘진 얼굴을 대충 털어낸 울프릭은 차원의 말에 경청했다.
“우선 내가 미리 안전핀은 다 뽑아뒀으니까 너는 바람을 등지고 호스를 불 쪽으로 향한 후, 손잡이만 움켜쥐면 돼.”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그저 말뿐인 설명이었는데도 울프릭은 순식간에 소화기 사용법을 익히곤 화재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 손 남는 사람은 나 좀 도와줘!
차원의 외침에 몇몇 주민들은 떨어져 있던 소화기를 들고 지시대로 울프릭과 똑같이 불을 껐다.
불길이 거세지기 전이라 6대의 소화기로 충분히 화재 진압에 성공했다.
[소멸되었던 EXP 5500이 복구되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소멸됐던 경험치가 복구됐다.
그러나 예상이 맞았더라도 마냥 기뻐할 순 없는 게, 단순히 아이템만 얻는 게 아니라 울프릭의 시나리오를 따라야만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이 능력이 한정적일 수도 있겠어.’
차원은 애초에 이 게임의 고인물 플레이어였다.
울프릭의 행보와 울프릭이 성취하는 것을 더 파워풀하게 이끌 방법과 자신이 있는 것인데.
시나리오를 따라야 된다면 능력이 한정적일 수 있었다.
‘일단 계속 다양한 시도를 해보자.’
***
-감사합니다!
비록 약탈당했지만, 마을 전체가 불타는 걸 막은 거로 만족하는 모양인지 촌장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와 동시에 울프릭과 차원을 대접하겠다며 자신의 집으로 안내하는데, 그의 집엔 꽤 많은 숫자의 몬스터 박제품들이 즐비했다.
게다가 박제된 몬스터 하나하나만 봐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들이라 왕년 촌장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지하실에 더 있습니다.
그에 촌장과 함께 지하실로 내려가자 거대한 뭔가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게 보였다.
촌장과 함께 지하실로 가는 게임 시나리오는 없던 터라, 차원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저건?”
-타란튤라의 부산물입니다.
타란튤라의 다리, 게임 속인데 어떻게 현실 몬스터의 것을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을 한다면, 간단하다.
현실 자체가 판타지였으니까.
대부분의 게임들이 현실 세계에 실존하는 몬스터와 헌터의 스킬을 차용하곤 했다.
-유용한 장비를 만들 수 있는 덕에, 요새 모험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놈입니다. 앞길에 쓰일 수도 있으니 필요하다면 가져가시길.
물론 주는 걸 마다할 생각은 없던 울프릭도 흔쾌히 받았다.
그리고,
“울…….”
-줄게.
차원은 울프릭의 이름만 불렀을 뿐이다.
“그래도 되나?”
-아까 마법봉 같은 무기 만들어주려고 달라는 거 아닌가? 요정들은 대개 그렇다던데?
‘마법봉? 아, 스턴건.’
그에 목걸이 때와 마찬가지로 타란튤라의 큼직한 다리가 모니터 앞에 나타났는데, 역시 화면으로만 보던 걸 실제로 보니 생생함이 달랐다.
곤충 갑각 특유의 번들거림과 다리에 달려있는 털 비슷한 기관들까지.
최근 한 헌터가 무기를 타란튤라 뒷다리에만 있는 가시로 장식하고 나서 헌터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진 탓에 타란튤라 가시가 금값으로 뛰었다.
‘이런 식이라면… 나중에 울프릭이 도전할 금사자의 날개… 화룡의 송곳니….’
타란튤라 가시를 얻음 자체에 희열을 느낀 차원은, 앞으로 울프릭의 행보를 생각하며 더 큰 희열을 느꼈다.
차원은 급하게 부산물을 챙기고 강남역에 있는 헌터 상점으로 향했다.
가게 주인은 슬쩍 이차원의 얼굴을 보고는 관심을 거두고 할 거를 마저 했다.
저렇게 서울에 처음 올라온 촌놈처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은 갓 헌터가 된 애송이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차원이 타란튤라 뒷다리를 데스크 위로 올려놓자 깜짝 놀랐다.
“이건 타란튤라 뒷다리잖아? 손상도 거의 안 됐고. 아이고, 죄송합니다. 나이가 드니까 헌터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건 됐고, 얼마나 생각하십니까?”
“상태도 모두 S급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타란튤라, 그놈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워서 제압하느라 원래 상처가 많은데, 이 정도로 상태가 좋은 건 처음 봐. 고레벨의 헌터가 제압했나?”
주인장은 이 물건의 가치를 아는 듯했다.
말 그대로, 흠집 하나 없는 부산물.
엄청 높은 레벨의 헌터가 맨손으로 잡는 것이 아닌 이상, 상처 하나 없는 부산물을 얻기는 어렵기 마련이다.
물론, 가치가 뛰어날지라도 고레벨 헌터들이 타란튤라를 사냥하며 그 부산물을 모으진 않는다. 그들의 시간을 타란튤라 부산물 따위에 값을 매기기에는 터무니없이 컸으니까.
“그래서 가격이 두 배는 뛰잖아요?”
“그, 그렇지.”
주인장은 깊게 숨을 내쉰 뒤, 크게 배팅했다.
“3340만 원. 타란튤라의 가시와 몸통 다리들의 상태가 좋다고 해도, 그것보다 더 쳐 드렸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거래를 하자고요.”
이 정도의 물건을 계속 가져올 수 있는 헌터라면.
가게의 입장에서는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부자가 되는 기분.
돈을 버는 즐거움을 이제 조금 알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