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마른하늘에선 푸른색 빛 덩어리가 땅에 내리 찍혔다.
녹빛 피부 1cm 아래 굵직한 근육들,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어금니와 그 사이로 삐져나오는 타액들까지.
화면 속에서 새파란 번개가 번쩍거릴 때마다 오크 무리가 비명을 질러댔고, 그 사이로 슬쩍 이목구비가 또렷한 헌터의 모습이 보였다.
최번개라는 이름답게 번개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그는 벌써 구독자 200만을 넘겼다.
인기 요인은 다양했지만, 잘생긴 얼굴도 한몫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뒤엔 ‘최강힐러’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하기 시작한 서포터 헌터인 은지까지.
차원은 씁쓸한 입안을 다시며 스트리밍 방송을 빤히 바라봤다.
말 그대로 그사세,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다.
“나랑은 상관없는 세상이지.”
스트리밍에서 최번개와 헌터들이 마지막 보스 몬스터를 남겨두고 있는 순간, 모니터가 꺼지며 검게 물든 액정엔 이렇다 할 특징도 없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차원은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와 방 내부를 둘러봤다.
좁은 방 한켠에 쌓여 있는 컵라면 용기와 이젠 냄비 받침대로 쓰는 종이 뭉치들.
차원은 그 종이들을 바라보며 쓰디쓴 현실을 다시 마주하려던 찰나, 그에게 전화 한 통이 날아왔다.
“예. 아버지. 밥이요? 이제 먹어야죠……. 예, 걱정하지 마세요.”
차원은 전화를 끊고 종이 뭉텅이를 집어 올렸다.
[용의자 헌터의 기억법]
오랜 시간 공들였던 미스테리 소설이자, 어떤 출판사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나머지 원래 가지고 있던 소설 원고라는 가치를 잃은 물건이다.
차원은 쓰레기통에 원고를 쑤셔 넣곤 침대에 누워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현재 나이 27살. 직업도 없이 꿈만 보던 백수.
그는 지금껏 막연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꿈을 접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꿈을 접으면 현실을 봐야 하는 법이라 진지하게 앞날을 고민했다.
소설 작가 말고 되고 싶은 건 뭐였나 생각해보니, 방금까지 잘 보던 스트리밍이 떠올랐다.
평범한 사람은 꿈에도 못 꾸는 능력과 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헌터.
마음 같아선 자신도 헌터가 되고 싶지만, 27살이 될 때까지 각성의 계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작가보다 더 막연한 꿈일 뿐이었다.
“아버지 가게……. 머리 아픈건 해결되긴 하겠지만.”
아버지는 차원의 꿈을 응원하지만 현실적인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제 나이가 좀만 더 넘어가면 아들이 사회의 패배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자신이 걱정하는 모습이 아들에게 상처 될까, 애둘러 가게로 나오라는 말은 하곤했다. 고민이 이어질수록 뭔가 암울한 미래만 그려졌다.
“모르겠다.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일어난 차원은 결국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바탕화면엔 원고 파일들이 즐비했지만, 쉬프트 키를 누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휴지통에 처박았다.
남아있는 건 휴지통과 인터넷, 그리고 시뻘건 불구덩이 같은 아이콘 뿐이었다.
[Drak Horn]
그 불구덩이 아이콘을 클릭하자 검게 물든 화면 위로 떠오른 핏빛 글씨.
게임에 미친 게이머들에게 최고의 망겜이 뭐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걸 고를 정도로 욕을 먹는 게임이었다.
암울한 세계관에 어울리게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지선다 엔딩 게임.
그래도 차원은 이 게임을 놓을 수 없었다.
결국 또 게임으로 도망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겐 게임이 인생이었고 현실이었다.
메인화면에서 ‘새로운 시작’을 누르자 마차 한 대가 조막한 돌멩이들에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그 안에선 울프릭이라는 게임 NPC가 제 안방인 마냥 편히 누워있었다.
“여기서 리처드.”
언제나처럼 기다렸다는 듯, 리처드라는 놈이 나타나 울프릭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가래가 잔뜩 낀 목소리로 정해진 대사를 읊었다.
-일어나. 곧 도착하니까.
그 모습을 여럿 봐온 차원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랄하네.”
좀 있으면 뒤질 운명인 놈이 무슨. 언제나 이 게임을 새로 시작하면 나오는 대사였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알기에 리처드가 나오면 항상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평소랑 달랐다.
원래라면 울프릭을 깨우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어야 할 리처드 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너 뭐라 했어, 새끼야?
차원이 중얼거렸던 혼잣말을 다시 중얼거리며 울프릭의 멱살을 쥐어 잡는 리처드의 모습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동자만 굴려대기 바빴다.
“뭐야, 내 말을 듣는다고?”
-그럼 안 들려? 이게 사람을 귀머거리로 아나!
결국 리처드가 가만히 누워있던 울프릭의 머릴 갈겼고, 그의 머리 위에 있던 HP 바의 수치가 감소됐다.
“아, 씨발.”
저절로 욕이 나왔다. 마치 울프릭이 머리를 맞자, 마치 직접 가격당한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차원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몸을 수그렸다.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눈앞이 파래지며 각진 상태창이 부지불식간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각성 ‘차원이동자’]
[패시브 : 빨간 실 습득]
[당신과 다른 세계에 속한 영웅이 당신의 생명줄에 연결되었습니다. 연결이 더욱 긴밀해지면 특수한 효과를 발동시킵니다.]
[액티브 Shift + 1 : 지원 lv1 습득]
[다른 차원과 교류할 수 있게 됩니다.]
[지원 발동 후 사용 가능 액티브 : 제우스 lv1 습득]
[당신의 한숨은 다른 세계에서 작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글자들에 눈앞이 어지러워진다.
차원 이동자. 빨간 실.
마음 속에서 막연하게 바래왔던 헌터의 증거, 상태창이 보이니 가슴 속에서 벅찬 무언가가 끌어오르는 것 같았다.
상태창이라는 건 헌터라는 초인들만의 전유물이었으니까.
액정 너머에서나 보던, 꿈만 꿀 수 있던 먼 나라의 초인들과 같은 존재가 됐다니.
잠시 감동에 젖어있는 것도 잠시, 차원은 패시브의 효과를 읽으며 방금 자신에게 생겼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방금 두통이 연결의 증거구나.’
아직 현실감이 영 없었지만, 울프릭이 가격 당하자 실제로 맞은 것처럼 격통이 밀려왔으니 안 믿을 수도 없는 일.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지금 확실한 건 울프릭의 상태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 뿐이었다.
“생명줄이 연결됐다 쳐. 그럼 저놈이 죽으면, 난?”
그에 관한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시 확인이라도 해주려는 듯, 리처드가 울프릭의 정강이를 걷어차자 똑같은 부위에 벌에 쏘인 것 같은 후끈한 고통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각성을 했다는 성취와 희열,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미래를 그리기도 전에 걱정이 밀려왔다.
게임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악의만 남은 게임이 바로 다크 혼.
게임이 시작하고 난 순간부터 최종 보스인 대악마가 깨어나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게임이다.
차원이 아는 스토리라면 조금 있다 잘 날아가던 드래곤 한 마리가 마차를 뒤집고 불태우는 에피소드가 발생한다.
물론 마차에 타고 있는 대부분 노예들이야 단역 npc에 가까워서 죽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울프릭은 아니었다.
중요 npc인 그는 살아남긴 하지만, 전신 피부 거죽이 그을릴 정도로 큰 화상을 입고 간신히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비록 화면 안쪽에서 보이는 게임 그래픽일 뿐이지만, 몇십 번, 몇백 번이나 불타는 울프릭의 비명 소릴 들었던 차원이다.
‘반드시 막아야 돼.’
리처드가 울프릭을 때렸을 때 느낄 수 있었지만, 고통의 정도는 비례하지 않았다. 실제로 머릴 후려쳤을 때 약간의 두통만 느껴졌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화상 정도면 벌에 쏘인 고통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통을 겪게 될 거란 건 확실해 보였다.
차원은 어떻게든 마차를 모는 마부를 막기 위해 모니터를 주먹으로 치기도 해봤지만, 액정만 깨지게 생긴 터라 당장 그만뒀다.
‘물리적 가격은 안 되는 거 같고.’
점점 드래곤과의 만남의 때가 다가올수록 입술만 바짝 말라왔다.
이걸 어찌해야 할까 싶은 순간, 차원은 방금 자신의 눈앞에 늘어졌던 글자들을 떠올렸다.
[액티브 Shift + 1 : 지원 lv1 습득]
[다른 차원과 교류할 수 있게 됩니다.]
교류라. 대체 무슨 교류인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백배 낫겠지.
이런 생각에 곧바로 키보드 왼쪽 끝자락에 있는 shfit 키와 1번 키를 동시에 눌렀다.
단축키가 입력되자 모니터엔 일렁이는 안개로 이뤄진 워프가 나타났다.
-빌어먹을, 뭐야 이거?!
-몬스터, 몬스터다!
게임 속에서 안개에 싸인 채 두둥실 떠다니는 이차원의 얼굴이 나타나자 모두가 식겁했다.
물론 놀란 건 차원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모니터 세상 속으로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거다.
“우욱.”
게임 속에 얼굴이 나타나자 가장 먼저 변화에 민감한 후각이 반응해왔다.
몇 달을 씻지 않은 건지 마차에 있던 노예들에게서 풍겨오는 찌든 내에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렸다.
[제우스 lv1이 발동됩니다.]
입으로 바람을 불자 떠오른 안내문과 함께 저 멀리서 거센 바람이 벌어오더니 벗겨진 앙상한 나뭇가지들과 마차를 흔들어댔다.
‘바람?’
분명 상태창에 나온 바로는 지원이라는 스킬이 발동된 후, 한숨을 불면 제우스 스킬이 발동된다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방금 게 지원 스킬이 발동된 거였어.’
차원은 확인차 방금보다 더욱 세게 입바람을 불어댔고, 당연하게도 더욱 거센 바람이 불어오더니 경로에 바퀴 자국을 남길 정도로 묵직한 마차를 점점 기울게 만들었다.
-어어? 어어어?
결국 돌풍에 이기지 못한 마차가 전복되며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고, 마차를 몰던 말과 마부는 비명을 질러댔다.
이내 언덕 아래에서 깔린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안에선 떨어질 때 잘못된 건지, 늙은 말은 파들파들 다리만 떨어대며 절명했다.
그나마 멀쩡한 마차 내부에선 울프릭이 오만상을 쓰며 일어났다.
-거기, 당신이 이렇게 한 건가?
둥둥 떠다니는 차원의 면상을 보며 한 마디 쏘아붙이는데, 뭔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차가 굴러 떨어질 때 울프릭이 느꼈던 고통을 비슷하게 느낀 덕분이었다.
-방금 그쪽이 입으로 무슨 짓 하니까 바람이 불어오던데, 맞겠지. 아니 멀쩡히 가고 있던 마차는 대체 왜 전복시키고…….
한껏 차원의 면상에 대고 뭐라 하려던 순간, 또다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허나 이번엔 차원이 아니었다.
그 거친 바람을 몰고 온 건 하늘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
이내 웅장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등장한 드래곤 한 마리가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숨을 들이켰고, 목구멍엔 뭔가가 차올랐다.
이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닫아두던 목 입구를 열자 뜨거운 불덩어리가 쏘아지며 원래 마차가 지나가려고 했던 길목을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어라?
울프릭과 이차원.
다른 세계의 두 존재가 처음으로 만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