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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의식
검의 공주는 사탄이 사라지고 난 직후에서야 정신을 차렸다. 사탄의 공격에 인공지능 부분이 상당히 망가지는 바람에 자동수복기능이 발동하고 몸이 가동 가능한 상태로 돌아오기 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두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스킨 헤드 머리를 한 남자였다. 그는 흙더미에 깔려 있는 검의 공주를 쪼그려 앉은 채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야. 정신이 드십니까? 어디 고장난건 아니야?”
“마치 인간처럼 상처가 회복하고 있어. 마법인 것 같은데 수준이 너무 높아서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회복이란 단어보다는 수복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리려나?”
바론의 경박한 말을 받은 것은 그의 뒤에 있는 여인이었다. 검은색 챙이 넓은 고깔모자를 한 그녀는 흥미로운 눈동자로 검의 공주를 보고 있었다.
세르미나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성능의 골렘을 보고 들떠 있었다.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해부해보고 싶지만 수준이 워낙 높아서 다시 조립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눈앞의 골렘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아는 자아형 골렘이었다.
“저기 말이야. 널 만든 건 누구니?”
세르미나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옆에 있던 바론이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혀를 내밀었다.
“권한 없음. 알려줄 이유도 없고. 내 마스터는 어디 있어?”
검의 공주는 자신과 조슈아의 사이의 마력 통로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연결이 끊어졌다. 일종의 계약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끊을 방법이 없다.
“마스터? 아, 이놈 말이야? 근처에 있던 걸 죽였지.”
바론이 등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검의 공주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보았다. 사람의 머리다. 그러나 그녀가 알고 있는 조슈아의 얼굴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우선 두 눈과 코가 없고, 얼굴 전반이 칼자국으로 가득해서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푸른색 머리가 아니고, 겨우 남아 있는 두개골의 형태가 조슈아와 일치 하지 않았다면 검의 공주는 그걸 다른 누군가의 머리로 생각했을 것이다.
“반송장같은 놈이어서 말이지. 죽이는데 별 재미도 없었어. 고작해야 마법 몇 번 사용하는게 전부였지. 아, 마법하니까 테드 놈이 생각나네. 그 놈 지나치게 강해진 바람에 손댈 수가 없잖아. 진짜. 이전까지는 상성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면으로 싸워선 답이 없어. 약점을 잡던가 해야 하는데 쉽지도 않고. 차원이 다른 인물이 되었다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된거 그냥 포기하고 다른 재미난 놈을 찾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말이야.”
바론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여놓기 시작했다. 검의 공주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코어에 저장해둔 마력 83%를 자기 수복에 사용한 결과 완벽하진 않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전투행위 가능.
코어 잔여 마력 중 전투에 사용 가능한 마력은 12%. 최소한의 기술만 사용할 시 약 5분간의 전투 행위 가능.
눈앞의 인간의 근육과 간간히 보이는 움직임, 소유한 마나, 무장 상태를 파악한 결과 한순간에 섬멸가능.
특별히 조심해야 할 건 그가 가지고 있는 검. 한 눈에 보아도 보통의 검이 아니다.
문제는 뒤에 있는 마녀다. 조슈아 이상의 마력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 대마도사의 경지에 이른 여자다.
“근처에 딱 좋은 병기가 버려져 있지 뭐야? 이거면 방법이 생기겠다고 생각했지. 정말 행운이야. 그렇게 생각 안 해? 후하하하!”
검의 공주는 청은색의 눈으로 조용히 바론을 쳐다봤다. 주어진 의무를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선 최상위의 몸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검의 공주에게 마스터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한 가지의 기운을 감지했다.
더럽고 역겨우며 혐오스러운 배신자의 기운이 아니라 맑고 청량한 그분들의 기운이었다. 검의 공주의 얼굴이 봄에 핀 꽃처럼 밝아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눈에 마력을 사용해 그분들의 기운을 찾았다.
그분들의 물건을 몸에 걸친 자기 분수도 모르는 인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검의 공주에게 혼란이 찾아왔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방금전 까지만 해도 없었던 기운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는 10% 정도였다면, 지금은 그분들의 기운과 90% 이상 일치하고 있다. 그 10%도 그분들의 물건의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이해 불가. 분명 인간인데… 인간이 확실한데… 왜….”
사고가 혼선을 일으킨다. 그분들이 맞는 건가? 가서 모셔야 하나? 하지만 인간이잖아? 그분들의 기운과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분들이잖아. 그러나 인간이야. 어떤 편범을 이용한 걸지도 몰라. 편범으로 그분들과 같은 종류의 힘을 갖는게 가능해? 그분들과 완전히 똑같은건 아니야. 그분이 아니라 인간이야.
“……어떻게 해야 되지? 이런 상황에 대해선 들은 적 없어….”
“응?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탄한테 쳐맞고 머리에 나사같은거 하나 빠졌어? 이 상황에서 해야 되는 건 당연히 하나뿐이지.”
바론이 실실 웃었다.
“나랑 계약하자. 내가 네 마스터가 되어줄게. 어차피 마스터도 이 꼴이 났잖아?”
“불가.”
검의 공주가 딱 잘라 말했다. 바론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사라진다.
“너 어차피 주인 없는 골렘이잖아. 떨어져 있는 물건은 먼저 줍는 자가 주인이라는 건 상식이잖아? 네가 거부해도 강제로 할 거야. 난 네가 필요하거든. 네게도 나쁜 일은 아니야. 저런 덜떨어진 놈보단 내가 더 나을 테니까.”
“자격 미달. 넌 내 마스터가 될 자격이 없어.”
흙더미 속에 있던 검의 공자가 몸을 일으켰다. 새하얀 드레스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고 흙이 묻어 있어서 지저분했다.
검의 공주는 혹시나 싶어 손목을 돌려봤다. 역시 알고 있던 대로 문제는 없었다.
“그 자격이 뭔지 궁금해서 그런데. 가르쳐 줄 수 있어?”
“조건 다수.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야.”
“후하하. 물건 주제에 건방진 걸? 아까 한 말 이해 못했나? 떨어져 있는 물건은 먼저 줍는 자가 주인이라고. 네 의견 따윈 관계없다고.”
“반대. 나는 주인을 고르는 병기야.”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천천히 뜯어 고쳐주지. 세르미나! 강제 계약 시작해!”
뒤에 있던 세르미나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양손을 들었다. 푸른색의 마법진이 우웅 거리며 나타난다. 주인을 잃은 골렘에게 주인 인식을 시킬 때 사용하는 마법이다.
“알고 있겠지만. 이게 마지막이야. 이걸로 우리 사이는 영영 끝. 다시 만날 일이 없으면 좋겠네.”
“아쉬운데. 사실 나 너 사랑하고 있어.”
바론이 자신의 검, 루나틱 블레이드를 손에 들었다. 마법이라면 그겟 무엇이든 베어버리며 마력을 흡수하는 검이다. 골렘은 마법으로 이루어진 물품이다. 이 검에 닿기만 해도 골렘의 몸에 걸린 마법이 박살난다.
눈앞의 물건을 박살낼 수 있기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러기엔 검의 공주가 너무 위험하다.
바론은 부디 그녀가 조립형 골렘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조립형의 경우 핵이 아닌 곳에 검이 닿으면 완전히 박살나지는 않으니까.
“같잖은 수작질 하지 마.
세르미나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녀가 눈동자에 살의를 담아 바론을 쳐다봤다.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것을 보며 바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한데. 그동안 찰떡같이 붙어 다녔는데… 우리 사이가 그것 밖에 안 됐어?”
“찰떡같이 붙어다닌 적 없고, 우리 사이는 원래이랬어. 그 검만 없었다면 넌 내손에 죽었을 거야.”
바론은 싱글벙글 웃었다.
‘이대로 보내주기 아쉬우니 계약이 끝나면 죽여야겠어. 세르미나는 쓸모가 많았는데…. 그래도 새로운 게 손에 들어 왔으니 만족하도록 할까.’
바론이 검의 공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낮은 하단 베기. 다리를 베어낼 생각으로 전력으로 휘두르는 검이었다. 한 순간에 틈만 만들어낸다면 이미 이야기를 나눈대로 세르미나가 곧장 계약 마법을 사용할 것이다.
딱 한 가지 오산이 있었다면. 바론은 검의 공주를 너무 얕봤다는 것이다. 사탄에게 당해 상태가 안 좋다고 생각했고, 대부분의 골렘이 그러하듯 주인 없이는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바론은 자신의 무예에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지 통했으니까.
“…엇?”
바론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이 잘려 있었고, 검의 공주의 손에 자신의 루나틱 블레이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시야가 점점 아래로 떨어진다.
공들여 만든 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잘게 토막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몸이 보였다.
“경멸. 어떻게 이런 좋은 검을 들고 그런 쓰레기 같은 검술을 펼칠 수 있는 거야? 이 검은 내 소드 컬렉션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으니 잘 쓰도록 할게.”
검의 공주가 시체에서 시선을 돌려 마녀를 쳐다봤다.
세르미나가 흠칫하고 몸을 뜰더니 주츰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세르미나는 눈 한 번 깜빡하니 어느새 바론이 죽어 있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바론은 성격은 그렇다 치고 실력하나 만큼은 일류였다. 한 순간에 죽어나가는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병기는 격이 달랐다.
“합격. 당신은 굉장히 좋아.”
“뭐, 뭐가 합격이란 거야?”
“마스터 자격. 가지고 있는 마력의 양과 질 모두 최상급이야. 마음에 들어.”
“……설마해서 그러는데 그 마스터라는 거 네 주인이라는 뜻이 아니지?”
“맞음. 다만 어디까지나 ‘임시’ 마스터지만. 나의 정식 마스터가 될 수 있는 건 그분들뿐이야. 나는 그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니까.”
“임시… 그럼 내 명령을 듣는 거야?”
“불가.”
“……임시 마스터의 존재의미 말인데. 단순히 마력 제공용이지?”
“정답.”
검의 공주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르미나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녀가 강제 계약 마법을 해제하고, 곧바로 공간이동 마법을 캐스팅한다.
검의 공주가 검을 휘둘렀다. 절반도 완성되지 않은 마법이 끊어졌다.
“……이제 겨우 자유의 몸이 되는 가 했더니….”
세르미나가 한탄했다. 물론 검의 공주는 눈곱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계약을 마친 그녀는 테드가 있는 쪽을 쳐다봤다. 피투성이의 메이드를 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테드를 지긋이 쳐다보도가 몸을 돌렸다.
“판단 불가. 보류.”
⁂ ⁂ ⁂
“야, 야! 음란 메이드. 내가 밖에서 뭘 주워온지 알아? 완전 개쩌는 물건이야!”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사이나는 히히덕거리며 부엌으로 찾아온 바알을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뭔가요. 바알. 저는 주인님의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에 많이 바쁩니다만?”
바알은 그저께 사탄에게 당해 마력을 사용할 수 없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며 다가온 바알은 사이나를 향해 유리병을 내밀었다. 안에는 새하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기분도 엿같은게 산책이나 할까하고 동네좀 걸었거든? 근데 웬 병신새끼들이 덤벼오는 거야. 그 놈들이 나한테 먹이려고 한 건데 빼앗았지.”
현재 머물고 있는 도시는 치안이 그닥 좋지 않았다. 중립구역의 도시들이 치안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모험가가 아닌 용병들이 거점을 틀고 주로 활동하는 도시는 특히나 치안이 나빴다. 젊은 여성, 특히나 미녀들은 함부로 혼자 밖에 나가선 안 된다.
바알같은 경우는 노출이 많은 옷차림이다 보니 이런 일에 자주 휘말렸다. 오늘만 해도 족히 4번은 휘말린 일이다.
“……독은 아닌 것 같고… 미약인 것 같은데. 제 앞에서 꺼내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넌 악마가 이 방면에 약하냐. 척하면 척 아니야? 저녁 식사에 넣으라고!”
“악마의 몸은 어지간한 독이 아니면 통하지 않습니다. 그건 미약도 마찬가지고요.”
“누가 너한테 쓴다고 했냐? 당연히 테드를 노리는 거지! 그 새끼랑 나는 오늘 거사를 치르는 거야! 네 말대로 면 시스템의 제약을 풀기 위해선 섹스만한게 없다며?! 약해빠진 체로 있는 건 이젠 사양이야.”
“……주인님에게 당신의 힘이 필요하니 그건 상관없습니다만. 주인님에게 미약을 먹여야겠습니까? 그리고 그 미약 남자에게도 통하는 겁니까?”
미약은 네메스 대륙에서 구하기 힘들다. 당연한 말이지만 범죄이고 제조 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만든다고 하더라도 실력 높은 연금술사가 아니면 만들기 힘들다.
암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은 흥분제에 불과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사람을 발정시키는 미약은 없었다.
더군다나 미약 따위가 테드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내가 그 병신들한테 들은건데. 미약이긴 해도 여자에겐 약간 기분을 고조시키는 것 밖에 안 된다더라. 진짜 효과는 정력제래. 그게 또 효과가 좋아서 남자는 지나치게 흥분하다나 봐?”
“주인님에겐 정력제가 필요없습니다만.”
“알아. 그 새끼 존나 절륜한 거. 드래곤을 쳐먹었나? 어제 아침까지 하더라. 옆방에서 다들었어.”
“…….”
“어제는 그냥 넘어갔지만 말이야. 오늘은 끝을 봐야겠어. 사탄 새끼가 내 마력을 없앴는데, 시스템 제약 때문에 신체 능력까지 약해졌다고. 적어도 제약 하나는 풀어야 쓸만해지지 않겠어? 그리고 말이야.”
바알이 씨익 웃었다. 여자답다기 보다는 어딘가 남자다운 웃음이었다. 정확하게는 아저씨 같은 미소다.
“나도 존나 쌓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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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뭐 그렇다치고.
……내가 브론즈라니.
롤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