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32. 의식
“…네 말대로 후회하고 있어. 대전쟁은 올린버크를 죽이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니야. 그 녀석을 데리고 개과천선 시키는 방법도 있었어.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버려두는 방법도 있었어. 반신불수로 만들고 왕위를 잇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어. 시스템의 계약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어. 네말대로 죽이지 않을 방법은 충분히 있었어. 인정해. 네 말을 전부 인정한다고! 이제 됐잖아?! 네 목적은 달성했잖아?!”
“아니. 부족하다.”
“뭐가 부족하다는 건데?! 전부 인정했잖아?! 네 말이 전부 맞다고!”
“부족하다.”
“나보고 뭐 어쩌라고! 네가 말한건 전부 과거의 일이야! 지금의 내가 인정했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건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잖아?! 내가 한 실수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아니면 내가 전생에 죽인 자들을 찾아가서 사과라도 하기를 바라는 거야? 회귀전에 당신을 죽였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있으니 용성해주세요, 라고 고개 숙여 용서를 빌라는 거야? 도대체 뭐 어쩌라고?!”
“…….”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몸은 어려졌지, 이 세계의 사람들은 쓰레기를 보듯이 나를 쳐다봤지! 평범한 고등하교를 졸업하고, 갓 대학생이 되자마자 교통사고에 죽어버렸어! 사회따위는 경험해본적도 없고,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 따윈 모른다고! 버려진 음식을 주워먹고, 돈을 구걸하고 쓰레기를 뒤졌어! 10살짜리의 몸으로 할 수 있는건 그게 전부였으니까! 새로운 인생? 도대체 뭐가 새로운 인생인데. 이딴 거지같은 세계에서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없이 어떻게 살라는 건데?! 현대의 지식?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보다 똑똑한 놈들이 사방에 넘쳐났다고! 이세계에서 비누를 개발한다? 웃기는 소리! 여기에 비누 따윈 널리고 널렸어! 동전 몇 개로 살 수 있다고! 그렇다고 노동을 시켜주지 않아. 어쩌다 일거리를 얻어도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폭력뿐! 정당한 대가는 바랄 수도 없어. 법은 내편이 아니고, 집과 힘을 가진 놈들의 것이니까. 노예를 될 뻔한 적도 있었어. 차가운 바닥에 잠들어 얼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 짐승의 먹이가 돼서 죽을 일도 있었어! 그렇게 몇 년을 생활하다가 겨우 기회를 얻었어! 힘을 얻을 기회를!”
“…….”
“죽이고 죽였어! 내가 살아남기 위해! 하루 식량을 얻기 위해! 죽이고, 또 죽였어! 어차피 전쟁이잖아? 어차피 전투잖아? 다른 놈들도 그렇게 생활하잖아, 나라고 그렇게 살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어! 여긴 지구가 아니고, 합당한 이유만 있으면 살인 정도는 아무렇게나 저질러도 되는 곳이니까!”
“…….”
“네 말대로야. 네 말대로 죽인 놈들의 얼굴을 잊었어. 무시하려고 했어. 전쟁이 다 그런거라고 변명했어! 생활이 안정됐을 땐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었어. 내가 할 줄 아는거라곤 전투 뿐이었으니까.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자들도 있었어. 하지만 섣불리 그 손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더러운 살인자가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자포자기 했어! 시키는 대로 전쟁을 나섰고, 기계처럼 보이는 적들을 죽였어. 우연히 고대병기의 주인이 되었고, 고대병기가 사람을 학살하는 것을 방조했어.”
“그래서?”
“회귀의 기회를 받았을 땐 내심 기쁘면서도 엿같았어. 이런 지긋지긋한 인생을 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기대했어. 무언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근데 뭐가 바뀌냐고! 힘을 잃고 10살이 되어서 한 것은 회귀전이나 달므 없었어. 살인! 전쟁! 약탈! 그래도 살았어. 내게는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어쩌면 다음 인생은 바뀌질도 모르니까. 기적이 일어나서 네메스 대륙으로 불러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다 그녀를 만났어. 가진 힘도 없는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가 미칠 듯이 부러웠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한 시라도 빨리 죽기 위해, 다음 회귀를 하기 위해 시지 않고 전투에 나섰어!”
“다음은?”
“그녀처럼 살려고해도 대전쟁이 일어나면 불가능하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았어. 회귀하고 곧장 착실하게 힘을 키웠어. 그 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은 그나마 평온한 생활을 하게 해줬으니까. 힘을 쌓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 전쟁을 시작한 딥크스를 공격했어. 대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작은 전쟁에서 끝내려고 했어. 하지만 죽인 놈들의 부모가, 형제가, 친구가 계속해서 덤벼들었어. 다른 국가가 전쟁에 나섰고 깨닫고 보니 대전쟁은 끝나 있었고, 모두 죽여 버렸어.”
지면에 깔려 있던 모든 시체들이 일어선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사이나와 계약할 땐 네 말대로 반쯤은 자포자기였어. 악마의 힘으로 올린버크를 확실하게 죽이고 대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내 더러운 영혼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그야 내 영혼에 가치 따윈 없으니까.”
테드의 뒤쪽에 한 시체가 있었다. 얼굴이 없는 시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올린버크의 얼굴이었다.
“올린버크 한 명의 목숨이야. 그 녀석만 없으면 전쟁을 일어나지 않고 대륙은 평화로워져. 살리는 방법도 있었어. 하지만 그 녀석도 얼마나 사람을 죽였는지 너도 알잖아? 회귀전의 일었다고 해도, 그 생각을 하면 열불이 났다고.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그 녀석 탓이라고 생각했어.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고 망상해왔어! 나는 올린버크를 증오해왔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적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했어!”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
“그래. 후회해! 후회한다고! 내가 조금만 자비를 베풀었다면, 그 녀석도 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변했던 것처럼 그 녀석도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녀석과 협력했다면 사탄교 따윈 진즉에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돼. …내가 쓰레기라는 건 내가 잘 알고 있어. 위선자라는 것도 알고 있어. 사이나가 이런 나를 알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어.”
“네가 만약, 네가 죽인자들을 만나게 다시 한 번 더 된다면 어떻게 할 거지?”
“뭐라 말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죽였는데 사과를 한다고? 부당하게 죽여서 죄송하다고? 어쩔 수 없이 죽여서 죄송하다고? 죽여야 해서 죽여서 미안하다고? 나는 사과할 자신도 없어. 그들이 욕을 한다면, 응징을 한다면 받아 들여야해. 나는 그들에게 그것말곤 할 수 있는게 없어.”
테드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을 땐 그 주위엔 시체따윈 없었다. 시체가 모조리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올린버크의 시체도 사라지고 없었다.
마성은 그것을 확인하고 웃었다.
최고의 힘을 얻은 영력의 사슬이 한층 더 조여 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테드 크루시안. 너는 운이 좋아.”
첫 번째 행운은 영혼이 회귀되지 않았다는 점과 끝까지 한줌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주 작은 희망을 바랐기에 테드가 품고 있는 죄책감은 업이 되어 그의 영혼의 격을 상승시켰다.
두 번째 행운은 마지막 기회에서 영력을 각성한 점이다. 아마 두 번째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영력의 각성은 없었을 것이다.
세 번째 행운은 사이나를 만난 것이다. 사이나는 버팀목이자 원동력이었다. 그녀가 있끼에 지금의 테드가 있었다.
네 번째 행운은 사탄의 피를 흡수하고 정화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행운은 레칸의 정수를 얻은 것이다.
여섯 번째 행운은 사탄에게 마력이라는 불순물을 송두리째 잃었다는 것이다.
일곱 번째 행운은 사탄에게 붙잡혔을 때, 그의 혼력과 악기를 코앞에서 받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행운이 지금의 마성을 있게 했다. 그리고 테드에게 새로운 경지의 길을 열게 해주었다.
“조금 위험했지만, 뭐… 결과는 좋았으니까. 남은 문제는 한 가지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주위는 또 왜 바뀌었고?”
“이제 기억나지? 네가 죽인 자들의 얼굴이.”
마성의 물음에 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난다. 그들의 얼굴이 괴로울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난다.
애초에 잊는 다는 것 부터가 말이 안 된다. 테드는 명실공히 최고의 마법사다. 원한다면 아무리 오래된 기억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너는 이미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 대마도사 이상, 신 미만의 경지. 그 경지를 반신이든 초마법사든 좋을대로 불러라. 네 마음대로다. 네가 이 경지에 최초로 도달했을 테니. 그 위의 경지의 경우엔… 올라가는 방법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다 좋은데 초마법사라곤 절대로 안 불러.”
“너의 ‘의식’은 성공했다. 남은건 네가 어떻게 하는 것과…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지. 의외인 점은 네가 나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거군. 나는 원래 시체들과 함께 사라질 예정이었는데 말이지. …뭐, 네가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사라져버릴 시한부 목숨인건 변함이 없다만.”
“요컨대 끝났다는 거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 거야?”
“원래라면 내가 사라지는 것으로 분신도 사라져서 너는 자연스럽게 빠져나갔을 거다. 하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았고, 시간비율이 다르다고 해도 너무 지체되었다. 분신이 너무 많은 주도권을 가지게 됐어. 성가시게 됐군.”
“……지금 이 순간에도 사이나가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라.”
“알고 있다. 재촉하지마라. 지금 생각하고 있지 않나.”
“설마하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네가 나를 없애면 된다. 그러지 않는 건 네가 그러길 싫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지금 방법이 생겼다.”
마성이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다.
테드가 화면을 바라봤다.
사이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메이드복은 여기저기 찢어졌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테드는 약간이지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면속의 테드가 사이나를 향해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마법은 광선계열의 공격 마법. 근거리에서 맞는다면 피하는 것은 어렵고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
테드가 눈을 크게뜨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웃기지마!”
테드가 고함을 쳤다. 거기에 반응하듯 화면 속 테드, …분신의 마법이 깨졌다.
마성의 분신은 계속해서 사이나를 죽이려고 했다. 테드는 그것을 부정했다. 분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분신이 괴로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사이나가 테드의 머리를 가슴에 안았다.
테드는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주인님. 저는 괜찮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테드는 저도 모르게 화면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뻗었다.
사이나의 피부가 터져나갔다. 피가 사방으로 터졌다.
테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야한다.
[주인님이 이겨내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주인님은 항상 이겨왔으니까요. 저는 도저히 주인님이 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믿고 있다. 기대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배신할 순 없다.
입술을 깨문 테드가 마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보내줘! 지금 사이나한테 가야해! 사이나가 위험하다고!”
“뭘. 이미 가고 있지 않나. 방금은 내가 어리석었다. 분신 따위가 너를 제치고 주도권을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네가 원한다면 주도권을 되찾는건 간단한 일이지.”
테드의 몸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테드는 자신의 감각이 점점더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각이 돌아오고 있다. 사이나의 온기가 점점더 확실하게 느껴진다.
테드는 사라지는 와중에 마성을 쳐다봤다. 마성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견고한 사슬은 부러지지 않는다. 테드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치챈 마성이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괜찮다. 나는 애초에 너이니 말이다. 네가 여기서 사라진다면 나도 여기서 사라진다. 말하기 뭐하지만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지. 아, 마지막으로 실험소에서 얻은 검은 구슬을 사이나에게 먹여라. 그녀가 죽는 꼴을 보기 싫다면.”
“그건….”
“걱정마라. 나는 너다. 사이나가 죽는 걸 용납할 것 같나?”
“좋아.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고맙다라… 자기 자신에게 고맙다라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군. 그래도 인사를 받은 이상 답변은 해줘야겠지. 별 말씀을.”
테드가 사라졌다.
마성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몸도 사라지고 있었다. 의식이 사라진다. 정확하게는 테드에게 흡수되고 있다는 말이 옳다.
“…주도권을 빼앗을 걸 그랬나.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었는데… 그럴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군. 어느새 감화되었다는 건가? …이거 참. 천하의 사탄도 말 다했군.”
마성의 몸이 사라졌다.
============================ 작품 후기 ============================
빨간눈은 테드의 아이덴티티라 버릴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