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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의식
화면속의 장면이 바뀌었다.
투구를 뒤집어쓰고 검을 한 손에 든 푸른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사내는 전투 중 능숙하게 마법을 써가며 적들을 죽이고 있었다.
두 번째 삶의 테드다. 테드의 전투감각의 대부분이 이번 2회차에서 형성되었다.
“두 번째도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첫 번째와 차이가 있다면 전투에 매진했다는 점이지. 강해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떠오르는 기억을 잊기 위해서지. 그런 의미에서 전투의 치열함은 딱 좋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으니까. 전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 네메스 대륙에서 대규모 전투라면 몰라도 소규모 전투는 찾아보면 질릴 정도로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날이면 몸의 한계까지 검을 휘둘렀고, 팔이 움직이지 않으면 마법서를 읽었다. 그러다 지치면 잠들었지.”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었다. 인간이 아니라 기계라 불려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생활을 몇 년이나 해왔다.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삶을 테드는 꾸역꾸역 이어나갔다.
자살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다. 실행하려는 순간,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들이 몸에 달라붙었다.
테드는 지금껏 사람을 죽이며 살아왔다. 자살은 그것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건 테드에게 있어 죽는 것보다 무서웠다.
“계속해서 전장에 나갔다. 대부분을 승리했고, 때로는 패배를 감당했지. 하지만 죽지는 않았어. 몸의 곳곳에 흉터가 늘어나고, 죽을 만큼의 치명상을 입어도 극복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에 죽지 못했다. 하지만 끝은 찾아왔지. 이름 모를 전사의 창에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
화면속의 테드는 창에 꿰뚫렸다. 상대는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었기에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에는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시 테드는 여러모로 유명했기에 쓰러뜨린다면 명예와 돈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원을 빌었을 때, 망가진 네가 살아가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네가 죽였던 자들에 대한 죄책감과 어쩌면 변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었다.”
마성의 말대로였다.
미래는 모르니까. 어쩌면 이런 자신이라도 변할지도 모른다고 제멋대로 희망을 품었다.
“그 정돈 괜찮잖아…. 모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까! 작은 희망 정도는 가져도 되잖아?!”
“이미 과거의 일가지고 뭐라할 생각은 없다. 내가 뭐라할 자격도 없고.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 의견을 말하자면 너의 그 희망은 잘못 됐다. 너는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선, 계기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됐다. 변하고 싶었다면 스스로가 움직여야 했다.”
“…….”
테드가 언짢은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화면 속 장면이 바뀌었다.
여인이 모습이었다. 외형은 미녀라고 부르기엔 무언가 비족하다. 그러나 그녀에겐 눈길을 끄는 매력적인 미소가 있었다. 이름은 듣지 못했기에 모르지만 테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계기는 있었지.”
마성의 말이 끝나는 순간 화면속에 여성이 말한다.
‘저는 이번이 두 번째 삶이에요. 처음엔 힘들었죠.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가족이 생겼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죠.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깨달았죠. 아, 이 세상도 살만하구나.’
여인은 웃으며 말했다. 테드는 그녀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단지 그녀가 건네는 요리를 먹었다.
“별거아닌 말이다. 냉정히 생각하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말이지. 하지만 너는 그 말에 감명 받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녀를 부러워했고, 질투했다.”
“질투따위 한 적 없어.”
“부러워한 건 맞지 않나. 만약 자신이 그녀였다면, 하고 몇 번이나 상상하지 않았나.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지. ‘이번 생은 글렀다. 빨리 죽자. 창조주에게 받은 기회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 만약. 그때의 네 생각을 그녀가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닥쳐.”
테드의 몸에서 살의가 뿜어져 나왔다.
테드는 분명 그런 생각을 가지고 전장에 참여했다. 하지만 목적은 바뀌었다. 한 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으로.
그리고 실패했고, 이름모를 병사의 창에 찔려 사망했다.
“그러지. 그럼 다음이군.”
또 다시 화면이 바뀐다.
화면에 나온 것은 금발의 귀여운 어린아이다. 그러나 눈은 죽어 있었다. 세속에 찌들어 있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세 번째군. 너의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이지. 안 그래?”
“……난 네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네가 말하는 건 단지 내가 겪어 온 걸 말하는 것뿐이잖아.”
“이건 필요한 일이다.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넌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어차피 과거의 일이고, 회귀 전의 일이라며 대충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현재의 일이 아니더라도, 너만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의 과거다. 너는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있게 한 과거를 인정해야 한다.”
“나는 내 과거를 부정한 적 없어! 이미 인정하고 있다고!”
“그럼 왜 네가 죽인 자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지? 이번 생에 죽인 자들의 얼굴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오래된 일이야! 사람의 기억력은 영원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게 되는 게 섭리야.”
마성은 웃었다. 재밌는 농담은 들은 것처럼 웃으면서 테드의 말을 부정했다.
“강성운이 5살 때였다. 제대로 대화 해보지도 못한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 하지만 너는 그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8살 때였다. 소풍에서 만난 다른 지역에서 만난 친구의 얼굴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 그 녀석의 이름이 무엇인지.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놀았는지는 잊어도 얼굴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
기억하고 있었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집안의 분위기는 걱정될 정도로 침울해져 있었다. 친할아버지와 만난 기억은 없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한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성은 테드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세 번째의 목적은 바뀌었다. 이전처럼 피에 절인 삶이 아니라, 과거에 보았던 여인처럼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이번에는 확실한 목표를 가졌다. 문제가 되는 것은 대전쟁이었다. 대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목표의 실현은 불가능해지니까. 그렇기에 대전쟁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그때 대전쟁이 왜 일어나는지 조금도 몰랐으니까. 전쟁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어.”
테드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 이전까지 전쟁의 원인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에는 신경쓰지 않고 전투에 참여했었다.
“대전쟁은 일어났다. 너는 대전쟁에서 대마도사로서 활약했지. 마법 한 번에 도시가 멸망했고, 마법 한 번에 만 단위의 생명들이 사라졌다. 전쟁의 원인을 조사하면서도 너는 대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직 남은 한 번의 기회가 있으니까. 적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시체를 짓밟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
“그리고 창조주를 만났지. 강성운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너는 소원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기에 지구에 있는 가족들의 행복을 빌었다. 가족들이 잔혹한 네메스 대륙에 오지 않기를 원했다.”
화면 속에 테드는 망가진 풍경을 보고 있었다. 과거에 대도시라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던 그곳엔 멀쩡한 건물은 하나도 없었으며,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테드가 멸망시킨 대도시였다.
대도시를 무감정하게 쳐다본 테드는 아공간을 열어 단검을 하나 꺼냈다. 흔히 명작이라 불리는 단검이었다.
“너는 아무래도 좋은 소원을 이루고서 자살했다. 그렇게 마지막 네 번째가 시작되었다.”
“……좋아. 계속해봐. 어디까지 지껄이는지 들어주지.”
“그거 고맙지만, 네 번째에 관해서 내개 할 말은 별로 없다. 다른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거 하나는 집어야 겠지. 너는 후회를 하지 않는다고 결심했다.”
“그래. 3번째 때 그리 결심했어.”
“그건 굉장히 듣기 좋은 말로 치장한 명분이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죄책감을 잊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너는 그들을 극복하지 못했다.”
“…….”
테드가 입술을 열었다가 작은 숨과 함께 다시 다물었다.
“처음 사이나와 만나고 계약할 때, 너는 망설임 없이 영혼을 걸었다. 수 천 만이 죽어나가는 대전쟁을 막는 대가로 자신의 영혼이면 싸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 그 무렵의 너는 여전히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런 너를 바꾼 것은 사이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이나는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해졌고, 그녀가 곁에 있어준다면 자신의 영혼 정도는 아무래도 좋다고 느꼈지. 너는 행복을 손에 넣었다.”
“……인정해. 네 말이 전부 맞아. 이제 만족하냐?”
“너는 대전쟁의 원인이 되는 올린버크를 죽였다. 대전쟁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망설이지 않고 죽였다.”
“나는 지금도 후회따윈 하지 않아. 올린버크를 죽이고 네메스 대륙을 구할 수 있었으니까. 한 명을 죽여서 수 천 만의 목숨을 구했다면 그건 굉장히 큰 이득이야.”
마성은 테드의 얼굴을 보았다. 테드 스스로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현재 얼굴은 굉장히 일그러져 있었다. 무언가에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에 슬퍼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건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아니야.”
화면은 올린버크가 죽는 순간을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있었다. 올린버크는 테드의 공격 마법속에서 죽어나갔다.
“너는 올린버크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있다. 자신이 변했듯이, 올린버크도 충분히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을 테니까. 죽인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막는 게 아니라, 대화를 통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그 녀석에게 대화가 통할 리가 없잖아? 아무렇지 않게 대전쟁을 일으킨 놈이라고. 놈은 죽을 때마저 웃는 싸이코야!”
“네가 아는 올린버크는 미래의 올린버크이지 않나. 올린버크는 충분히 변할 가능성이 있었다. 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확실하게 대전쟁을 막는, 올린버크를 죽이는 것을 선택했다.”
테드의 시선이 화면에 향한다. 올린버크는 계속해서 죽고 있었다. 화면을 깨부술 듯이 노려보던 테드가 입술을 짓눌렸다.
“…네 말대로 후회하고 있어. 대전쟁은 올린버크를 죽이는 방법만 있는 게 아니야. 그 녀석을 데리고 개과천선 시키는 방법도 있었어.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버려두는 방법도 있었어. 반신불수로 만들고 왕위를 잇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어. 시스템의 계약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어. 네말대로 죽이지 않을 방법은 충분히 있었어. 인정해. 네 말을 전부 인정한다고! 이제 됐잖아?! 네 목적은 달성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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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다음편이 더 있는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