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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257화 (25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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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의식

“뭘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인상을 찡그린 테드는 몸을 걸었다. 다행히도 몸은 최상의 상태였다. 사탄에게 받은 데미지가 전혀 없었다. 입고 있는 깨끗한 것을 보면 회복과는 다른 개념인 듯 했다.

테드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혼 아래에 펼쳐진 지면에는 시체만이 가득했다. 어디를 보나 시체 밖에 없기에 테드는 앞으로 향하기로 했다.

한 발자국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묘하게 딱딱하면서도 일부는 말랑거리는 감촉에 깜짝 놀라 발을 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밟았던 지점에는 짧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머리가 있었다. 테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남자의 머리는 마치 달걀귀신처럼 얼굴이 없었다.

“밟았을 때는 분명히 코를 밟는 감촉이 있었는데….”

시체의 머리를 만져서 확인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께름칙한 것은 둘째 치고 확인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테드는 시체의 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될 수 있는한 시체의 머리를 건들이지 않게, 몸에 피가 묻지 않게 주의하면서 어디에 있는지 모를 출구를 찾아 걸었다.

죽음이란 침묵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생각에 빠졌다.

“……사이나.”

뒤늦게 사이나에 대해서 떠올랐다. 이곳으로 오고난 뒤로부터 묘하게 머리가 멍해서 사고활동이 늦는 감각이었다. 왜 자신이 사이나에 대한 것을 뒤늦게 떠올렸을까.

“사이나가 위험해.”

바알이 있다고 해도 그녀또한 자신처럼 사탄에 의해 마력이 사라졌다.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은 한정되어 있다. 바알은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테드는 다급해졌다.

그의 다리가 점점 빨라진다. 경보에서 달리기로 변하려는 찰나에 그의 다리는 본래의 느린 걸음을 되찾았다.

이미 늦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사탄은 이미 자신을 죽이고, 사이나를 죽이고, 바알을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흘렸다.

여기서 발악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생각에 거기에 닿자 테드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더 느려졌다.

부정적인 사고가 이어진다. 사고를 제어 할 수 없다. 이곳에서 눈을 뜨고 난 뒤부터 자신은 무언가 이상했다.

사고를 처음으로 되돌린다.

‘난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이곳과 아주 비슷한, 아니 똑같다고 해도 좋은 꿈을 꾼 적 있었다.

그때는 자신의 꿈에 침입한 서큐버스 때문이었다. 이름이 뮤렌이라고 했던가. 분명 궁니르를 맞고 죽은 서큐버스로 기억한다. 어쩌면 자신은 정신을 잃고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는 어떻게 꿈에서 깼더라….”

테드의 다리가 다시 본래의 속도를 되찾는다. 일정한 보폭으로 시체의 위를 걷는다. 그리고 보니 그 꿈의 마지막에 도달한 곳은 우주 공간이었다. 과거 창조주 제울과 만났던 우주가 배경인 곳이었다.

만약 이곳이 그때 꾸었던 자각몽과 같다면 끝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건 갈림길?”

한동안 시체 위를 걷고 있자니 갈림길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말 그대로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더니 눈앞에 갈림길이 펼쳐져 있었다. 이것으로 테드는 이곳이 꿈이라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신세계의 일종임은 틀림없다.

테드는 오른쪽과 왼쪽을 둘러보았다.

오른쪽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시체의 언덕이 아니라 산을 이루고 있었다.

왼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커먼 공간이었다. 과거에 보았던 꿈을 떠올리면 이쪽이 정답일 것이다. 아마도 저 시커먼 공간은 우주 공간으로 이어져 있을 테니까.

테드가 왼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아니. 그쪽이 아니라 반대쪽이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테드는 깜짝 놀라서 다리를 멈췄다. 메아리치는 듯한 그 목소리는 자신의 것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테드는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무 높아서 정상이 보이지 않는 시체의 산이 있었다.

“저 위에서 들려 온 건가?”

테드는 고민했다. 그에게 두 개의 선택이 생겼다.

목소리를 무시하고 검은 공간으로 가서 꿈에서 깨어나거나, 목소리에 따라 시체의 산을 오르거나.

“대화가 통한다면… 여기가 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테드는 몸을 돌렸다. 시체의 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체의 산을 올라가자니 시간이 한참동안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테드가 한 걸음 내걷을 때마다 풍경이 바뀌었다.

한 걸음이 백 걸음이 되었다. 그 신기한 광경에 놀라면서도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다시금 알게된다.

정상에는 딱딱한 등받이를 가진 의자가 하나 있었다. 낡은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위에는 하나의 인영이 앉아 있다. 의자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 위에 한 팔을 올린체 턱을 괴고 앉아 있다.

테드는 그의 모습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는 대칭되는 좌우반신의 모습이 서로 달랐다.

오른쪽은 테드랑 똑 닮았다. 지금 테드와 다른점이 있다면 그의 눈동자가 ‘신안’을 사용했을 때처럼 붉다는 것이다. 그의 눈동자에서 요사스런 붉은 빛이 흘러나온다.

왼쪽은 생물의 형상이 아니었다. 선홍빛의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선홍색 번개를 억지로 사람의 형상으로 뭉쳐놓은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시체의 산에서 나온 쇠사슬에 의해 의자와 함께 묶여있어 움직이는 못하는 상태로 보였다. 테드가 본대로 그는 의자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늦었군.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린 거냐. 평생 못볼 가능성도 있었으니 그 놈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가.”

테드는 자신과 닮은 목소리에 놀라면서도 그를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넌 뭐야? 여긴 어디고?”

“여긴 너의 안. 심상세계랑 비슷한 무의식의 세계다. 그리고 나는 사탄의 분신… 아니, 사탄의 되다만 찌꺼기라는 게 맞겠지. 본래라면 내가 의식을 가지는 일은 없었겠지만, 너는 운이 좋았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겠어. 사탄과 관련된 놈이라고? 사탄의 부하같은 거냐?”

테드에게서 적의가 뿜어져나왔다. 그는 사탄이란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치솟는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선 그 착각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겠군. 내가 말하는 사탄은 네가 알고 있는 사탄이 아니다. 아스타로트 같은 것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 고대 시절에 존재했던 사탄을 말한다. 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 연구 자료에 사탄에 관한 것도 있었으니.”

인체 실험이 실행되고 있는 실험소에서 얻은 것을 말하는 것일터다. 테드는 사이나에게서 연구자료와 주먹만 한 검은 구슬을 받았다. 검은 구슬은 사탄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악기가 담겨 있었기에 아공간에 처박아 두었다.

자료는 간간히 살펴본 것에 비해 검은 구슬을 연구해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보다 바쁜 일이 많아서 그날 이후 꺼내보지 않았다.

“네가 아스타로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렇군.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나….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잘 들어라. 나는 네가 흡수한 ‘사탄의 피’에서 태어났다.”

테드는 흡수한 사탄의 피라는 말에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천마와의 전투에서 사탄의 피가 가득 담긴 곳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분명 그 때.

“사탄의 피는 정화되었을 터인데?!”

“네 말대로 사탄의 피는 정화되었다. 하지만 정화되었을 뿐, 소멸된 것은 아니지. 그 증거가 바로 ‘마성’과 붉은 눈이다.”

“마성….”

“그래. 나는 마성이다. 사탄의 피가 정화되고 남은 결과물. 본래라면 너의 힘에 의해 사라졌어야 할 무언가다. 하지만 너는 나를 필요로 했지.”

테드는 그때의 받은 질문을 떠올렸다.

지키고 싶냐는 그 질문을 기억한다.

“……좋아. 네가 뭔지는 대충이나마 알겠어. 네가 내 적이 아니라는 것도 포함해서. 그러니 말해줬으면 해.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네가 여기서 나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개죽음일 뿐이지.”

“…사이나를 구해야해.”

테드가 조용히 뇌까리듯 말했다. 시간을 생각하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 하지만 테드는 그녀가 살아 있다는 희망을 놓을 수 없다.

“그거라면 걱정하지마라. 사이나는 살아있다. 내 분신이 잘해주고 있지. 뭐…, 그 분신이란 것도 믿을게 못되니, 계속 주도권을 쥐어주고 있으면 네가 죽게 될 거다.”

“분신?”

“이건 내 설명 보다는 직접 보는게 빠르겠군.”

허공에서 화면이 나타난다. 화면 속에는 붉은 눈의 테드가 붉은 브류나크를 들고, 검은 브류나크를 든 사탄과 싸우고 있었다.

“비록 분신이라고 해도 저딴 되다만 것 정도는 처리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쪽이지.  점점 육체의 주도권이 분신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면 영혼까지 변질되어 너와 나는 무의식속에서 사라지겠지.”

테드는 마성의 말을 들으면서도 화면에 눈을 떼지 못했다. 사이나가 보였다. 기절하고 있는 사이나다. 아직 죽지 않았다.

그리고 사탄의 의해 자신은 마력이 없을 텐데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는 거지?

“아직 늦지 않았어. ……좋아. 네 목적이 뭐야?”

테드의 물음에 마성이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목적이라 불릴 만큼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너의 끝을 지켜보고 싶다. 테드 크루시안… 강성운이란 인물의 인생을 끝까지.”

“……내 인생을 지켜보고 싶다고? 스토커 같아서 엄청 기분 나쁜데.”

“그건 나도 기분 나쁘다. 나는 너의 일부다. 내가 이렇게 자아를 가지고 대화할 수 있는 건 네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네가 이곳에서 벗어난다면 나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지.”

“네가 내 인생의 끝을 보고 싶다면 나를 여기에 부른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사탄에게 죽는다면 그것도 내 인생의 끝일 테니까.”

“내가 너를 이곳에 부른 건 맞다만… 용케 눈치 챘군. 한 번 찔러 본건가. 아니, 지금 와선 상관없는 일이지. 말했지 않나. 나는 너라고. 네가 사이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 또한 사이나를 사랑한다. 나는 내가 사이나와 함께 살아가는, 그런 인생의 끝을 보고 싶은 거다.”

“그래도 이해가 안가. 네가 내 몸을 차지하는 경우도 충분히 있잖아. 네가 말하는 분신이 지금 내 몸을 이용해 사탄과 싸우는 것처럼.”

“그건 불가능하다. 보이는 대로 사슬에 묶여 있어서 말이다. 고작해야 네가 없는 틈을 타서 분신을 내보는 게 전부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테드는 의자와 마성을 속박하고 있는 검은 사슬을 힐끗 쳐다보고 다시 마성을 쳐다봤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뭘 해야 해?”

“그렇군. 우선은… 인정해야겠지.”

“무엇을?”

“네가 무시하고 있는 것들. 네가 잊고 있는 것들. 네가 잊고 싶어 하는 걸 떠올리고 인정하고 나아가라.”

테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잊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곳에 있는 시체들은 네가 죽인 자들이다. 그리고 네가 잊은 자들이지.”

“…….”

직설적인 말을 듣고 테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테드를 보며 마성은 입을 열었다.

“처음 네메스 대륙에 떨어졌을 땐,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죽지 못해 살았고, 전쟁터를 전진하며 목적도 없이 살육을 행했지.”

새로운 화면이 나타났다. 검의 공주가 보였다. 그녀는 전쟁터 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가 전장을 달려 나갈 때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섬멸은 누구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너는 테드 크루시안이 아니라, 강성운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빌었지. 수 만 명의 목숨을 제물 삼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창조주에게 빌었지. 그것을 입밖으로 내뱉는 순간부터 그건 죄책감이 되었다. 그건 몸을 억누르는 정도가 아니라 찍어 눌러 압살하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눈을 돌렸다. 자신이 죽인 생명을 잊었다. 강성운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다행히도 회귀라는 면책권이 주어졌다.”

“…….”

테드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말은 전부 옳았기에 반론할 수 없었다. 그를 부정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니까.

============================ 작품 후기 ============================

계몽지수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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