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32. 의식
“이 하등생물이이이이이!!!!”
검의 공주의 입을 통해 분노가 표출되고, 대검을 앞으로 내세워 테드를 향해 돌진했다. 딛었던 지면이 박살나고, 돌진으로 발생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이 돌진은 기술이 아니었다. 분노에 의해 생각이 끊어진 검의 무녀는 기술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분노에 몸을 맡겨 단순히 달려 나갔다.
테드와의 거리는 약 1km 정도지만, 검의 무녀에게 있어 그 정도 거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5초… 아니, 3초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만약 그녀가 냉정을 되찾고 바알에게 다가갈 때 사용했던 이동기술인 ‘축지’를 사용했다면 1초 만에 주파했을 테지만, 지금 검의 무녀는 뇌가 탈 정도로, 온몸이 떨려 비틀거릴 정도로, 손에 쥐고 있는 대검을 놓아버릴 정도로, 그분의 손에 태어나 지금 까지 다시 없을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감히! 감히! 감히이이이!”
“검의 공주?! 어떻게…?!”
테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의 공주를 확인하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대병기가 여기 있는 건 둘째 치고 누가 저걸 깨웠는지 알아야 한다. 검의 공주의 마스터가 약점이기 때문이다.
“감히 그분들의 것을!!!”
검의 공주의 대검이 테드의 몸에 닿기 일보직전, 검의 공주의 바로 뒤에 바알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바알이 씩 웃으며 검의 공주의 오른발목을 붙잡는다.
“야. 씨발년아. 배때지에 칼빵 놓고 튀기 있기, 없기?”
그 가녀린 발목을 완전히 부러뜨리려던 바알은 의외로 단단하여 부러지지 않자, 손안에 폭식을 일으킨다. 검은 기운이 검의 공주의 발목을 감쌌다.
하지만 검의 공주의 발목은 끊어지지 않았다. 바알의 폭식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방해! 그딴 저능한 힘은 내게 통하지 않아! 저리 꺼져!”
검의 공주가 바알의 얼굴을 향해 발길질을 해댔다. 바알은 피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 발에 담긴 힘도, 기교도 처음의 자신의 팔을 자르고 복부를 찌른 일격에 비하면 웃음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아, 그러셔?”
폭식으로 먹는 것을 포기하고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발목이 찌그러진다. 바알은 그 상태로 검의 공주의 몸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지면에 크레이터가 생긴다.
“끄윽…!”
“뭐야. 너 생물이 아니었냐? 그런데도 고통은 느껴? 존나 잘 만들어진 장난감이구만.”
바알의 시선은 그녀의 찌그러진 발목으로 향했다. 응당 나와야 할 피는 보이지도 않았고, 뼈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반짝이는 금속이 있었으며, 그 주위에 선으로 보이는 것들에서 번갯불이 파지직 튀고 있었다.
“뭐, 어쨌거나. 서로 공평하게 배빵 한 대 맞자.”
검의 공주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막대한 분노라 냉정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감정의 새로움에 놀라면서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분노가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시선을 위로 올려 조금 떨어진 장소의 테드를 쳐다본다. 그를 보고 있자니 다시금 짜증이 치밀고, 살의가 솟구친다. 저 위광은, 저 힘은 하등생물이 가져선 될 것이 아니다.
“이년 참 골때리네. 난 관심도 없냐?”
검의 공주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바알이 질린다는 듯이 말하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산을 부수는 힘을 주먹에 담아 검의 공주의 복부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거대한 소리와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검의 공주를 패대기 쳤을 때 생긴 크레이터와는 비교가 안 되게 큰 크레이터가 새로이 생겨난다.
놀라운 점은 그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검의 공주의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뿐 바스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몸이 말도 안 되는 내구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검의 공주라해도 바알을 상대론 무리인가.”
검의 공주는 자신의 몸상태를 확인하며 테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단 몸의 상태는 치명상이다. 중요한 머리 부분은 멀쩡하더라도 복부에 있던 3개의 중요기관이 완전히 박살났다. 사지 중에서 움직이는 것은 왼팔뿐이다. 그마저도 반응이 느려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를 알고 있어? 어떻게? 그분들에게 들은 건가?’
하등생물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곧바로 수긍한다. 그분들의 힘을 가졌다면 자신에 대해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용서할 수 없다.
당장 죽여서 그분들의 위광을 벗기고, 힘을 되찾으며, 그 쓸모없는 목숨으로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바알. 검의 공주를 확실하게 끝내.”
“이미 치명상이라고. 봐.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치명상이란 단어는 생물에게 통용되는 단어야. 저건 상식을 벗어난 병기니까. 확실하게 해주는 게 좋아. 나는 그 사이에 저 빌어먹을 심장을 박살내겠어.”
테드는 곧장 검은 심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은발의 메이드가 뒤따랐다. 바알은 그들의 등을 시선으로 쫓다가 쓰러져 있는 검의 공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댄다. 제대로 싸웠으면 좀 재밌을 것 같았는데 아쉽네. 끝내자.”
바알이 끝장을 내기 위해 다가오기 앞서, 검의 공주가 입을 열었다.
“8번검. 역행의 크로노스.”
그녀의 유일하게 움직이는 왼손에 황금으로 만들어진 단검이 나타난다. 검신이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으며, 검날에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 한 모습의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단검에 바알이 흠칫 놀란 틈을 노려, 검의 공주는 자신의 목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미친. 기계 주제에 자결까지 하냐? 도대체 어떤 놈이 만든 거야?”
기가차서 중얼거리고 있자니, 황금 단검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이 너무 화려하여 바알마저도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릴 정도였다.
3초간 빛을 내던 단검은 힘을 잃듯이 회색의 재로 변하여 바람에 흩날려 사라졌다.
“무슨 장난….”
바알은 순간 말을 잃었다. 눈앞에 쓰러져 있는 검의 공주의 몸이 완전하게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구멍 뚫린 복부는 물론이고 으스러졌던 발목까지 회복되어 있었다. 아니, 드레스까지 완벽히 수복되어 있는 것을 보면 회복이라기 보다는 마치 시간이 되돌아간 것 같았다.
“대답. 나를 만든 건 그 누구보다 위대하신 분이야. 알겠니? 하등 생물아.”
그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전처럼 미친 소 마냥 날뛰던 인물과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분노가 차갑게 식어 얼음 칼날로 변하여 청은색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검의 공주는 의연하게 일어났다. 대검은 어느새 사라지고 녹색으로 빛나는 외날 검(back sword)이 오른손에 쥐여져 있었다. 검날에서부터 시퍼런 독기가 흘려 나왔다.
441번검 맹독의 히이드라. 검날이 품고 있는 맹독 탓에 날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게 되는 독검이다. 해독제는 없으며 독이 뇌속에 침투하면 반드시 죽게 된다.
“…허, 참.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딴 검으로 날 죽일 수 있다고 생각 하냐? 한 번 더 부숴주마. 망할 깡통아.”
먼저 움직인 것은 검의 공주였다.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은어처럼 유려한 움직임으로 바알에게 다가왔다.
바알이 조건반사적으로 검의 공주의 어깨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 닿는 감촉은 있었다. 그러나 검의 공주의 어깨는 박살나지 않는다. 굳이 표현하자면 물을 때리는 감촉이었다.
바알의 목을 향해 녹색의 외날검이 공기를 찢으며 쇄도했다. 바알이 혀를 차며 폭식을 일으켰다. 어둠이 검날을 막아선다. 일전에 그녀의 발목을 삼키려 했던 것처럼, 저 검을 먹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눈앞의 상대에겐 권능이 통하지 않았다.
“……의문. 왜 너 같은게, 저 불경한 하등생물의 밑에 있는 거야?”
“그야 간단하지. 내가 저 놈한테 졌거든.”
바알의 발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검의 공주가 왼손으로 원을 그리며 발을 쳐낸다. 그녀의 뒤에서 충격파가 울렸다. 힘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씨발. 내 힘을 완전히 돌려버려? 어떻게 되어 먹은 기술이야.”
“담긴 힘은 나쁘지 않음. 하지만 힘에 비해 기술은 조잡한 수준이야. 그런건 제대로 된 기술 앞에서 아무 소용없어.”
“하, 말하는 거 보소. 그래, 기교하나 쩔어서 좋겠다. 침대위에서도 기술타령 하는지 궁금해 죽겠구만!”
“……이해불가. 침대는 수면을 취하기 위한 가구. 기술을 사용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이래서 기계란 것들은…. 농담이 안 통해요. 농담이.”
말을 주고받는 와중에도 그들은 수 십 번에 달하는 공방을 나누었다. 검의 공주는 잔상이 일어날 정도로 검을 휘두르며, 기술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바알의 공격을 흘러보내거나 피했다.
반면에 바알은 폭식을 이용해 그녀의 검을 막아내며, 힘을 담아 공격해 들어갔다. 검의 공주에겐 어째서인지 권능이 통하지 않기에 불리한 것은 바알 쪽이었다.
“12번검. 영원한 빛.”
성력으로 이루어진 빛의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알은 검을 보는 순간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저 검에서 느껴지는 신성력은 미카엘라의 창보다 맑으면서 위험했다.
“501번검. 사슬검 글레이프.”
허공에 나타난 사슬검은 단검의 손잡이에 사슬이 달려있었다. 그것은 바알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검의 공주 주변에 10개가 넘는 제각각 종류가 다른 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력을 가진 검이 있었으며, 마법을 발동하는 검도 있었다. 바알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하나, 하나가 범상치 않은 검이었다.
“제거 준비 완료. 이제부터 진짜 섬멸 시간이야.”
“깡통 년이 기고만장해서는.”
바알이 자세를 다잡았다.
⁂ ⁂ ⁂
“안드라스라고 했던가? 미안하지만 어울려줄 생각은 없어.”
테드는 검은 심장의 앞에 있는 악마, 수 십마리의 짐승이 한데 뭉쳐진 것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는 안드라스를 향해 불꽃 계열의 마법을 난사했다. 파이어볼의 하급의 마법에서부터 헬플레임의 최고위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한 것이다.
“고작 이 따위로 날 태울 순 없다!”
몸이 장작불처럼 활활 불타면서도 안드라스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함을 내지르며 테드를 향해 자신의 몸안의 짐승을 쏘아 보냈다.
커다란 상어가 테드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들다가 허공에 멈추었다. 곧이어 은색 섬광이 상어의 몸을 가른다.
“주인님.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주인님은 부디 목적을 이루시지요.”
“……괜찮겠어? 상대는 서열 55위의 악마라고 하던데.”
“옛날의 저라면 조금 벅찬 상대일지 몰랐겠습니다만…. 지금의 저에겐 문제 없는 상대입니다.”
현재 사이나는 테드의 마법으로 강화된 상태이기도 했다. 아마 지금의 그녀라면 바알을 이기진 못해도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바알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지만.
“그럼 부탁할게.”
테드는 곧바로 검은 심장을 향해 다가갔다. 안드라스의 옆으로 지나치려는 생각이었다.
“이, 이것들이! 나를 무시해?! 여긴 지나가지 못한다!!”
안드라스의 표효가 흘러나왔다. 거대한 새의 다리가 테드를 노렸다. 그리고 사이나의 백색 검이 번뜩였다.
“오늘부터 제가 서열 55위가 되겠군요.”
“웃기지마라!! 계집!!!”
안드라스는 몸을 불리며 테드를 막기 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사이나가 권능과 검을 이용해 모조리 받아쳐내어 테드에게 닿는 공격은 하나도 없었지만.
테드는 등뒤에서 들리는 전투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앞만 보고 달렸다. 곧이어 검은 심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투시해보려고 노력했으나, 검은 심장의 내부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투시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에너지 블레이드((Energy Blade).”
푸른빛의 검이 테드의 오른손에 나타난다. 에너지 블레이드를 이루는 에너지가 고속으로 진동한다. 이 에너지 블레이드의 순간 절삭력은 어떤 마법보다 뛰어나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테드는 망설임 없이 맥동하고 있는 검은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푸른 검날은 심장의 징그러운 표면에 두부처럼 박혔다. 테드가 검을 아래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심장의 표면을 뚫고 나온 시커먼 팔이 테드의 팔목을 붙잡았다.
테드보다 족히 2배는 큰 팔이었으며 날카로운 손톱 또한 검은색이었다.
“이건…?!”
테드가 팔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붙잡은 힘이 상상이상이었다. 지금의 자신이 온갖 마법으로 강화된 상태라는 것을 생각하면, 상대는 어쩌면 바알보다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좋을 대로 해주지 않았나.”
활동을 멈춘 검은 심장안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 작품 후기 ============================
고결한 영혼은 아마 300회를 넘지 않고 완결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