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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251화 (25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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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의식

“뭐야 저것들…. 악마 맞아?”

테드는 뿔뿔이 흩어지는 악마들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상상하고 있던 악마의 이미지와는 달랐으며, 오랜 세월동안 살아가는 악마인 만큼 자연스럽게 강하리라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100년 동안 검술을 익혔다면 수명이 짧은 중간계의 종족으로선 그 경험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타고난 신체능력과 막대한 수명에서 비롯된 경험. 악마가 두려움을 받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악마라고해서 존나 강한 놈들만 있는 건 아니거든? 저 놈들은 하급 악마. 악마라고 부르기에도 수치스러운 놈들이지. 특히나 저것들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권력을 얻어 보겠다고 자존심을 버리고 아스타로트의 밑으로 들어간 것들이야. 아, 씨발. 당장 죽여버리고 싶네. 저것들이 악마 망신은 다하고 있어.”

바알이 하급 악마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나설 차례는 없었다.

“멈추시지요.”

사이나의 칼날보다 차가운 말이 하급 악마들 귓속에 꽂혔다. 뿔뿔이 흩어지듯 도망치던 그들의 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멈춰 섰다.

악마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고 애를 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최악인 것은 감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정신은 더 없이 멀쩡하다는 점이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두말할 것도 없다. 사이나의 ‘지배’의 권능이다.

“자, 잠깐! 사이나 루키페르님! 저희들의 말을….”

“시끄럽습니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황급히 입을 놀리던 하급 악마가 입을 꽉 다물었다. 그의 입술 틈으로 피가 줄줄 흘렀다. 말하는 도중 입이 닫히는 바람에 혀가 잘린 탓이다. 그의 얼굴색은 창백했다.

“시간 없으니 이제 죽으….”

“망할 메이드! 주인놈이 저것들 건방진 꼴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천천히 죽이시란다!”

테드의 옆에 있던 바알이 큰소리로 외쳤다. 평소였다면 바알의 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바알의 곁에는 테드가 있었다. 사이나가 뒤돌아 테드를 쳐다봤다.

테드는 바알을 한 번 노려봤다.

“무슨 짓이야?”

“너야 말로 왜 그리 급한데? 평소라면 정보를 알아낸 뒤에 죽였을 거잖아?”

“진심으로 저 하급 악마들이 가치 있는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적어도 너보단 많이 알고 있겠지.”

바알의 말은 타당했다. 테드는 연옥에 대해 알지 못한다. 이곳에 누가,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적의 규모도 알 수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전혀 모른다. 악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테드가 사이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듣고 있던 사이나는 곧바로 하급 악마들을 한데 모아 무릎 꿇렸다.

악마들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사이나와 테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도 흘러가는 분위기상 테드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달아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저희들이 원하는 건 정보입니다.”

악마들의 앞에서 차디찬 눈으로 그들을 한 차례 훑어본 사이나가 말을 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기에 하급 악마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정보를 말하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그럼 제가 말하겠습니다!”

“너 연옥에 들어 온지 몇 년 됐냐? 짬밥도 없는 놈이 어딜! 고참인 제가 말하겠습니다!”

“120년 전에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말하겠습니다, 악마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정말 토가나올 정도로 추잡한 동료애였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이나의 권능이 악마들 전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정보를 말하라면서 입을 다물게 만드는 상황에 그들이 당황한 눈으로 사이나를 쳐다봤다. 사이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며 손을 흔들었다.

악마들의 눈에 있던 생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썩은 물고기 같은 눈동자는 사이나의 새하얗고 고운 손을 따라서 움직였다.

지배의 권능을 이용한 정신 지배다. 강력한 자기 주관을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마도구, 높은 마력 등등의 방법으로 벗어날 수 있으나, 이곳에 있는 하급 악마들에겐 해당 되는 사항이 아니었다.

“그럼. 알고 있는 정보를 모조리 말하십시오.”

사이나가 가장 앞에 있는 악마를 향해 말했다. 연옥에서 나고 자랐다고 말한 겨울 나무를 연상시키는 흑갈색 피부를 가진 악마였다.

“어……. 그러니까 여기는 연옥의 남쪽으로…… 끝내주는 매음굴이 있는 걸로 유명하며…… 제 친한 친구로는 쿠리즈가 있는데. 그 놈은 통 씻지를 않아서 몸에 냄새가…… 가끔씩 아스타로트님이 분노하면 하늘에서 불의 비가 내리고…….”

사이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뱉는 정보는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그만.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십시오.”

“뭐, 뭐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사탄의 부활 의식이…….”

사이나는 10분에 걸쳐 하급 악마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정보를 얻어냈다.

요약하자면 현재 연옥에서 아스타로트의 주도하에 사탄 부활 의식이 진행되고 있다. 부활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정도지만 어디 까지나 추측에 불과하기에 부활 의식은 더 빠르게 끝날 수도 있고, 더 늦게 의식이 완료될 수도 있다.

사탄의 부활 의식에 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악마는 아무도 없었다. 사탄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들도 없었다.

하지만 의식이 어디에서 벌어지는 지, 의식 장소에 있는 100마리에 달하는 상급이상의 악마들과 서열을 가진 악마들. 여러 가지 도움이 되는 정보도 있었다.

“잘 알았습니다. 당신들은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만 그 쓸모없는 생명을 스스로 끊으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악마들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꿰뚫었다. 심장이 박살나며 그들의 몸이 땅바닥에 쓰러진다. 회복력이 특출나게 좋거나, 권능이 회복 쪽인 악마라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기에, 사이나는 죽지 않은 악마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사탄이라. 돌아버리겠네. 그거 원래 이렇게 빨리 나타나는 놈이었어?”

“그건 나도 몰라. 그리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않아?”

바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테드를 서둘로 연옥의 중심, 의식이 벌어지는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여기서 단순히 걸어간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그래서는 지나치게 늦다.

정보를 토해낸 악마의 말에 따르면 연옥에선 블링크를 포함한 공간계 마법 사용이 불가능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가능이라기보다는 제어가 되지 않는다. 실패율이 높으며 설령 운이 좋아 성공했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 마법으로 날아가는 수밖에 없지.”

이곳에서 여유롭게 머무를 이유는 없기에 테드는 곧장 마법을 발동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래에서 바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봤다.

“미리 말하는데 난 마법으로 못 날아. 설마 개처럼 뛰어오라고 명령할 생각은 아니지? 엉?”

“걱정 마십시오. 바알. 제가 당신을 데리고 날아가겠습니다.”

“아, 이 음란 메이드가?! 야! 목덜미 잡지마! 기분 나쁘거든! 개취급 하는것도 적당히 하라고! 잡을 거면 팔을 잡아!”

“좀 얌전히 있을 수는 없습니까? 놀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야, 야! 손에 힘들어간다? 존나 아프거든?! 목에 손톱 파고든다고!”

“…….”

“안 들리는 척 하지 마! 야, 야!”

⁂ ⁂ ⁂

“저건… 테드 크루시안이군. 어째서 여기에 있지? 마지막 보고로는 드래프리온에 있다더니…….”

안드라스는 남쪽의 새빨간 하늘에서 날아오는 테드를 보고서 낮게 중얼거렸다. 상급 악마 이상의 마력을 풀풀 풍겨대며 날아오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주위의 악마들이 술렁이고 사탄교도들이 제각각 전투자세를 취했다.

“후하하! 재밌는 놈이 왔잖아!”

바론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거슬린 안드라스는 미간을 좁히며 그를 노려봤다.

“바론! 설마 네놈이 정보를 흘러보낸 건 아니겠지?!”

“그 누명은 하나도 재미없어! 내가 왜 그딴 짓거리를 해야 하는데? 저놈은 제 스스로 찾아온 놈이야. 괜히 아스타로트가 조심하라고 한 놈인 줄 알아? 저 놈 뒤를 보라고, 바알까지 대동하고 있어. 진짜 어처구니없는 놈이지 후하하하.”

주름이 많은 안드라스의 얼굴이 구겨지며 더더욱 주름이 나타났다. 힘이 들어간 주름은 흉신악살로 변한다.

“뭐하고 있나, 악마들이여! 저 놈을 당장 죽여라!”

안드라스와 달리 주위에 있던 악마들은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료함이 이어지던 지루한 시간에 새로운 자극이 나타난 것이다.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 죽여도 되는 거야? 그럼 내가 가지!”

“바알이다! 약해진 바알이 있어! 내가 처치할 거야! 내가!”

“저 메이드년이 루시퍼의 딸년이라지? 갖고 싶어.”

악마들이 킬킬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마법이나 아이템을 이용해 하늘을 날았고, 누군가는 하늘을 향해 점프했으며, 누군가는 대지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십 몇 명의 악마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지켜봤다.

“……저 마법은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안드라스는 마녀 세르미나가 중얼거리는 말을 흘러듣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어떤 사탄교도와 악마보다도 마법에 빠삭한 세르미나의 말이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마녀라고 해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마녀여, 저건 어떤 마법이냐? 그렇게 위험하나?”

테드의 손에 청백색의 기운이 모여 있었다. 멀리서보면 빛으로 보이지만, 악마의 눈으로 확대해서 살피면 작은 입자같은 빛이 바람을 타고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글쎼. 처음 보는 마법이라 모르겠는 걸. 아마 비전 마법이겠지. 단지 여기까지 느껴지는 마력과 그걸 손이란 한정된 공간에 집약시킨 것을 보면 엄청나다는 것 정도는 쉽게 예상할 수 있어.”

“……바론도 그렇고 네년도 도움이 안 되는군!”

“너무 하잖아. 이쪽은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는데 말이야. 그래도 저 정도로는 댁들같은 강화된 악마들은….”

“내가 초조해 하는건 그게 아니다! 저 마법이 아스타로트님에게 미칠 영향이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마녀! 명령이다. 심장을 보호하는 배리어를 발동해라!”

“싫어.”

세르미나가 딱 잘라 말했다. 입가에는 비웃음을 담고서 안드라스를 쳐다봤다.

“내가 언제부터 댁의 부하가 된 거야? 금시초문인 걸?”

“이 빌어먹을 년이! 바론! 어떻게 해보아라!”

쪼그려 앉은 체로 실실 쪼개며 테드를 보고 있던 바론이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남은 소원이 딱 1개 남아서 말이야. 그걸 쓰면 나 저 여자한테 죽거든? 그러니 안 돼. 알아서해. 안드라스 양반.”

안드라스가 이를 갈았다.

“…이 쓰잘데기 없는 것들! 네 놈들은 반드시 지금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아, 마법 발동하나보다.”

⁂ ⁂ ⁂

“개떼처럼 모여 있구나.”

테드는 커다란 검은 심장의 주위에 모여 있는 사탄교도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악마를 보며 감상을 말했다.

심장이 고동칠 때마다 기분 나쁜 악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걸 파괴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 오른다.

“씨발. 개, 개 거리지 말라고.”

사이나에게 목덜미가 잡힌 채로 이곳까지 날아와 기분이 좋지 않은 바알의 말을 흘러 들으며 테드는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봤다. 청백색의 빛의 입자가 손안에서 압축되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고대 마법을 토대로 만든 비전 마법이다. 효과는 고대 마법에 필적한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마법사가 좋아하는 장면 중 베스트3 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어. 정말 기분 좋군.”

말과 달리 테드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법사가 좋아하는 장면 베스트 1은 고대 마법을 발견했을 때, 베스트 2는 희귀한 마도구나 마법재료를 발견했을 때다. 베스트 3는 적들이 범위마법 갈기기 좋도록 모여 있을 때다.

테드는 오른손을 내뻗었다. 손바닥 안에서 작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던 청백색의 입자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모아두는 것도 한계에 달했기에, 테드는 마법을 발동했다.

“죽기 딱 좋은 날이로군(It is a good day to die).”

청백색의 빛의 입자가 붉은 대지를 뒤덮었다.

============================ 작품 후기 ============================

요즘 입에 착 달라붙어서 매일 아침 말하고 있습니다.

잇 이즈 굳데이 투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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