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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검의 제단.
조시아는 깎아 자른 듯한 절벽의 위에서 피부를 베는 듯한 칼바람을 맞으며 아래를 내려 봤다.
바람을 등진 파도가 고막을 강타하는 큰소리와 함께 절벽에 원수라도 진 것 마냥 몰아쳤다.
이곳은 딥스크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절벽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다. 1년 내내 서릿발같은 바람이 불어서 마족은 물론이고 몬스터조차 꺼리는 곳이다.
“저 바다에 있는 게 확실해?”
익숙하면서도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시끄러운 바람 사이에서 들려왔다. 조시아는 강하게 부는 바람에 몸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돌아보았다.
레인저 특유의 활동하기 편한 레더 아머를 걸친 여성이 있었다. 진갈색의 가죽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슬림하면서도 굴곡진 몸매이며, 머리위에 양손을 올려 녹색의 페도라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잡고 있다. 그렇다 해도 가슴언저리 까지 내려오는 벌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파티의 뛰어난 엘프 레인저이자, 조시아가 일방적인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는 여성인 애냐였다.
“애냐! 네가 여기 까지 올 필요는 없었는데. 위험하기도 하고.”
“이런 위험한 곳에 마도사 혼자 온건 괜찮고?”
“…윽. 그건….”
애냐가 푸른색의 눈동자를 날카롭게 만들며 말했다. 조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츠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도한 여성이었으며, 지금도 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 차가워 보이는 태도 속에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걸 파티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도 조시아가 걱정되어 따라 온 것이다. 조시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에선 대화 주제를 옮기는 게 낫다.
“고대 유물이라면 저 바다에 있는게 확신할… 수 있다고는 못하겠네.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여기까지 오기전까지 들린 6개의 장소에는 보물이 있긴 했지만, 그들이 찾는 고대 유물과 ‘제단’은 없었다. 제단에 대한 단서도 없었다. 만약 이곳이 제단이 아니라면 고대 유물도 없을 것이다.
“흐음.”
애냐는 천천히 바람 속을 걸었다. 폭풍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 산책이라도 나온 것 마냥 여유롭게 걷는 것은 그녀가 뛰어난 레인저이기 때문이리라.
1분도 걸리지 않아 조시아의 옆으로 다가온 그녀는 절벽을 쳐다봤다.
“어제보다 바람이 덜하네. 파도도 높지 않고.”
조슈아는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이곳은 조슈아로선 감히 절벽에 서지 못할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높은 절벽위에 까지 바닷물이 튀고, 뛰어난 검사인 카반과 베테랑 레인저 애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심했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이런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다고 이 근처에서 활동하는 모험가에게 들은 적이 있어.”
“그 말은….”
“지금 바다 속으로 들어갈 거야.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그러니 애냐. 카반과 이리샤를 불러주지 않을래? 나는 여기서 마법을 준비해야해.”
“알았어. 모두를 불러올게. 하지만…….”
애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눈으로 끊임없이 철썩이고 있는 바다를 쳐다봤다. 우중충한 하늘 탓인지 바다가 시커멓게 보였다.
“뭔가 불길한걸.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겠지만.”
“애냐.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드문일이네. 2년 전의 데스 리치의 던전을 공략할 때 이후 처음 아니야?”
“……너. 그런 걸 잘도 기억하고 있구나?”
조금 어이 없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의 말에 조시아는 몸을 흠칫거렸다. 조시아는 관심있는 여성의 기억을 떠올려 무심코 말한 것뿐이지만, 애냐의 입장에선 스토커같은 걸로 비추어 졌을지도 모른다.
“그, 그건. 애냐가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으니까 기억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그래?”
“그렇고말고. 그리고 애냐의 감은 맞지 않기로 유명하잖아? 그때의 데스 리치의 던전도 순탄하게 공략을 성공했고.”
“정령을 다루는 엘프이면서 평범한 검사인 카반과 다르게 감이 나빠서 미안하네요.”
“아, 아니. 그렇게 말한 기억은…!”
조시아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녀가 몸을 돌려 떠나가기 시작했다. 절벽을 훑는 차가운 바람보다 더 차가운 반응에 조시아는 울상을 지었다.
수없이 많은 마법사 중에서 극소수만이 올라선다는 마도사의 경지에 이른 그는 여자의 마음을 아는 것이 서툴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조시아는 자신의 머리를 싸메고 좋아하는 엘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 했다.
애냐와 함께 다닌 지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 흔한 썸이라는 것도 타지 못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애냐가 남성에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연애에 흥미를 보이지 않으니 여성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순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냥 확 고백해버려?!”
호기롭게 외치던 조시아는 곧바로 냉정을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풋내기 시절에 애냐에게 고백한 적 있었고 차였다. 그 이후 한 동안 어색하게 지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는 함께 모험을 하면서 어찌저찌 관계를 회복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애냐가 파티에서 탈퇴하거나 모험가를 은퇴할 수도 있다. 최근 동료들간의 대화에서 은퇴에 관한 주제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 가능성은 상당히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카반에게 물어볼… 아니! 카반은 안 돼. 보나마나 그냥 덮쳐버리라고 말할게 뻔하니까!”
조시아의 고민은 애냐가 카반과 이리샤를 끌고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애냐는 이상한 놈을 보듯이 조시아를 보며 물었다.
“머리를 붙잡고 뭐하는 거야? 준비는 다 된거야?”
파티 리더인 카반은 신관복을 입은 군청색 쇼트머리의 마족 여인, 이리샤의 손을 꼭 붙잡고 조시아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커플의 모습에 조시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준비. 조, 조금만 기다려.”
조시아는 뒤늦게 떠올리고서 아공간을 열어 자신의 스태프와 마법 시약을 꺼냈다. 그리고 황급히 시약을 바닥에 뿌리며 발아래에 마법진을 그린다.
“조시아 녀석. 평소에는 철저하면서 가끔씩 덜렁거린다 말이야.”
카반이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히죽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못써!”
곁에 있던 이리샤가 잠짓 화난 듯 말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애인과 똑같은 웃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애냐는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돼, 됐다. 이걸로 바다 속으로 갈 수 있어. 모두 준비는 됐지?”
“준비가 가장 늦은건 너잖아.”
카반의 타박에 조시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마법을 발동했다. 지면에서 투명한 거품같은 생긴 막이 그들의 발에 달라붙어 몸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주 약간 몸이 근질근질 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
바다의 가호라는 비전 마법이다. 조시아가 이곳에 오기직전 벼락치기로 막대한 돈과 마법적 지식을 지불하고 배운 마법이었다. 원래는 몇 개월간 연습해야하는 마법이지만, 특수한 마법 시약을 이용해 성공케 만들었다.
효과는 물리, 마법 피해의 감소와 바다 안에서도 지상에 있는것처럼 숨 쉴 수 있으며, 물의 저항을 엄청나게 낮추어 준다. 단점은 마법이 지속되는 동안 말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바다를 탐험하기 위한, 또는 바다속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투명한 막에 감싸인 그들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카반이 이리샤의 몸을 안고서 망설임 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어두운 바다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조시아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살짝 주저하고 있자니, 애냐가 그의 팔을 붙잡고 뛰어내렸다. 조시아가 숨을 들이키며 애냐를 쳐다봤다. 애냐의 얼굴엔 모종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바다 속을 모험하는 것은 처음이니 떨리는 것 일터다.
깊은 바다속에서 카반과 재회한 그들은 레인저인 애냐의 등을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란한 바다의 밖과는 다르게 바다속은 조용했다. 해류가 상당히 빠르긴 했지만, 바다의 가호라는 마법 덕분에 해류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파티 일행은 제각각 신기하다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엘프 레인저의 등을 쫓았다.
그렇게 1시간 정도 바다속을 헤엄쳤을 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다 깊은 곳에 있는 고대 유적으로 보이는, 어딘가 신전같은 건축물이 보였다. 바다 깊은 곳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뽐내듯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신전의 주위에 투명한 막같은 것이 있어 바닷물이 들어서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일행은 신전쪽으로 걸어갔다. 투명한 막에 막힐 줄 알았으나, 그들의 몸은 조금의 저항도 없이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지상과 같은 것임을 파악하고 마법을 해체했다.
“뭐야, 이거! 바다속에 있는 던전이라니! 대박이잖아!”
카반이 기쁨에 못이겨 소리쳤다. 다른 일행들도 어딘가 들떠있는 분위기였지만, 카반처럼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카반. 여긴 알려지지 않은 고대 유적이야. 어떤 몬스터가 있을지 몰라.”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잖아? 바다 속의 고대 유적을 찾은 모험가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처음이니까!”
“그건 그렇지.”
주의를 주던 조시아가 싱글싱글 웃었다. 그래. 카반의 말대로 역사상 처음이다. 이 모험이 알려진다면 그들은 모험왕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을 것이다.
“……아름다워.”
조시아는 애냐의 작은 목소리에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천장에는 흐르고 있는 푸른색의 바다가 보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바다 밖이 전혀 연상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광경이었다. 주위에 있는 물고기 떼는 밤하늘의 별 같았다.
“애냐! 뭘 감상에 젖어 있는 거야? 모험을 해야지! 레인저인 네 차례야!”
“네 경박한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커서 짜증나는걸. 분위기란걸 모르는 거야?”
애냐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장비를 확인하고 일행들의 앞에 섰다. 탐색능력이 뛰어난 그녀는 검사인 카반의 바로 앞에서 파티를 이끌었다.
파티는 신전의 내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신전 밖에는 아무런 함정이 없었다.
“이건… 검?”
애냐는 신전 내부 벽에 장식되어 있는 각양각색의 특징을 지닌 검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보면 벽에 붙어 있는게 아니라 허공에 스스로 떠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천장에도 검이 있어.”
이리샤의 말에 모두가 위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말대로 검날을 아래로 향한 채 검이 떠있었다. 카반이 가지고 있는 이름 있는 드워프가 혼신을 다해 만든 검이 평범해 보일 정도로 하나, 하나가 범상치 않은 검들이었다.
조시아는 검날이 아래로 떨어져 몸을 꿰뚫는 광경을 상상하고 저도 모르게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시아! 저 검들 가져 갈 수 있을까? 마법 함정 같은거 없지? 일단 한 번 감정해봐.”
카반의 재촉하는 말을 들으면서 조시아는 가지고 있는 감정 스킬을 발동했다. 그도 검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가까운 벽에 있는 검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감정이 먹히지 않아?!”
스킬의 숙련도가 낮아 감정할 수 없다는 시스템 알림창에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건… 엄청난 보물이라는 뜻이잖아?!”
카반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과거에도 조시아의 감정이 먹히지 않는 보물을 얻은 적이 있었다. 모험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팔아치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은퇴하게 된 계기이기 도 했으니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저 검들은 어때?!”
“마찬가지야… 감정할 수 없어. …잠깐. 검 하나를 감정하는데 성공했어. 성마검…?”
조시아가 알림창에 떠오른 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성마검이라고라?!!!”
“시끄러, 카반!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카반의 고함에 참다 못한 애냐가 그의 뒤통수를 한 대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반의 두 눈은 타오르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 들었어! 성마검! 전설속에 나오는 검! 사용자의 뜻에 따라 최상급의 성검과 마검으로 바뀌는 검!”
설명하면서도 카반은 성마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행들이 말리기도 전에 검신이 흑백으로 이루어진 검을 향해 손을 뻗었고, 즉시 몸이 튕겨나갔다.
“카반!”
이리샤가 카반에게 달려갔다. 카반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으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멋대로 가져갈 순 없는 모양이네.”
애냐가 내정히 말했고, 조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지금까지 해온 모험에는 항상 고생 뒤에 보물을 얻을 수 있었다. 손쉽게 가져갈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일어나, 카반. 파티 리더답게 행동해. 전설의 검에 홀려 무작정 다가가다니… 어린아이도 아니고, 왜 그래?”
애냐의 냉소를 받으며 카반은 일어났다. 멋쩍은 웃음에는 더 이상의 흥분은 없었다. 방금의 충격이 그에게 냉정함을 되찾아 주었다.
“…미안. 꿈에도 그리던 전설의 검에 흥분하고 말았어.”
“네가 죽기 전에 정신을 되잡아서 다행이야.”
“가차 없이 말하네. 함정은 없어?”
뛰어난 레인저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함정의 파악은 신전에 들어선 순간 끝냈으니, 단순한 확인 작업이었다.
“적어도 이 주위에는. 여긴 던전과 다르게 신전이니 아마도 신전 안쪽에도 함정은 없겠지. 몬스터의 기척이나 흔적도 보이지 않아.”
“조금 긴장을 풀어도 되겠네.”
파티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았을 때도 그다지 크지 않은 신전이었기에 곧바로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붉은색의 화려한 왕좌가 있었다.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바닥에 내려올 정도로 길다란 백금색 머리카락의 인간 여성… 아니, 소녀였다.
소녀는 기품이 느껴지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손에는 팔목을 감싸는 장갑을, 목에는 검과 닮아 있는 은색 십자 모양의 목걸이가 있으며, 백금색 머리 위에는 창은으로 빛나는 티아라가 있었다.
두 눈을 감고 왕좌에 기대듯이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가련하기 짝이 없어서 일행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공주님?”
카반이 가장 먼저 첫인상을 말했고, 파티원들은 저도 모르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소녀는 그림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공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저 모습은 공주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았다.
한동안 왕좌에 앉은 소녀를 쳐다보던 애냐가 말문을 열었다.
“……검의 공주.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야. 저 공주님이 카반, 너의 천족 친구가 말했던 고대 유물… 즉, ‘고대 병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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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고대 병기를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