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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236화 (23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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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탄의 자식들.

“……멈춰라.”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던 핏방울이 그대로 멈췄다.

멈춘 시간 속에서 테드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에 맺힌 핏방울을 닦아냈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레온의 말을 생각했다.

이미 이어졌다. 그 말을 짐작하는 것은 쉬웠다. 그레온의 손에 들린 밀짚인형, 저주의 용도로 자주 사용하는 그 물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저주 인형. 그건 제법 유명한 저주 주술의 일종이다. 여러 가지 조건을 클리어하면 밀짚인형을 통해 저주 대상을 괴롭힐 수 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건 저주 인형은 어디까지나 괴롭히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터질 정도의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확실히. 무언가 이어져 있군.”

테드의 눈에 인형과 자신의 몸사이에 이어져 있는 길이 보였다. 신기한 점은 이 통로가 순수한 자연의 마나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자연이나 다를바 없기 때문에 위광이 막지 않았다.

아마도 처음의 고통 교환이란 주술도 이 통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성가시게.”

시간이 멈춰진 지금 이 통로를 잘라낼 수단은 없었다.

테드는 그레온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바로 서서 주먹을 쥐고 휘둘렀다.

테드의 주먹이 그레온을 난타한다. 주먹이 딱딱한 그레온의 몸에 닿을 때마다 퍽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드의 주먹이 닿은 부위가 일시적으로 시간 정지에서 풀려나며 나는 소리였다.

정확하게 100번을 때린 테드가 아릿한 주먹을 내리고 그레온의 등 뒤로 움직였다.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꽂아 넣고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며 폼을 잡는다. 전투 중에 뭐하는 짓이냐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본능이다.

“그리고 시간은 움직인다.”

“크아아아아악!”

그레온의 비명이 울렸다. 그의 입장에선 갑작스런 충격이 온몸에 덮쳐온 꼴이었다. 테드는 꾸준히 신체를 단련해오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하지 않았더라도 주먹 100대를 일시에 맞으면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레온의 신체능력이 서열 32위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것도 한몫했다. 바알이었다면 통하지도 않았을 공격이었다.

테드는 뒤로 날아오는 그레온의 뒤통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충격강화 마법까지 사용해서 가격한다.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그레온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만약 그의 종족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절명했을 것이다.

테드는 자신의 몸과 이어져 있는 통로를 마력으로 없애며 바닥에 떨어진 브류나크를 주워들었다. 소유권은 다시 돌아왔고 그대로 브류나크를 없앴다.

“너 사이나보다 약하잖아. 어떻게 서열 32위를 얻은 거지?”

엎어진 그레온은 바닥에 양손을 짚고 일어났다. 입가에 있는 것은 언제나의 여유로운 웃음이다.

“네 말대로 내 신체능력은 서열에 비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아마 신체능력만은 서열을 가진 악마들 중에서 최약이라 할 수 있지.”

곧게 허리를 피던 그레온의 몸이 흔들렸다. 후두부를 강타당한 것의 데미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정지인가. 골치 아프네. 그 능력이면 바알이 질만도 하지.”

테드의 시간 정지 능력은 권능 덕분에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문제는 알고 있어도 대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발동하는데 필요한 특별한 조건도 없어 보인다. 다만 시간이 멈춘 상태에선 마법 등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지금 눈치 챘다. 마법 사용이 가능했다면 데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으리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묻자. 너희들의 계획은, 사탄의 심장은 뭐냐?”

“이거 참…. 어이가 없네. 그렇게 무게 잡고 물으면 내가 가르쳐줄 것 같아?”

“바알에게 들었다. 사탄교의 악마들에겐 동료애 따윈 없고. 중간계에 소환되는 조건으로 사탄교에 협력하는 거라고.”

“……망할년이 있는 말, 없는 말 다 떠들어 댔군. 네 말대로야. 동료애 같은 농돔거리도 되지 않는 감정따윈 악마들에겐 없어.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인간 놈 따위에게 주저리 떠드는 건 역시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레온이 바지 주머니에서 하얀색 천조각을 꺼냈다. 하얀색 바탕에 3개의 형형색색 동물들이 자수되어 있는 고급스런 손수건이었다.

동물은 파란색의 매와 닮은 새와 샤벨타이거의 이빨을 가진 붉은색의 코뿔소. 마지막은 꼬리의 자리에 두 번째 머리가 있는 길쭉한 녹색의 뱀이다.

“넌 날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를 놓쳤어.”

그레온이 말하면서 손수건을 흔들었다. 손수건의 동물 자수에서 빛이 청, 적, 녹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한데 섞인 빛은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테드가 오른손을 들었다. 배리어가 발동되고 허공에서 나타난 검은 쇠사슬이 배리어에 부딪혀 힘을 잃고 늘어지더니 사라졌다.

시선을 끌고 사각에서 공격하는 전형적인 속임수 공격이었다. 주위 공간의 마나의 흐름을 완벽하게 느끼고 있는 테드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레온은 적어도 마법이 아니라 주술로 공격해야했다.

그레온은 변덕의 심한 성격이라고 들었다. 동시에 입도 가볍기에 사탄의 심장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그레온은 입이 가볍지 않았다.

“널 죽일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지금도.”

테드의 오른손바닥 위에 전기가 치솟았다. 전기를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손바닥 위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압축하기 시작한다.

대단한 마법은 아니다. 뇌전 계열의 하급인 라이트닝(Lightning)을 여러개 사용해 뭉쳤을 뿐이다. 그러나 압축한 만큼 한 번에 터지는 공격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바람을 부리는 새.”

작게 말한 그레온이 손수건을 흔들었다. 손수건에서 흘러나오던 푸른색의 빛이 한곳에 모여 새의 형상을 이루었다. 커다란 매를 닮은 새는 곧바로 테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령? 아니, 정령은 아니군.”

느껴지는 기운이 정령의 것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순수한 마나에 가까웠다.

테드가 다크 체인을 발동했다.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져 있다만 다크 체인은 최악의 상성이었다. 닿는 것만으로 사라지리라. 그러나 새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다크 체인을 몸을 옆으로 기우는 것으로 가볍게 피해냈다.

빛으로 이루어진 새는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것처럼 허공을 날고 있었다.

테드는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새를 피하지 않았다. 부딪히기 직전 새는 청색의 돌풍으로 변했다. 테드의 몸을 강타하지만 위광이 있는 테드에게 유효한 데미지는 전혀 없었다.

“소용없다. 이 정도론 위광을 뚫지 못해.”

“대지를 흔드는 소.”

그레온이 흔들었다. 이번엔 붉은 빛으로 이루어진 코뿔소가 나타났다. 코뿔소는 새와 마찬가지로 달려들었다.

데트다 손을 저었다. 허공에 나타난 13개의 검은 사슬이 코뿔소를 향해 뻗어갔다. 쇠사슬이 닿기 일보직전 청광의 바람이 코뿔소를 감쌌다. 코뿔소가 사라졌다.

쾅! 테드의 등뒤에서 거대한 소리가 흔들렸다. 테드가 한 발작 앞으로 밀려났다. 그레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눈동자를 굴려 뒤를 확인한다. 앞발로 땅을 다지고 있는 코뿔소가 보였다.

그래봤자 위광을 뚫기에는 위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독을 삼키는 뱀.”

테드는 자신이 내딛고 서있는 지면이 갑자기 물렁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바닥이 무수히 많은 녹색의 빛으로 이루어진 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녹색의 뱀이 독니를 박아대기 전에 테드가 오른손을 땅으로 향했다. 번개가 터지며 녹색 뱀들의 몸을 타고 이동했다. 뱀은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신기하긴 하지만 약하군.”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내 주술 쇼는 이제 시작이야.”

그레온이 손에들고 있는 손수건을 놓았다. 손수건은 하얀 빛을 내며 산화되어 사라졌다.

동시에 공간이 일렁거렸다. 테드의 사방에서 청색의 새와 적색의 소, 녹색의 뱀이 수 십마리가 달려들었다.

“일종의 결계군.”

“그거 알고 있나? 마법의 결계는 원래 주술 쪽에서 온 것을. 결계에 한해서 주술 쪽이 역사가 깊어.”

“그랬나? 주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테드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난다. 결계를 공략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익스플로전.”

처음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음 폭발이 일어난다. 총 20번이 넘는 연쇄폭발은 결계를 부수기에 합당했다.

그레온은 결계는 물론이고 주변의 건물까지 완전히 박살난 것을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사이나와 바알의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병사들의 시선이 모인다. 그는 반사적으로 권능을 발동했고 전장의 상황을 손쉽게 알 수 있었다.

현재 이 도시에 남은 데비크는 굉장히 적었다. 지금도 병사들에게 심장이 파괴되어 죽어가고 있다. 그것들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다.

“여기까지다. 그레온. 혹여나 도망칠 생각이면 버려라. 텔레포트에 대한 대비는 이미 끝났으니.”

테드의 말과 함께 공중에 마법진이 나타난다.

그레온은 단숨에 마법진을 파악했다. 뇌전 계열의 대마법인 ‘기가 썬더볼트(Giga Thunderbolt)’다. 범위는 좁은 대신 파괴력만큼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제 아무리 그레온이라도 저것을 정통으로 맞으면 치명상이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오면 내가 포기할 줄 알았나?”

빠득하고 그레온의 입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입밖으로 삐져나온 검은색 구슬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건… 아까 돼지 놈이 먹었던!”

“아직 시제품이라 정식 이름은 없는 물건이지. 효과는 말했지? 권능에 대한 내성과 신체 능력의 증폭. 베인 녀석은 정신력이 약해서 이성을 잃어버리지만, 나 정도 되면 그런 부작용은 없어.”

그레온의 몸이 붉어진다. 베인은 피부위로 혈관이 튀어오르고 혈관이 터졌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베인의 몸이 형편없어서 벌어진 부작용에 불과했다.

베인의 단련이라곤 조금도 되지 않은 몸이 거대한 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죽지 않은 것은 ‘검은 약’이 힘과 함께 말도 안되는 회복력을 동시에 주었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다. 그렇게 판단한 테드가 시간을 멈췄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손에 쥔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놈의 목을 긋는다.

폭발의 여파로 썩 좋지 않게 변한 바닥을 걸어 그레온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드러난 목에 유리 조각을 가져다 대어 있는 힘껏 그었다.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럼 적어도 눈이라도 가져가자.

유리 조각이 그레온의 두 눈알에 닿으려는 순간, 그레온의 손이 테드의 팔을 움켜졌다. 테드가 놀라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방금 말했잖아. 권능에 대한 내성을 준다고. 멈춰진 시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을지는 반신반의 했거든? 근데 이번 행운은 날 선택한 모양이야.”

그레온의 주먹이 테드의 복부를 강타한다. 데미지는 없었다. 강력해진 신체능력으로도 위광을 뚫지 못했다. 허나 그레온은 포기하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리 단단한 돌덩이라도 언젠가 부서지리라.

“……한 가지 묻자. 그 검은 구슬을 미리 입안에 넣고 있었다는 건.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도시 밖에 망할 놈들이 포위하고 있는데 나도 준비 정돈 해둬야지.”

“웃기는 소리. 네가 그들을 두려워 할 이유는 없다. 미카엘라냐?”

“그년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테드가 시간을 풀었다. 말해줄 생각이 없다면 더 이상의 문답은 불필요하다.

“기가 썬더 볼트!”

마법진으로부터 거대한 번개가 테드와 그레온을 향해 떨어진다.

하늘을 찟는듯한 굉음이 도시 전역에 울렸다. 몇몇 병사는 두려움을 느끼며 귀를 막았고, 몇몇 병사는 깜짝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모두가 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줄기의 새하얀 번개를.

새하얗게 빛나는 시야 속에서 테드는 그레온을 노려봤다.

그레온의 비명도 하얀 번개 속에 파묻힌다.

번개는 테드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다. 테드가 마법 시전자가 아니라 위광의 방어력이 완전히 번개를 막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위광의 내구도를 깎이는 것 까진 막을 순 없다. 내구도는 대략 절반 정도 남았다.

냉정하게 판단하면서 그레온을 본다. 이윽고 번개가 그치고 까맣게 변한 그레온의 몸에서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죽었나?”

오른팔을 흔들자,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그레온의 팔이 맥없이 떨어졌다.

테드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에너지 블레이드를 손안에 일으켰다. 저 목을 완전히 베어버릴 생각으로 휘두른다. 그러나 에너지 블레이드는 절반을 베어내고 멈추었다.

돌덩어리도 간단히 절삭해버리는 테드의 에너지 블레이드가 그레온의 목을 완전히 베어내지 못했다. 테드가 에너지 블레이드를 뒤로 뺐다. 그리고 확실하게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다시 휘두른다.

그레온의 몸에서 악기(惡氣)가 폭증했다.

오싹한 무언가를 느낀 테드는 블링크를 이용해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직감이 경고를 보냈다. 그대로 있었다면 당했을 거라고.

“아아…!!”

그레온이 소리를 질렀다. 절반이상 베어진 목은 어느새 재생되어 있었다.

“아아아아아!!”

그레온의 울부짖음에는 황홀함이 담겨 있었다. 더러운 쾌락과 욕망이 끈적거리는 것 같았다. 악기가 공간을 침식한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레온을 쳐다봤다. 그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두려움의 근원을 무의식적으로 찾았고, 알수 없는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한체 그저 지켜봤다.

“기분 좋은데…!!!”

그레온이 외쳤다.

그레온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등에서 검은색의 박쥐같은 날개가 돋아났다. 검게 그을린 몸이 점점 커진다. 날개가 한 차례 파닥거리자 몸에 붙은 그을림이 사라지고 광택이 도는 붉은색 피부가 드러났다.

그의 탁한 금발 속에서 검은색의 거대한 뿔이 돋아난다. 작았던 그것은 순식간에 커진다. 총 6개의 뿔은 제각각 손바닥만한 크기를 가졌다. 눈의 흰자가 검은색으로 변하고 입술이 찢어지며 송곳니가 늘어난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악마의 모습 그 자체.

그레온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폐허나 다름 없는 도시를 한 차례 둘러본다.

살아남은 데비크가 그레온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고, 병사들이 두려움에 가득찬 시선으로쳐다 보는 게 느껴졌다.

“시험하기 딱 좋은 버러지들이 모여 있구나!”

============================ 작품 후기 ============================

날벌레 그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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