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30. 사탄의 자식들.
프리티스 제국측에서 마련한 3번째 회담 장소에는 펠리스 왕국을 제외한 각국의 대표자와 그 호위를 포함해 30명이 넘는 인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공기의 무거움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었다. 입을 함부로 열 수 없었다. 손을 드는 간단한 행위조차 힘겨웠다. 육체가 공기라는 흙에 파묻혀 있는 것 같았다.
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한명이었다. 대표자만이 앉을 수 있는 회담 중앙에 놓인 원탁의 중심에 하늘을 연상케 하는 청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총 9개의 자리는 원탁이라 상석을 구분하기 힘들었으나, 이 공간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이곳에 모인 자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격이란 게 다르다는 것을. 그녀의 앞에서 자신들은 벌레에 불과했다.
그녀, 미카엘라는 프리티스 제국에 기록되어 있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창공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구름처럼 새하얀 피부. 너무 붉지도, 탁하지도 않은 생기 있는 분홍빛의 입술. 자애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선을 그리고 있는 눈매와 코는 완벽했다.
기록에는 머리 위에는 황금빛으로 발하는 링과 등에는 12장의 하얀 날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 그녀에겐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나, 기록은 사실이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처음 그녀가 회담 장소에 드러났을 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절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싶어지는 성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가 비어있는 맞은편 자리를 보며 천천히 붙어 있는 입을 열었다.
“……많이 늦는군요.”
너무나 또렷하고 맑아서 도리어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는 듯 한 청아한 목소리였다.
회담 장소에 모여 있던 자들은 일제히 미카엘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 아름다운 입술을 타고 나온 두 단어에는 어떤 숨은 뜻이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미카엘라의 말에는 숨은 뜻 따윈 없었다. 그녀는 그저 적막한 상황, 자신의 눈치만 보고 있는 이 불편한 상황에서 분위기라도 바꿔 볼까하는 심정으로 말했을 뿐이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아주 조금 그녀는 내심 낙담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권능과 관련이 있는 성스러운 기운을 알고 있었다. 같은 천사들도 주눅들게 만드는 기운이었다. 링과 날개를 숨겼음에도 이 정도다.
천계에서 천사들을 상대할 때는 적절하게 이용해왔다. 그러나 중간계의 생물은 그녀의 생각보다 약했다. 최대한 숨겼는데도 이 정도의 반응이었다. 제대로 마음먹고 힘을 발휘한다면 아마 그들은 숨 쉬는 것은 둘째 치고 정신을 붙잡는 것도 힘들 것이리라.
“그… 미카엘라 님…. 제가 당장 확인해보겠습니다!”
목소리가 나온 곳은 대표자들이 앉아 있는 원탁이 아니라, 원탁과 조금 떨어져 비교적 조잡한 의자에 앉아 있는 동행자들의 무리였다.
한 눈에 봐도 지나치게 긴장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하는 천족의 남자였다. 그는 미카엘라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따라온 오익(五翼)급의 성기사였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곧 올 것 같으니까요.”
방금까지의 말은 어디까지나 그냥 해본 말에 불과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시간에 늦었다면 미카엘라도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바알을 쓰러뜨린 테드 크루시안이란 자를 데려온다는 명목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주위의 분위기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면 말이다.
“…예, 예! 알겠습니다!”
지나치게 우렁찬 성기사의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회담의 분위기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미카엘라 입장에선 이편이 좋긴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론 실망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동안 중간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러면 발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회담이 시작되기로 한 시간으로부터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굳게 닫혀진 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사방이 조용했기에 커다란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내부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두 명의 인간족 남성이었다. 여기에 있는 인물들 대부분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중후반의 나이인데 반해 들어온 인물들은 20대로 굉장히 젊어보였다.
회담에 있는 인물들은 두 명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한 명은 첫 번째와 두 번째 회담에서도 펠리스 왕국의 대표로 참가한 톨드 프라임 후작이다. 실상은 가명이고 정체는 펠리스의 집행관 중 한 명인 애쉬지만 여기서 그걸 알고 있는 이는 적었다.
다른 한 명은 테드 크루시안이다. 여기에 있는 자들은 제각각 모국의 왕이나 대통령에게 들어서 그의 이름과 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미카엘라를 제외하고 가장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다.
테드는 자연스럽게 원탁으로 다가가 비어있는 장소에 앉았다. 모두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국왕 대리인 애쉬가 원탁에 앉으리라 생각했으리라. 애쉬는 회담의 뒤쪽 아무 비어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최대한 빨리 왔습니다만, 현실은 마음처럼 되진 않네요.”
테드는 정면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청백색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시선을 교환한다.
‘저게 바알이 말한 미카엘라인가.’
바알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바알이 활활 타오르는 불이라면 미카엘라는 날카롭고 투명한 얼음을 떠올리게 하는 첫인상이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주권결정전에서 광폭의 마왕 바알을 죽였다죠?”
화면을 통해 보고 있던 대표자들은 테드가 바알의 목을 조르고 바알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까지 확인했다. 테드의 생사는 몰라도 바알의 죽음은 두 눈으로 봤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따. 그 의심 많은 라이거조차 바알의 죽음은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고 테드는 애쉬에게 들었다.
테드는 최고 천사인 그녀가 인간에 불과한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에 놀라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아셨나요?”
그녀가 있는 곳을 떠올리면 십중팔구 프리티스 제국의 황제, 모든 천족의 왕인 천왕이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천왕에게서 들었어요. 저는 바알을 동등하게 상대한 당신에게 아주 관심이 많아요. 괜찮다면 바알을 상대할 때 펼친 마법을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미카엘라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시니 영광이네요. 하지만 마법사의 마법은 함부로 공개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특히나 그건 고대 마법이라서요.”
주권결정전에서 라그나로크를 선보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바알을 죽이기 위해선 라그나로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알과 동급인 미카엘라 또한 라그나로크 정도가 아니면 통하지 않을 것이다. 미카엘라에겐 최대한 라그나로크에 대해서 숨기고 싶었다.
“고대 마법… 그렇군요. 저도 마법사가 얼마나 마법을 중요시 어기는지는 들어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지금 네메스 대륙은 사탄교의 악마들에게 위험을 받고 있는 상황이에요. 테드 씨의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안다면 사탄교에 대한 대비도 할 수 있겠죠. 또 다른 마법사에게 알린다면 전력도 증가할 수 있고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 그렇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테드 님의 힘이 꼭 필요합니다!”
“테드 님의 고대 마법의 자세한 효과를 안다면 사탄교를 상대할 전략을 짜는 것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미카엘라가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견을 표했다. 테드는 무심코 혀를 찰 뻔했다.
미카엘라야 바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마법을 경계하는 것이니 최대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것이었고, 주위에 있는 자들은 고대 마법이란 미끼에 물려서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여기서 고대 마법을 감추려 한다면 사탄교를 핑계로 비난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테드 혼자라면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했을 거다. 그러나 테드는 현재 펠리스 왕국의 대표로서 이곳에 왔다. 펠리스 왕국에 피해가 가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가르쳐 드리죠. 부디 사탄교를 상대할 때 도움이 되었으면 하네요. 일단은….”
테드가 아공간을 열어 하나의 종이를 꺼냈다. 검은색 선으로 라그나로크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알고 싶다면 기꺼이 가르쳐 주리라. 그 이면에는 어떤 뛰어난 마법사라도 라그나로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우선적으로 영력의 존재 유무다. 여기서부터 거의 불가능해지고, 제법 많은 양의 영력을 다루어야 한다는 조건 또한 붙는다. 덤으로 대마도사 정도로 깊은 마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미카엘라 님께서 알고 싶은 고대 마법은 라그나로크겠죠?”
“라그나… 로크요?”
그녀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왕 폐하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알고 계시겠죠. 주권결정전의 무대를 태우는 하얀 불꽃을요. 그 백염이 라그나로크죠. 제가 바알을 상대할 수 있었던 마법이죠.”
“악마 중에서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광폭의 마왕을 상대했다면 다른 악마들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테죠. 라그나로크라는 마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요.”
“라그나로크는 발동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일단 한 번 발동하면 저도 제어가 불가능하죠. 범위는 조절할 수 있지만… 최대한 적은 범위로 발동해도 작은 산하나 정도 크기죠.”
거짓말이었다. 완벽하게 컨트롤 한다면 범위는 그보다 더욱 좁힐 수 있었다.
“최대로 발동한다면… 그 크기는 어느 정도 되나요?”
“제가 사용했을 때 주권결정전의 무대를 뒤덮었죠. 딱 그 정도에요. 상당히 넓죠. 그리고 라그나로크는 문제점이 있어요. 한 번 사용하면 저도 하얀 불길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이죠. 라그나로크는 공간마저 태우는 불길이에요. 주권결정전에선 다른 차원이었기에 사용할 수 있었죠. 아마 제가 네메스 대륙에서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시면 돼요. 악마에게서 네메스 대륙을 구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도리어 네메스 대륙을 파괴해버리면 말이 안 되잖아요? 솔직히 이 마법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거에요.”
테드의 말을 듣고 경악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는 자들이 있는 반면에 눈에 이채가 서린 자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후자 쪽이 더욱 많았다.
미카엘라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가져가도 될까요? 연구를 해본다면 마법을 개량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테드는 비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라그나로크를 개량한다고? 다른 고대 마법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난이도를 자랑하는 라그나로크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것을 개량 한다는 말은 당치도 않았다.
차라리 본심인 라그나로크의 파훼법을 찾기 위한 연구라고 말하지 그래?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장난을 쳐둔다. 종이를 들어 올리면서 시선이 가려진 사이에 아주 은밀한 마법을 사용해 마법진의 작은 일부를 바꿨다.
미카엘라와 가까이 있었다면 들켰을 지도 모르지만 원탁은 의외로 커서 그녀와 자신과 6M 이상의 거리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종이를 내어줄 것 같던 테드가 돌연 행동을 멈추었다.
“아, 그런데. 이건 제 밑천이나 다름없는 것이라서요. 거기다 이건 고대 마법에 대한 정보이니 천금만금을 줘도 못 구할 물건이죠. 물론 네메스 대륙이 위험한 현 상황에서 돈을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 네메스 대륙을 위해서라면 이깟 마법 하나 정도는 당연히 제공할 수 있죠.”
“……테드 씨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나요? 이 마법은 테드 씨의 재산이기도 하니 당연히 대가를 지불해야겠지요. 여러분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
미카엘라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에서 고대 마법의 위력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없었다. 그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메스 대륙이 위험한데 막대한 대가를 바랄 순 없죠. 그냥 별거 아니고 미카엘라 님이 제 질문 몇 가지를 대답해주시면 되요. 아. 5가지… 아니, 3가지면 되겠네요.”
미카엘라는 테드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테드가 선뜻 라그나로크의 마법진을 내주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차라리 재물이나 보물 같은 걸 원했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질문이라니?
“어떤 질문이죠? 사적인 질문이라면 후에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질문해 드리지요.”
“사적인 질문은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 상황에선 공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좋아요. 최대한 성심성의껏 질문에 답해드리죠.”
“그 말을 믿도록 하죠. 그럼 질문에 앞서 조금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테드 크루시안이죠. 여기에 있는 분들 중에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처음 사탄교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상대해온 것이 접니다. 데비크는 물론이고 악마까지 상대해왔죠. 그리고 사탄교에 속한 천사들까지요.”
순식간에 그곳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무거워서 움직일 줄 모르던 공기가 유난을 떨었다. 모두의 시선이 미카엘라에게 향했다.
테드의 말은 이어졌다.
“제가 본 사탄교에 속한 천사는 메타엘과 시리엘이죠. 그 중에서 시리엘은 미카엘라 님의 사자라고 말하더군요. 사탄교를 상대해오고 그 교활함을 알고 있는 저로선 만일의 가능성을 확인해야 해요. 미카엘라 님은….”
테드는 미카엘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평온했다. 어쩌면 이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표정을 숨기는 일에 도가 텄거나.
“사탄교와 어떤 관계이신가요?”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