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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226화 (22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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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사탄의 자식들.

테드는 곧바로 펠리스 왕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을 애쉬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프리티스 제국에서 주최한 대륙회담 때문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드래프리온을 제외한 네메스 대륙의 모든 국가의 대표자들이 모여서 회담을 나눈다. 애쉬는 국왕인 라이거를 대신해 회담의 자리에 나섰다. 회담의 장소가 중립구역이다 보니 안정성이 떨어지기에 호신의 문제로 국왕이 직접 행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단 펠리스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의 왕들은 자신을 대신한 대리자들을 보냈다. 그들이 비록 대리자라고 해도 국가의 대표자였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테드 님이 사이나 씨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테드 일행은 네메스 대륙의 중심인 중립지대의 근처의 도시로 워프 하여 마차를 구해타고서 회담이 일어나는 장소로 움직였다. 지금 간다고 해도 조금 늦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늦는다는 정보는 회담 장소에 보내놓았다.

테드를 데리고 간다는 말을 덧붙였으니 불만을 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국가의 왕들도 권한을 이용해 주권결정전을 보았을 테니 테드 크루시안의 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사탄교가 판을 치는 현 상황에서 마왕을 압도하는 힘을 가진 테드를 무시할 수 없었다.

“3개월 전, 주권결정전이 벌어진 직후에 천사가 딥크스에 강림한 것 말이죠.”

“호오?”

테드의 말에 반응한 것은 사이나에게 졸라대어 기어코 술병을 손에 넣어 병나발에 입을 대고 세상사 따윈 관심없다는 듯이 술을 홀짝 거리고 있던 바알이었다.

“천사가 나왔다고? 아스타로트 자식이 계약은 확실하게 이행했나 보네.”

“…계약? 설마. 바알. 천사가 나타난 것은 네 탓은 아니겠지?”

테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바알을 노려보았다. 바알은 흥하고 콧웃음을 치며 시선을 뿌리쳤다. 테드의 날카로운 시선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내 목적은 미카엘라 년이야. 그년을 죽이기 위해서 잠시 아스타로트와 계약한 게 전부지. 아마 천사 중에 미카엘라 년이 있을 거야. 그렇지?”

바알이 애쉬를 보며 동의를 구했다.

애쉬는 마왕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테드와 계약했다고 해도, 바알은 에이션트 드래곤을 한 주먹으로 박살내는 마왕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멋대로 몸과 마음이 긴장해버린다.

“그, 그렇습니다. 미카엘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4대 천사도 전부 강림했습니다. 덕분에 딥크스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입니다. 딥크스의 병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천사를 공격하는 바람에 천사와의 작은 전쟁도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피해도 막심하죠. 예전과 같은 군사력은을 회복하려면 수 십 년의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딥크스에 나타난 천사들은 시스템의 제약을 받지 않았다. 도중에 천사들이 프리티스 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딥크스는 필히 멸망했으리라.

또 테드가 사이나에게 들은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회담이 일어나게 된 건 사탄의 피… 때문이겠죠?”

“네. 그것 때문에 프리티스 제국이 이대로 있으면 대륙이 사탄교에 멸망한다고 의견을 주장하며 회담을 소집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함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뢰를 보이기 위한다는 이유로 중립구역에서 직접 대면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마법 수정구면 간단히 할 수 있는데 말이죠.”

네메스 대륙 곳곳에 ‘사탄의 피’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건 테드가 알고 있는 사탄의 피와는 조금 달랐다. 작은 물약병에 담긴 사탄의 피를 복용하는 일시적으로 엄청난 힘을 얻게 해준다.

전투에 관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이 사탄의 피를 섭취하고 오우거를 죽였다는 것은 도시의 어린아이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암시장에 나타난 지 겨우 3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평민들도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특히나 전투에 가까운 직업인 모험가나 범죄자들은 사탄의 피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마 마법 수정구로 하면 사탄교에 들킨다고 생각했겠죠. 통신 마법은 대상과 거리가 멀면 멀수록 방호벽이 낮아져 도청하기 쉬워지니까요.”

테드는 그레온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의 정확한 마법실력은 모르지만 충분히 통신 마법을 도청하는 것이 가능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제가 볼 땐 의미 없는 회담입니다. 이번이 3번째 회담인데 결론다운 결론은 나오지도 않았죠. 뭉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모국의 이익만을 바라고 있는 꼴이니…. 어휴. 제가 왜 여기에 온 것인지 후회가 될 정도라고요.”

자연스럽게 푸념이 흘려 나왔다.

첫 번째로 벌어진 회담 때는 애쉬도 각오를 다지고 회담 장소로 들어섰다. 그러나 8시간을 걸쳐 이어진 토의는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뿐으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회담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실질적으로 대리자에 불과했고, 함부로 의견을 제시하여 자신의 국가에 불이익을 가져가지 않으려고 수비적인 행동만을 취했다.

그날 애쉬의 각오는 짜증으로 바뀌고 이내 한숨이라는 탄식으로 입 밖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회담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나마 프리티스 제국에서 파견된 천족이 몇몇 의견을 냈지만 다른 국가의 대표자들은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회담이라면 굳이 제게 회담에 참석할 필요가 있나요?”

회담의 내용을 들은 테드가 어이 없는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애쉬는 테드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하지만 이번 세 번째 회담 만큼은 달랐다.

“세 번째 회담이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프리티스 제국 측에서 이번 회담에서 미카엘라가 직접 나온다고 알려 왔습니다. 미카엘라가 아니었다면 굳이 테드 님이 이곳으로 끌고오지 않았을 겁니다.”

“미카엘라….”

테드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최고 천사의 이름을 중얼거릴 때.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바닥으로 흐르는 액체의 소리가 뒤따랐다.

소리의 근원지로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바알이었다. 연노란색의 액체로 젖어 있는 주먹 쥔 손이 보였고, 그 아래에 산산조각난 술병이 있었다.

바알은 크게 숨을 들이켰고, 이내 크게 웃었다.

“흐음…!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커다란 웃음소리에 놀란 마부 탓에 마차가 덜커덩거렸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애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테드는 안색을 굳히며 개로 만들이지, 마차 뒤에 매달아 버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굴욕적인 면에선 개가 훨씬 나을 지도 모른다.

“시끄럽군요. 천박하게 웃지 좀 마시지요.”

“으응? 안 웃게 생겼냐고! 그 빌어먹을 개씨발년을 지금 만나러 가는데!”

얼굴은 확실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흉포하기 짝이 없는 살의였다. 제약에 의해 그녀가 낼 수 있는 힘이 1%밖에 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제약이 없는 그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테드는 그녀를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해. 바알.”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바알의 얼굴도 쓰레기를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바알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테드의 명령에 의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테드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너와 미카엘라의 사이가 어떤지 대충은 알고 있어. 아마 불구대천의 원수사이겠지. 하지만 바알. 그건 네 입장일 뿐이야. 더군다나 지금의 넌 미카엘라를 이길 수 없어. 고작 너의 1%의 힘으로 최고 천사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천사의 등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테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냉정하게 천사의 목표를 생각했다. 답은 쉽게 나왔다. 사탄교. 아마도 천사는 중간계의 병력을 활용해 사탄교를 상대할 생각일 것이다.

테드는 입을 다물었다. 바알은 똑똑하다. 미카엘라의 소식에 한 순간 냉정함을 잃은 것 뿐이다. 곧바로 냉정함을 되찾아 현실을 직시하며 게산할 것이다. 괜히 말을 늘릴 필요는 없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렸다.

명령의 유효범위인 2분을 훨씬 넘기고 5분이 지났을 무렵에서야 바알이 작은 분홍색의 입술을 뗐다.

“…그래. 네 말대로야. 지금으로선 그 년에게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지. 그년도 제약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되지만 나처럼 심한 제약이라곤 생각할 수는 없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는데 아무것도 못하는 아주 좆같은 상황이야.”

바알이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폈다. 손안에 남아 있던 연노란색 술이 방울져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만약 저 액체가 붉은색이었다면 피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저기 말이야. 테드.”

바닥에 향해져 있던 테드의 시선이 바알의 얼굴로 향했다. 평소 그녀는 자신을 야, 너, 병신 등등으로 불렸다. 그녀는 지금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렸다.

“널 죽이면 제약도 사라질까?”

테드는 검을 뽑아드는 사이나를 한 손을 제지했다.

“제약은 사라지겠지. 하지만 날 죽이면 시스템은 곧장 너를 역소환 시킬 거다. 잠시간 버틴다고 해도 그뿐이다. 마계로 돌아가서 누군가 불러내주지 않으면 다시 중간계에 돌아오기는 어려울 테지.”

“내가!!”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에 담겨 있는 것은 누구나가 알 수 있는 분노였따.

“이 기회를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아마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간이겠지.”

“너희들 시간으로 따지면 1400년이야! 1400년이라고 씨발! 그날 패하고 그년에게 뿔을 빼앗기고, 이를 갈면서 힘을 기른 게 1400년이야!”

사이나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악마가 뿔이 없는 이유가 천사와의 전쟁인 대성전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또 기다리라고?!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바알의 말이 끝으로 이어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고 떨림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기다리란 거야….”

지금 상황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은 그녀의 눈에 눈물을 맺히게 했다. 새하얀 볼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그 눈물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자기 자신마저도 모르는 온갖 것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확신할 순 없어. 하지만 한 가지 약속해 줄 수 있어.”

테드는 바알과 미카엘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은 알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전쟁이 악마와 천사와의 전쟁도 다르지 않다면 바알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날 뿔과 함께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으리라.

“바알. 네가 내 밑에서 사이나와 함께 나의 힘이 되어준다면, 그 강대한 힘으로 네메스 대륙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설령 동족인 악마라도 죽일 수 있다면. 미카엘라와 싸울 수 있는 무대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줄게.”

바알은 팔목으로 눈가를 스윽 닦았다. 눈동자에 맺힌 눈물이 사라지며, 얼굴도 평소의 자신만만하면서도 건방진 웃음이 맺혔다.

“씨발. 어차피 지금 내 상황엔 선택이 하나 밖에 없잖아.”

테드를 죽일 수 없다.

그건 바알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몸이 자신의 의지를 무시하고 움직이는데 어떻게 죽이겠는가.

바알은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테드와 함께 강제로 계약되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불안감이 숨과 함께 사라졌다. 테드와 싸울 때는 미카엘라를 죽이지 못했다는 미련이 있긴 있어도 테드 같은 강자에게 죽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강자에겐 죽는 건 늘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거기에는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품게 된 모든 걸 포기하고 죽고 싶다는 마음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막상 살게 되고 미카엘라를 직접 만나게 되는 상황이 일어나자 감정이 복받쳐 올라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부끄러움을 느낀 바알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머릿속으로 자신이 미카엘라를 죽이는 장면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아, 근데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뿔난다고 하던데.”

“제가 듣기론 엉덩이에 털이 난다고 했습니다.”

테드의 들으라는 듯이 한 중얼거림을 사이나가 받았다.

“어, 그래? 야. 바알. 혹시 엉덩이에 털 났냐?”

“이 씨발놈이!”

바알이 양손으로 주먹을 쥐고 테드에게 달려들었지만, 그의 곁에 있는 메이드에게 붙잡혀 회담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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