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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보랏빛 향기
“촉수의 본체… 문어로 치자면 머리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나요?”
“본적이 없어서 모른다. 너는 정말로 파수꾼과 싸울 생각인가?”
“제 목적은 하스레스에서 나가는 거니까요. 그 파수꾼이 문과 딱 붙어 있으니 처리할 수밖에 없겠죠. 아니면 몰래 문으로 들어가던가.”
“저 모습을 보고서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되나?”
“확실히 징그럽게 생기긴 했네요. 크기도 엄청나고요. 촉수는 보고 있으면 속이 메쓱 거릴 정도고요. 그래도 죽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날 이긴 놈인데 저딴 지렁이를 뭉쳐놓은 듯한 놈에게 당할 리가 없지.”
바알의 말에 테드는 살짝 웃으며 파수꾼을 자세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건 용감함이 아니다. 무모함이다. 다시 생각해라.”
“마법사에게 용감함 따윈 필요도 없어요. 무모함은 더더욱이죠. 마법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냉철함이죠. 플레인 씨. 여기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게요. 언젠간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죠.”
아연해 하고 있는 플레인을 향해 테드가 말했다.
테드와 바알은 전투에 앞서 천천히 몸을 풀고 있었다. 바알이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기지개를 폈다.
“바알. 지금 상태는 어때? 여기 오는 중에 마석을 흡수했는데 부족하지 않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도 상관없는데?”
“웃기지마. 제법 괜찮은 먹이가 눈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미쳤냐?”
“위험한 순간에 내가 구해준다고 생각한다면 관두는 게 좋아.”
“너나 잘해. 새꺄.”
플레인이 테드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과 동시에 걱정이 서려 있었다.
“섣불리 판단 하지마라. 시간은 많다. 파수꾼과 싸울 거라면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덤벼라.”
테드가 자신의 어깨위에 올려 진 플레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시간은 별로 없어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요. 또…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끝났어요.”
테드가 파수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촉수의 위로 수 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곧바로 전개한 마법인 만큼 하나, 하나의 위력은 떨어진다. 우선은 파수꾼의 기본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질보다 양인 전략으로 탐색을 위한 것이었다.
‘몬스터 중에선 흉악한 겉모습과 달리 의외로 실속이 없는 것들이 있지.’
마법이 발동되었다. 마법진으로부터 온갖 속성의 기본 공격 마법들이 떨어진다. 불, 전기, 물, 얼음, 어둠, 빛, 바위, 바람 등등의 개인적으로만 보자면 일반 병사들도 쉽게 피하거나 파쇄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허나 동시에 발동하는 마법의 가짓수가 3자리 가까이 되면 그 위력은 천차만별이었다. 그렇다 해도 촉수 괴물에게 이렇다 할 데미지는 주지 못했다.
피해는 확실하게 들어갔다. 문제는 그 피해를 순식간에 회복해버리는 말도 안 되는 재생력이었다.
“방어력은 거의 없군. 그냥 자르는 것보단 태우는 게 낫고, 태우는 것 보단 얼리는 게 더 낫네. 대마법으로 한 번에 얼려도 곧바로 재생력이 범상치 않으니 부활할 가능성도 있겠어.”
잘린 촉수가 자라나기 까진 10초, 불에 태워진 촉수가 생생함을 되찾기 까지 15초가량 이었고 얼려져 있던 촉수 하나가 다시 해동되어 움직이기 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30초가량이었다.
“뭘 그리 고민하냐. 보니까 저건 내가 나설필요도 없이 네 큰거 한 번이면 처리 될 것 같은데. 큰 거 있잖아. 큰 거.”
파수꾼에겐 재생력이 곧 방어력이었다. 다르게 말해 재생 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테드도 바알처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보자마자 그 생각을 했다.
메테오는 오버고 광역 마법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폭풍 계열의 마법으로 처리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 나왔다.
“바알. 저 괴물 위에 있는 초록색 문이 보이지?”
“응? 아. 그래. 저게 박샇 날 가능성도 있구나. 그거 까지 고려하면서 싸운다고? 저 촉수 괴물이 문을 박살낼 수도 있짢아.”
초록색 문은 협곡의 중앙, 촉수 괴물의 바로 위 허공에 있었다. 문의 재질은 툭 쳐도 부서질 것 같은 나무다. 이런 곳에 있는 만큼 평범한 문은 아닐 것 같기에 실제 내구도는 상당히 높을 것 같지만, 만일의 하나라는 경우도 있다. 저 문이 부서지고 사라진다면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수도 있었다.
“내가 투시해서 봤는데. 촉수에서 촉수가 나오는 종류야. 본체는 동그란 축구공 같아서 어이가 없을 정도야.”
“축구공이 뭔데?”
“……네 머리만한 크기라고. 그게 촉수의 가장 아래에 있어. 약점으로 보이긴 한데 정말 약점인지는 모르겠고.”
“넌 전투에 앞서 왜 그리 말이 많냐. 그건 아스타로트같아서 마음에 안 드는데. 그냥 가서 쳐죽이면 해결 되는 일이야.”
“이런 말이 있지.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핵이 있는 위치도 알았고, 잘 통하는 속성도 알았지. 더 알아볼 것도 있냐?”
바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봤다. 테드는 잠시 파수꾼을 쳐다보다가 뒤에 있는 플레인을 봤다. 플레인은 생각보다 더 뛰어난 테드의 마법 실력을 생각하고 있었다.
“플레인 씨. 파수꾼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어떤 쓸데없는 것이라도 좋아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다. 파수꾼은 처음 봤을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과 촉수의 체액은 생물에게만 통하는 맹독이라는 것이다. 그 독은 우리 독인에게도 위험할 정도다. 피부에 닿으면 그걸로 끝이다.”
“…맹독인가요. 충분히 좋은 정보군요. 도움이 됐어요. 맞다. 바알. 이참에 너도 옷 좀 걸치지? 보기 상스러운데.”
“추위따위는 타지도 않고, 움직이기도 편하니까 신경꺼. 아니면 뭐냐, 이 몸에 욕정이라도 하는 거냐? 몇 번째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말하면 한 번 대준다니까?”
“그럴 일 없어. 그럼 슬슬 가볼까.”
테드가 손을 뻗어 바알의 뒷목을 콱 잡아들어 올렸다. 허공에 뜬 바알이 욕설을 내뱉으며 발버둥 쳤다가 이내 테드의 명령을 받고 얌전해졌다.
최근에야 안 사실인데 바알에게 명령을 하기 위해선 강력한 명령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명령이란 생각 없이 무심코 내뱉은 말은 강제력이 조금도 없었다.
또 명령도 바알이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명령은 발동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에 ‘개처럼’이라는 명령을 했을 땐 바알은 개를 떠올리며 이해했고, 개처럼 짖으며 개처럼 행동했다.
이것으로 명령은 테드가 사용하기에 따라, 바알이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이 있어. 전투를 하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제일이라고.”
“저 꿈틀이는 무시하고 곧장 문을 통과하겠다고?”
“뭐야. 알고 있었어?”
“이게 진짜 날 개병신 취급하네. 처음 저걸 봤을 때부터 생각했어. 네 목적인 여길 빠져나간다는 것만 생각하면 그게 가장 편한 길 일 테니까.”
“…….”
테드는 그녀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무시하고 있었지만, 바알은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뭐. 그렇게 됐으니. 이만 가볼게요. 플레인 씨. 여기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플레인은 절벽 끝에 선 테드를 쳐다봤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밀면 파수꾼이 있는 협곡으로 떨어질 정도다.
플레인은 억지로 테드를 막고서 마을로 데려가는 것 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전의 마법을 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강했다. 그에게 받은 막대한 물자로 만족해야했다.
“……별거 아니다.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그게 가능할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여기가 대미궁의 몇 층인지도 모르니 불가능할 것이다고 생각하면서 테드는 그에게 목례를 해 인사를 했다.
바알은 플레인에게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플레인을 비롯한 칼바람 마을 주민들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간간히 그들이 먼저 말을 걸어와도 무시하거나 까칠하게 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알의 인정을 받지 못한 그들은 바알과 대화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럼 가볼까.”
테드가 허공에 발을 뻗으며 비행, 사일런스, 인비저블, 언노운 총 4가지의 마법을 동시에 발동한다. 바알을 들고 있는 테드의 모습이 허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플레인은 테드를 보고 있었음에도 어떤 기척이나 숨소리 등을 느낄 수 없었다. 아마도 마법이리라.
그는 곧바로 마을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절벽 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협곡으로 머리를 내밀어 파수꾼의 위에 있는 초록색 문을 쳐다봤다.
테드는 허공을 걷는 것처럼 발을 움직였다. 그가 사용한 마법은 에어 워커보다 더 고등인 마법인 비행이라 쓸모없는 모션이었다. 슈퍼맨처럼 날아서 가면 되는 일을 굳이 번거롭게 걷는 모션을 취하며 허공을 비행하는 이유는 최대한 촉수괴물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법으로 기척과 냄새를 숨기고 모습과 소리를 숨겨도 물질 자체를 숨길 수 없다. 빠르게 날아가면 바람이 일어난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촉수 괴물은 그 이변을 눈치 채고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블링크 같은 단거리 마법도 방법 중 하나다. 다만 촉수 괴물이 마나에 민감하다면 곧바로 들키게 된다.
마법을 사용할 때, 파수꾼이 테드의 위치를 몰라 공격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마나 감지 감각은 제법 둔한 것 같았지만.
협곡이 크다보니 허공을 걸어서도 1분이나 걸려서 초로색 문 앞에 도착했다. 테드는 망설임 없이 바알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동그란 나무 손잡이는 문과 마찬가지로 초록색이었다. 테드는 아무 장식 없이 단조로운 손잡이를 돌렸다.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일런스 마법으로 인해 문과 접촉되어 있는 테드와 바알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음?”
테드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문고리는 확실하게 돌아갔고, 찰칵거리는 소리는 확실하게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밀어보고 당겨보고, 혹시 몰라 옆으로 밀어도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뭔가 잘못….”
발아래에서 수많은 촉수가 뻗어 왔기에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황급히 옆으로 비행했다. 촉수는 꿈틀거리면서 테드의 몸을 노렸다. 테드는 비상하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뒤쫓고 있다고? 모습이나 냄새, 소리는 물론이고 마력까지 완벽하게 숨겼을 텐데. 열기? 아니면 바람을 감지한 건가.”
촉수는 육중한 모습과 다르게 재빨랐다.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곧바로 붙잡혀서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테드는 요리조리 허공을 움직이며 촉수들을 한껏 피해내면서 협곡 보다 높은 곳에서 부유했다. 촉수가 닿지 않는 높이였다.
“방심하긴.”
바알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 말뜻을 눈치 채기도 전에 테드는 뒤통수에서 충격을 느끼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추락하는 와중에 허공에서 꿈틀 거리는 촉수가 보였다. 촉수의 뿌리가 없는 모습이 마치 작은 워프게이트를 통해 촉수의 일부만을 공중으로 이동시킨 것 같았다.
비행을 조작해 추락을 멈춘 테드는 사방에서 노려오는 촉수를 보고 혀를 찼다. 방금과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뻗어온다.
“윈드 커터.”
바람의 칼날에 베인 촉수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나 테드는 곧바로 위로 올라갔다. 촉수가 테드가 있던 자리에서 서로 부딪히더니 엉켰다가 떨어져나갔다.
“1초 만에… 재생했다고?”
아까 실험했을 때는 잘린 촉수가 재생하기 까지 10초가 걸렸다. 1초라는 말도 안되는 속도가 아니었다.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촉수가 또 다시 뻗어온다. 공간 제약없이 촉수를 휘두를 수 있는 허공은 결코 테드의 편이 아니었다. 테드는 협곡의 입구 쪽으로 블링크를 사용했다.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마력 소모가 컸다는 걸 빼고는 문제는 없었다.
“이젠 내 차례야.”
몸을 흔들어 테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바알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땅속에서 보라색 촉수가 솟아나왔다. 바알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내뻗어 촉수를 붙잡았다. 촉수에 묻어 있는 점액은 맹독이었으나, 폭식이 있는 바알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바알이 손에 힘을 주었다. 촉수가 끊어졌다. 피같은 체액은 떨어지지 않았다.
끊어진 촉수에 어둠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폭식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연해서 소화가 잘 되는데? 영양가는 별로 없지만.”
수 십개의 촉수가 바알을 향해 뻗어왔다.
촉수는 바알의 몸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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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