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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보랏빛 향기
“그럼 사탄은?”
테드는 사탄교를 상대하면서 정작 사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거의 없다. 알고 있는 것은 사탄의 피라는 걸 이용해 데비크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사탄의 피에 적응하면 데비크가 되지 않고 강대한 육체와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정도다.
테드는 사탄의 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흑마법을 이용한 것인지, 연금술을 이용한 건지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이름 그대로 ‘사탄’이라는 것의 피일지도 모른다.
“사탄? 흔히 있는 전설 중 하나지. 니들 중간계에도 있잖아. 전설의 용사나 전설의 검같은 거.”
“실존하는 악마는 아닌 거야?”
“사탄은 마계를 만들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악마의 신이야. 뭐, 진짠지 가짠지 나도 모르지만.”
“……마신인가. 그러고 보니 사탄교는 사탄의 부활을 대외적으로 내걸고 있지.”
테드의 귀에 바알이 짧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대외적으론 그렇지.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것을 부활시킬 수 있을 리 없잖아? 아스타로트가 적당히 마신의 전설을 이용 한 거야. 실제로 사탄의 부활을 믿는 악마는 아무도 없을걸. 멍청한 중간계 놈들은 모르겠지만.”
“사탄의 심장.”
테드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아스타로트가 드래곤의 시체를 이용해 완성시킨 것.
애쉬를 통해 그것의 이름이 사탄의 심장이란 걸 알았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능력도 대충 예상할 수 있다. 사탄의 심장이 나타나고부터 사탄교의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으니 예상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뭐지? 심장이라 불리는 만큼 엄청나게 중요한 것 같은데.”
테드는 바알이 거짓정보를 알려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 않았다. 비록 지금 망설임 없이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그녀를 신뢰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다. 바알과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이였다.
“그건 나도 몰라. 아스타로트 자식이 혼자서 만든 물건이거든. 그딴 징그러운 것에 별로 관심도 없고. 알고 있는 거라곤 벨리알의 심장으로 만든 것 밖에 없어.”
“……그 사탄의 심장이 시스템의 힘을 막고 있지?”
“잘 알고 있네. 첩자라도 심어 뒀어? 아니, 지금 상황을 살펴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나. 그 말대로야. 내가 주권결정전에서 제약 없이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심장에서 뽑은 힘 덕분이지. 유효기간이 있지만 시스템의 제약을 피한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해.”
만일 사탄의 심장이란 것을 얻을 수 있고 바알에게 사용한다면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알이 태도를 바꿔 테드에게 덤벼들 가능성도 있었다. 시스템의 간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계약’ 스킬도 효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일 테니까.
테드는 마법사로서, 사탄교의 적으로서 사탄의 심장이란 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적의 가장 큰 무기를 그냥 내버려 둘 순 없다.
“근데 씨발. 나만 떠들고 있잖아? 이건 불공평하지. 야, 나도 질문하나 하자. 네가 가진 권능은 뭐냐? 시간과 관련된건 틀림없는 것 같은데.”
바알은 시간을 멈추고 미래를 보는 테드의 능력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녀는 수많은 세월을 살아왔다. 온갖 악마와 천사를 상대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시간과 관련된 권능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그는 시간을 멈추는 것 뿐만이 아니라 되돌리는 것도 가능할지 몰랐다.
“미안하지만 그건 권능이 아니라 마법이야. 나는 권능이 없는 인간이야.”
“……헤?”
그 목소리에는 정말 예상치 못했다는 듯한 놀라움이 묻어 있었다.
“마법이라고? 시간을 멈추는 게? 마법이란 게 그렇게 대단한 거 였나?”
“……나도 평범한 마법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아마도 권능의 영역에 아주 약간 닿아 있는 거겠지. 그건 순수한 마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니까.”
“권능의 영역에 닿았다라… 흐음. 중간계의 인간이 말이지? 어쩌면 최초일지도 모르겠는걸. 중간계의 생물이 권능을 얻는 건.”
“다시 말하는데 시간정지는 권능이 아니라 마법이야. 괜히 설레발 치지 말도록.”
“시간을 멈추는 일이야. 그런 대단한 능력이 고작 마법이라고?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안할걸. 그냥 상대방의 이해력을 고려해서 권능이라고 말해! 이 내가! 바알님이 인정했다고!”
바알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비록 밖에는 햇빛이 쩡쩡 내리쬐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에겐 잠들 시간이었다. 낡은 집이라 방음은 전혀 되지 않기에 조금만 더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가면 옆집에서 짜증서린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닥쳐. 바알. 잠이나 자. 나도 잘 테니까.”
“새끼. 날카롭기는. 알았어. 그럼 술 좀 꺼내줘 봐. 그걸 먹으면 잠이 솔솔 오거든. 너도 내가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 보단 낫잖아?”
테드는 숙면을 위해 그녀에게 술을 건네주었다. 다행히도 바알은 술을 먹고 골아 떨어졌고, 테드는 원하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바알이 자는 와중에 덮쳐오지 않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나, 바알은 얌전히 잠을 잘뿐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테드와 바알은 플레인의 길안내를 받으며 초원의 동쪽에 있는 산을 향해 움직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플레인의 길안내는 꼭 필요하지 않았다. 동쪽에 있는 태산의 중심의 협곡 사이에 문이 있다는 정보만으로 충분했다. 나머지는 테드가 알아서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레인은 한사코 테드를 직접 안내하겠다고 했다. 하스레스의 초원에선 방향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이유이며, 서쪽에 있는 숲과 마찬가지로 동쪽 산에도 위험한 몬스터가 있따는 것이 이유였다. 덤으로 지금은 서쪽 숲에 있는 마비독 거미가 산란기 때문에 동쪽 산에 머무르는 시기였다. 몬스터를 피하기 위해선 자신이 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본심을 말하자면 플레인은 테드라는 희귀한 인력을 잃고 싶지 않았다. 마석의 손해를 보면서 물물 교환에 응한 것도 그런 이유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파수꾼에게 막혀 돌아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고 마을의 일원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다.
조심해야 할 것은 테드를 몬스터에게 잃는 것이다. 전문적인 사냥꾼도 산이나 숲에서 간간히 죽음을 맞이한다. 하물며 하스레스에 처음으로 들어온 테드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플레인은 테드를 살리기 위해서 길안내를 자처했다.
보라색 초원은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간간히 바위가 자리잡고 있는 평지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초원의 끝부분을 제외하면 등장하는 몬스터도 없다. 하스레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바로 이 초원이었다.
문제는 동쪽 산에 도착하고서 부터다. 구름에 까지 닿아있는 커다란 산은 보는 것 만으로도 기가 질리게 한다. 그리고 협곡은 산의 안쪽에 있으니 싫어도 산을 타야했다.
산은 초원과 마찬가지로 보라색 일색이었다. 밝은 보라색이다보니 계속 보기힘들 정도였다.
“산의 안쪽 협곡에는 파수꾼이 있어서 몬스터가 없다. 하지만 산의 외곽 쪽은 다르다. 이곳에 올빼미가 산다.”
“올빼미인가요. 전 그것보다 저 놈들이 더 궁금한데. 마비독 거미라고 했던가요?”
테드는 산에 들어오자마자 발견한 커다란 나무를 가리켰다. 보라색 나무 주위에는 커다란 보라색 거미줄이 난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미줄 위에 보라색의 커다란 거미가 있다. 놈들 하나하나가 어린아이 모습을 하고 있는 바알보다 컸다. 테드의 가슴팍까지 오는 크기다.
“마비독 거미다. 암컷들은 동쪽 숲에 와서 알을 낳고 돌아간다. 산에 있는 마비독 거미는 예민하다. 가까이 가면 주저 없이 공격해온다. 조심해라.”
“마비독 거미라 불리는 거 보면 플레인같은 독인에게도 독이 통하나보죠?”
플레인의 종족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독이라도 통하지 않는 종족이라 생각했다. 이 판티지 세계에선 충분히 있을법한 종족이었다.
“우리에겐 마비독이다. 고작해야 1분 정도 공격당한 부위가 마비되는 것이 전부지만, 다른 생물에겐 극독이다. 너희들은 아직 독인이 아니다. 발톱과 이빨을 조심해라. 우리는 마비독 거미의 독을 해독하는 법을 모른다.”
“살벌하네요. 조심하죠.”
말과 다르게 테드의 얼굴은 평온했다.
현재 위광이 회복되었다.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니나 고작해야 커다란 거미에게 뚫리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바알에게 독은 통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들은 독을 포함한 음식등을 ‘폭식’이 자동으로 에너지로 환원하는 모양이다. 물론 조절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기호 식품인 술을 먹을 이유가 없었다.
바알이 말하기를. 술은 취하기 위해 먹는 것이다.
참고로 바알은 마석을 꼭꼭 씹어 먹는 것으로 힘을 회복할 수도 있었다. 효율만 따지자면 그 편이 오히려 빠르다. 그러나 맛없다는 이유만으로 행하지 않고 있다.
“……고개를 숙여라.”
마비독 거미가 있는 나무 근처를 조심스럽게 지나가던 중 돌연 플레인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테드와 바알에게 손짓했다. 테드는 플레인을 따라 몸을 낮췄고, 바알은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작아서 몸을 낮출 필요가 없었다.
테드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무언가가 거미를 향해 쇄도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나타난 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거미를 낚아채곤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그건 보라색의 커다란 올빼미였다. 크기는 테드 보다 더 컸다.
“산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존재는 올빼미다. 하강 속도가 어마어마하다. 숙련된 전사도 반응하기 힘들 정도다. 일단 시력이 나쁘니, 놈이 근처에 있다면 몸을 숙이고 나무로 엄폐하면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군요. 근데 마을에 있던 마석들은 전부 마비독 거미나 올빼미의 몸에서 얻은 건가요?”
“그렇다. 이곳에 살고 있는 몬스터의 몸속엔 죄다 마석이 있다. 크기도 비슷비슷하다.”
“익숙하지 않으면 상대하기 까다롭겠네요.”
플레인은 익숙하게 산속을 움직였다. 거침없는 발걸음은 그가 레인저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거기다 체력까지 좋아서 꼬박 4시간을 쉬지 않고 산속에서 움직였다. 그는 한시라도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비독 거미가 움직이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플레인이 입구가 아닌 협곡의 옆에 테드를 데려온 것은 파수꾼의 모습을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보여주기 위해서다.
플레인은 파수꾼의 모습만으로도 그가 문을 통해 나가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았다.
“……저건.”
플레인의 생각대로 테드의 얼굴이 굳어졌으나 그 뿐이었다.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알의 눈동자가 커졌다. 놀라움과 함께 어딘가 즐거운 기색이 있었다.
플레인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가 처음 파수꾼을 봤을 때 항거 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저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 깊은 곳까지 인정해버렸다.
“엄청나게 크네요. 처음 보는 몬스터인데. 협곡을 가득 채우고 있네요. 파수꾼이라 하길래 뭔가 인간형 몬스터라고 생각했는데.”
협곡 안에서 거대한 보라색 촉수가 꿈틀 거렸다. 수 백 혹은 수 천 개 일지도 모를 촉수들이다. 촉수 하나 하나가 산에 빼곡히 차있는 나무와 닮아 있었다. 촉수의 표면은 기름인지 혹은 체액인지 모를 무언가로 반들반들 거리고 있었다. 촉수는 쉴 틈 없이 꾸물거렸다.
테드는 협곡의 중심, 수 많은 촉수들 사이에서 허공에 떠있는 문을 발견했다. 외형은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의 나무문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