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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보랏빛 향기
“……이런 씨발!”
땅바닥에 정수리를 부딪혀 강제로 잠에서 깨어난 바알은 습관적으로 욕설부터 내뱉었다. 정수리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테드가 보고 있는 마석으로 가득한 언덕을 확인하며 휘유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야야. 재수가 좋은데. 저것들이 있으면 내 힘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겠어.”
바알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약해진 자신에 관해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이 마계의 환경과 흡사하고 시스템의 제약이 없었다면 힘의 회복속도에 관해선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시스템의 제약과 폭식할 것이 없는 이곳에선 회복속도가 느리다. 언제 완전회복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마석으로 힘을 회복할 수 있나? 하나에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지?”
테드가 물었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바알이 평생 동안 약해진 상태라면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이션트 드래곤을 한 번에 해치운 힘은 바라지 않는다. 적어도 사이나 수준의 힘을 회복하면 충분하다.
“한 개? 이런 쪼자한 새끼를 봤나. 저렇게 많은데 고작 한 개라고? 넌 내 힘이 필요하잖아? 그걸 로는 택도 없어 인마. 지금과 같은 짐 덩어리 수준이야.”
“저건 아직 내 것이 아니야. 그리고 너의 회복 효율이 별로라면 내가 사용하는 게 훨씬 나아.”
“넌 내 힘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 텐데? 탐나지 않아?”
“탐이야 나지. 하지만 지금 상태의 넌 시스템의 제약을 받고 있잖아? 완전히 회복한다고 해도 발휘할 수 있는 힘은 1%에 불과해.”
“그 힘의 1%로 어지간한 새끼들은 곤죽을 만들어버릴 수 있어.”
“내가 상대하려는 놈들은 어지간한 놈들이 아니라서.”
바알이 테드를 한껏 노려봤다. 그러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좋을대로 하라는 듯이 손을 대충 흔들고선 근처 벽에 그늘진 곳으로 움직였다.
“이야기는 끝났나?”
테드가 바알의 작은 등을 보고 있자니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플레인이 물어왔다.
“아, 기다리게 했네요. 죄송해요.”
“아니다. 동료와의 의견 교환은 필요한 법이다. 평범한 여자이이 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군.”
“저 녀석과 평범은 아주 거리가 멀죠.”
그녀의 정체를 알게된 무뚝뚝한 플레인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참았다. 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곤란한 것은 자신이었다.
“보는 대로 이 마석들을 대가로 치르겠다. 너는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지?”
“여러 가지가 있죠. 우선은 여러분에게 필요할 만한 물건 중에 포션이 있는데. 아, 이곳 환경에서라면 포션에도 독이 들어가 변형되지 않나요?”
“완전히 밀봉된 상태라면 상관없다. 거기다 곧바로 독극물로 변하는 것은 아니고, 포션이 독으로 변했다고 해도 원래의 기능이 약간 저하할 뿐이다.”
“다행이네요. 제겐 마나 포션과 회복 포션이 있어요. 그것도 제법 많이요. 포션 하나당 마석 3개. 어때요?”
욕을 먹어도 변명할 거리가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폭리였다.
이 정도 마석 하나면 상점에서 싸구려 포션을 몇 십개나 구입할 수 있을 정도다. 질 좋은 포션도 10개 정도는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좋다.”
모험가 출신의 플레인도 그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선 마석은 쓸모없는 것들이다. 간간히 마법 물품의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다. 그 마법 물품도 한 번 마석을 갈아주면 1년 이상은 간다. 덤으로 마석은 사냥할 때마다 얻을 수 있는데 반해 포션은 여분의 목숨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마석이 몇 개인지 알고 계신가요?”
“정확하게는 모른다. 아마 2만개 정도는 될 거다. 마을 곳곳에 있는 마석을 긁어모으면 2만 5천개 정도다.”
“……생각보다 많네요. 우선은 포션 3,000개를.”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플레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많군. 주민들을 불러 모아야겠군.”
그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작은 칼바람 마을안에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러퍼졌다. 주민들은 곧바로 모여들었다.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션의 교환을 통한 마석 9,000개.
냉장고나 세탁기, 마법화로 같은 마도구로 마석 7,000개.
하스레스에선 구할 수 없는 과일이나 작물, 요리를 마석 4,000개.
의류를 비롯한 필기도구 같은 자잘한 물건을 3,320개.
합계 23,320개의 마석이 테드의 아공간으로 들어갔다.
워낙 물품이 많다보니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나섰는데도 정리하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바알이 마석을 탐냈지만, 테드가 술병을 건네주자 아주 얌전해졌다.
“자. 바알. 마석 1,000개야. 이 정도면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지?”
“자세히는 몰라. 그래도 내 힘의 총량이 워낙 엄청나서 이정도론 부족해. 기왕 줄거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놓지 그래?”
바알의 앞에 1,000개의 마석을 꺼내 쌓은 테드가 물었다. 바알은 마석을 하나 손에 들었다. 권능인 폭식을 사용한다. 바알의 손에서 나타난 어둠이 마석에 달라붙었다.
바알은 미간을 찡그렸다. 시스템의 제약 탓에 폭식이 마석을 온전히 흡수하는 데 1분가량이 걸렸다. 마찬가지로 제약 탓에 1,000개를 한 번에 흡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앞으로 남은 999개는 999분, 시로 따지자면 16시 39분. 초로 따지면 59,940초 동안 노가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빠르게 계산한 바알은 에너지 흡수가 끝나 돌멩이가 된 마석을 냅다 집어 던졌다.
“안 해! 씨발! 이 나이에 노가다라니 말이 되냐고!”
“……처음에 마석을 탐내지 않았냐?”
“그때는 이 정도로 효율이 극악일줄 상상도 못했지! 빌어쳐먹을 제약! 아마 저 마석들 전부 흡수한다고 해도 힘의 일부밖에 회복하지 못할걸! 괜한 짓거리야.”
“……지금은 고블린 몇 마리까지 상대할 수 있지?”
“100 마리는 가뿐하게 이겨! 아마도.”
“뒤에 아마도가 신경쓰이지만 마석 하나에 고블린 100마리 정도면 나쁘지 않지. 계속 흡수해.”
“넌 씨발 조상이 금붕어냐? 내가 안한다고 했잖아.”
“힘을 되찾고 싶지 않냐?”
“존나 되찾고 싶지. 씨발, 힘만 준다면 네 좆까지 빨아줄 수 있어.”
“그럼 마석을 흡수하면 되겠네. 내 거기를 빠는 것 보다 나을테니. 마석을 3,000개 더 줄게. 흡수해.”
바알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동정심을 가지고 조금 모자란 친구를 보는 눈으로 테드를 쳐다봤다.
“병신아. 내 말은 고생해가며 이깟 돌멩이를 먹느니 네 좆대가리를 빠는 게 더 낫다고.”
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알의 성격이야 괴팍한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명령한다고 해서 고쳐질 성격도 아니었다.
“바알아. 제발 부탁이니 말 좀 곱게 쓰자.”
“불가능한걸 알면서 그러냐. 아,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 것 같은데. 서큐버스 놈들이 쌘놈들 좆을 빨면서 힘을 얻잖아? 나도 폭식으로 흡수가 가능하니 혹시 모르지.”
“……서큐버스는 정기를 흡수하는 거다. 넌 정기가 뭔지는 아냐?”
“팍 씨! 이게 진짜. 내가 어린애 모습이라고 조낸 무시하네. 몇 번이나 말하는데 니 새끼랑 살아온 세월이 달라요. 정기가 뭐냐고? 뭐긴 뭐야. 정액이지. 야. 말 나온 김에 한 번 실험해보자. 넌 내가 인정할 만큼 개쌔니까 어쩌면 저 돌멩이들보다 네 정액이 더 나을지도 몰라.”
바알이 벌떡 일어서서 테드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바지를 붙잡는다.
“너희 같은 마법사란 것들은 실험에 환장한다며? 하자. 실험.”
“이 미친년이!”
테드가 바알의 머리를 붙잡고 집어 던졌다. 마석에 부딪힌 바알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아 씨발. 뭐가 문제야! 네 좆물 빨아준다고! 그냥 기뻐하면 되잖아!”
바알의 적반하장에 열받은 테드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발달한 청각에 소곤거리는 마을 주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별한 것 없는 작은 마을이다 보니 테드와 바알이 일으킨 소란은 단숨에 화제가 되었다.
“어린아이… 그것도 여자아이가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군. 외부인은 다 그런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 온 거지.”
“아까 저 남자가 아공간이란 마법으로 옷과 천을 잔뜩 꺼내는 것을 보았네. 온갖 것들이 있던데 지금 저 여자 아이가 걸치고 있는 건 천조각이 전부네. 그러니 여자 아이의 복장은 저 남자의 취향이라 할 수 있네. 자. 여기까지 오면 자네들도 눈치 챘겠지. 저 자는 터무니없는 변태네.”
“어린 여자 아이를 좋아하는 변태인가. 위험하군. 마을의 여자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겠어.”
“어린 시절에 마을 영감님에게 들은 기억이 있어. 어린 여자 아이를 좋아하는 놈들을 가리키는 단어였는데… 로자로 시작한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고영감 말이지? 나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네. 페도필리아! 더러운 페도라고 말했지.”
“…….”
테드는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바알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바알을 쳐다봤다.
“날 사회적으로 끝장낼 생각인가 본데… 그렇겐 안 될 거다.”
“아앙? 진짜 끝장 내줘?”
바알이 양손으로 자신의 옷을 잡았다. 탱크탑과 핫팬츠다. 그냥 끌어 내리기만 하면 알몸이 된다. 창백한 얼굴의 테드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을 주민들 사이엔 페도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떠오르고 있었다.
“미안. 내가 잘못 했어. 그것만은!”
“짜식이 까불기는.”
⁂⁂⁂
일련의 소동을 어떻게든 좋게 끝낸 테드는 마을에 몇 개 있는 빈집을 받았다. 예전에 한 사냥꾼이 살던 집으로 그리 크지 않은 집이었다. 테드와 바알은 방하나 밖에 없는 집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밖은 비록 보라색이지만 밝았다.
해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시간감각이 엉망이었다. 플레인이 지금은 자야 할때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파수꾼으로 향하는 길은 내일 플레인이 직접 알려주기로 했다. 듣기로 동쪽에 있는 큰산의 협곡에 파수꾼과 ‘문’이 있다고 한다.
“야. 야. 한 번 실험해보자. 진짜 가능성 있다니까? 서큐버스 년들이 괜히 정액을 먹겠어?”
“정액이 아니라 정기다. 그리고 불안해서 미리 말해두는데. 내 이불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일절 하지 마라. 들어오는 순간 넌 개가 아니라 돼지로 만들어주마.”
현재 그들은 방을 중심으로 오른쪽이 테드, 왼쪽에 바알이 이불을 깔고 누워있었다. 테드는 곧게 누운 체 눈을 감고 있었다. 주권결정전 이후 제대로 쉬지 못했기에 신체나 정식적인 피로가 쌓여 있어 상당히 졸렸다. 그런데 곁에 사이나가 없어서 그런지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암퇘지로 만들어 준다고? 이열. 웬일로 남자다운 발언이냐.”
“정육점 돼지처럼 천장에 매달아 준다고.”
바알은 이후로도 쉴 틈 없이 음담패설을 조잘거렸다. 아까 시간이 날 때마다 퍼질러자더니 정작 자야하는 지금은 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야. 근데 이거 제약 풀 방법 없냐? 아스타로트 한테 들었는데. 너 루시퍼 딸년이랑 계약했다면서. 그년은 제약도 거의 없다지? 제약은 어떻게 풀었냐?”
“년, 년 하지마라. 네 선배다. 앞으로 선배님이 되실 분이니 조심해. 사이나는 엄청나거든. 아. 돌아가면 화내려나. 멋대로 바알 같은 거 주워왔다고.”
“이 새끼. 아주 날 똥개취급 하는구만.”
테드는 제약에 관해서 생각했다. 바알의 제약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선 사이나처럼 스킬의 숙련도를 올릴 필요가 있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당장 바알의 제약을 풀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사이나와 관계를 가진 날에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었지. 그리고 그 후부터 이상하게 숙련도가 많이 늘었어. ……설마.’
계약 스킬의 숙련도는 대상과의 친밀함과 관계있을 지도 모른다.
테드는 모험가 일을 하면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환수와 사선을 넘는 계기로 정말 친해졌을 때 소환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다는 모험가의 이야기다.
‘아니. 꼭 섹스를 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 중요한 것은 친밀감. 섹스는 좋은 수단이겠지만 정신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할 거야. 바알은 섹스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니 아마 효과는 없겠지.’
떡정이라는 속된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애써 지웠다. 그리고 화제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연다.
“그런데 루시퍼라니. 처음 들어보는데 마계에서 유명한가봐?”
“나랑 같은 마왕이니까. 유명하긴 하지. 뭐, 나보단 약하지만.”
“……루시퍼라. 사이나의 아버지면 인사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긴장되는데. 한 번 연습해볼까. …장인어른 딸을 제게 주십시오! 다른 버전으론…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게 해줘! 아. 이게 아닌가.”
“뭔 개소리하고 자빠졌냐. 그딴 소리 할거면 잠이나 퍼자 씹새야! 그리고 루시퍼 그 새낀 너랑 딸년한테 관심도 없을 거다. 그 새낀 아주 지밖에 모르는 새끼거든.”
“루시퍼라. 무슨 마왕인데? 넌 광폭이라 불리니까. 아주 살벌한 칭호로 불리겠지?”
“침묵. 그 놈은 침묵의 마왕이라 불리지. 시끄러운 걸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놈이야. 부하가 기침 소리를 냈다고 죽여 버린 것은 마족들 사이에서 유명하지.”
“아. 그래? 혹시 빡빡머리에 안대를 차고 있는 건 아니지? 권능이 마음속을 꿰뚫어 본다거나.”
“왜 그리 구체적이냐. 놈은 은발에 계집애처럼 생겼어. 권능은 침식. 공간이나 정신 침식은 귀찮지만, 나나 너 정도 되면 별 영향도 없어. 조금 귀찮은 정도지.”
“그럼 나머지 다른 마왕은?”
“허상의 마왕. 네비로스. 권능은 공간. 이 새낀 존나 신출귀물한 새끼야. 나도 몇 번 본적 없어. 아마 루시퍼보다 약할걸.”
“너보다 약하다니. 그거 참 다행이야.”
“그래. 씨발. 날 꺾었으니 네가 마계최강이다. 짱 먹어라. 씨발놈.”
테드는 안도심을 담아 말했을 뿐인데, 바알의 짜증 서린 욕이 돌아왔다. 테드에게 진 것이 분한 모양이다.
대화가 끊어졌다. 이대로 입다물고 잠들까 하던 테드는 문득 생각나는 것을 물었다.
“그럼 사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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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