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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220화 (220/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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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보랏빛 향기

“여기가 어디인지 우리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선조들은 이곳에 하스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너희들은 근 30년 만에 보는 외부인이군. 재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변변찮은 재주는 하나 있죠.”

테드는 대답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하스레스라는 단어를 검색한다.

테드는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는 모험가로서 어지간한 곳은 알고 있었는데 하스레스라는 곳은 들어본 적도 없다.

“혹시 여기가 네메스 대륙의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길을 모를 때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최고였다.

질문을 들은 노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질문이 이상하군. 너희들은 대미궁… 바빌로니아의 함정에 걸려 이곳으로 온 게 아닌가?”

“……바빌로니아요? 설마 여기 바빌로니아 인가요? 이런 에리어가 있다곤 듣지 못 했는데. 몇 층이죠?”

대미궁섬 바빌로니아라면 이런 특이한 에어리어가 존재한다는 것도 이해된다. 바빌로니아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싸인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곳은 아직 모험가들에게 밝혀지지 않은 구역인 최심층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들의 장비 수준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모른다.”

노인은 딱 잘라 말했다. 테드의 입장에선 실망스러운 대답이었으나, 이곳이 바빌로니아의 내부라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득이다.

“하스레스에 떨어진 자들은 모두 심층의 함정에 걸린 모험가들이다. 아주 몇 백년 전부터 모험가들은 이곳에 나타나 무리를 이루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렇군요.”

궁금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은 그들의 피부다. 그들의 출신이 이곳의 원주민이 아니었다면 필시 피부도 보라색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마을 사람들 중에는 긴 귀를 가진 엘프나 짧은 체구의 드워프도 있었다. 물론 피부색은 보라색이다.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색된 이유를 테드가 짐작하기에 아마도 이 에어리어 특유의 환경 때문일 것이다.

“저희는 밖으로 나가야 해요. 혹시 이곳을 나가는 길을 알고 있으신가요?”

“포기해라. 그건 불가능하다.”

노인은 조금의 기다림도 없이 즉답했다. 너무 빠르게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테드의 말을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말하셔도 이해할 수 없는데…… 왜죠?”

“문은 파수꾼이 지키고 있다. 문을 넘으려면 파수꾼을 쓰러뜨려야 한다. 파수꾼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방법이 있다는 거군요. 혹시 모르니 묻는 건데 파수꾼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나요?”

그들이 이곳에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테드도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노인은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파수꾼은 괴물이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과거 외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포기하고 마을에 정착하는 것을 추천한다.”

“충고는 감사드려요. 하지만 저희는 밖으로 나가야 해요. 그게 위험한 일이라고 포기할 순 없어요.”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자신과 바알이 없는 사탄교가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노인은 테드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테드의 얼굴에 서린 쇠심줄 같은 각오를 본 그는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쉽게 마음을 고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노인은 30년 전에 이런 자들을 봤었다. 그들 또한 파수꾼의 강함을 몸으로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 결코 납득하지 않았다.

“……좋다. 길을 알려주겠다. 하지만 그냥은 알려 줄 수 없다. 우리들의 도움이 되어라.”

노인이 알고 있기로 파수꾼을 만난 자들의 반응은 2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파수꾼에게 달려드는 자들. 존귀한 생명을 버리는 멍청한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주제를 아는 자들이다. 파수꾼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역량을 냉정하게 계산해 물러날 줄 아는 현명한 자들이다.

노인은 테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가 전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죽기 전에 그가 가진 것들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이해해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우선은 네가 가진 재주를 우리에게 알려라. 그 여자 아이는… 됐다. 재주를 바라기엔 너무 어리군. 그 아이도 파수꾼에게 데리고 갈 건가?”

“뭐 이 대갈빡에 피도 안 마….”

테드는 오른손으로 발끈 하는 바알의 입을 틀어막고 왼손으로는 발버둥치는 바알의 허리를 휘감아 안아 들었다.

테드의 입장에서 이야기는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알은 조용히 있었 주는게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테드는 안아든 바알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좀 닥치고 있어. 다시 개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다행히 바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보라색 피부의 노인은 바알을 한 번 쳐다볼 뿐으로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제가 이 녀석의 보호자니까요. 데려가야죠.”

“……그건 너희들의 사정이니 내가 참견하지 않겠다. 그것보다 네가 가진 재주다. 어떤 재주를 가지고 있지?”

“제가 가진 재주라… 마법이죠. 제가 다른건 몰라도 마법 하나는 끝내줍니다. 아, 마법은 알고 계시죠?”

“마법사인가!”

노인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노인에게 어울리지 않을 비유일지 모르지만, 꽃이 활짝 핀 것 같았다.

“가진 무장으로 보아 별 볼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설마 마법사가 우리 마을로 찾아올 줄이야. 오늘은 운이 좋군!”

옛날에는 마을에도 마법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늙어서 죽었다. 그는 살아생전 후계를 남기려고 했으나 마법에 재능 있는 이가 없었다. 마을은 마법사가 남긴 물품으로 유지되고 있으니, 마법사의 부재는 지난 몇 년간 노인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환영받으니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우선은 마법 물품이다. 고장난 것들이 많다. 그것들을 고치고 싶군. 가능하겠나?”

“당연히 가능하죠. 그러니 당신들도 약속을 지켜주시길 바라죠.”

“쓸데없는 걱정이다. 우리 칼바람 마을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

“그럼 다행이네요.”

⁂ ⁂ ⁂

테드와 대화했던 노인은 보라색 초원위에 지어진 마을인 칼바람의 촌장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겐 촌장 보다는 대장이라고 불린다. 그는 촌장이면서도 마을의 사냥꾼들을 이끄는 가장 오래 살아남은 전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플레인 하록. 모험가로서 유능했던 그는 대미궁의 심층에서 실수를 했고 동료들과 함께 하스레스로 떨어졌다. 그때가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테드는 마법 물품이 보관되어 있는 집에서 천천히 마법물품을 감정하며 플레인의 대화를 들었다. 처음의 싸늘하기 그지 없는 반응은 테드가 마법사라고 밝힌 순간부터 사라졌다.

그 의도가 명백하게 보였지만 테드의 입장에선 나쁠건 없었다.

“사냥꾼이라…. 여기에도 사냥감이 있나요? 여기가 바빌로니아의 최심층이라 가정한다면 엄청나게 강한 몬스터라 생각되는데.”

“하스레스는 넓다. 초원지대에는 기껏해야 토끼가 전부지만. 서쪽의 숲에는 철뿔 사슴과 화염곰, 마비독 거미가 살고 있다.”

“알기 쉬운 이름을 가진 동물들이네요. 몬스터인가요?”

“그래. 몬스터다. 그러나 이름처럼 귀엽지 않다. 조금만 방심해도 가차 없이 공격해 들어온다. 10년 전쯤에 서쪽 숲 근처에 있던 노푸한 마을이 독거미 떼의 습격을 받아 전멸 당했다.”

“……마을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군요.”

“이전엔 우리 마을을 포함해 3개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남은 건 우리 칼바람 마을뿐이다.

“……쓸데없는 걸 물은 것 같군요.”

테드는 그리 말하며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마법 물품들을 쳐다봤다. 총 20개 정도로 그다지 많지 않았다. 테드가 마음먹고 작업에 돌입한다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일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상황도 마냥 평화로운 것 같지는 않은데… 저와 함께 바빌로니아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어요?”

“그건 불가능하다.”

플레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파수꾼 때문에요?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제가 좀 강하거든요. 그 파수꾼도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데요.”

“파수꾼도 문제지만. 우리는 하스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날 수 없다니… 무슨 저주라도 있나요?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데.”

“우리의 피부가 보라색인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독인이다.”

“…독인이요?”

플레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이 우리를 새로운 종족인 ‘독인’으로 인정했다. 지금의 없는 마법사는 하스레스의 환경 때문이라 말했다. 그는 공기 중에 있는 아주 미세한 독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서 자연스럽게 독인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독이라… 여기까지 오면서 독으로 인한 증상은 없는데요.”

“처음은 괜찮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 후에 발열이나 두통, 구토 등의 증상이 있을 것이다. 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3일 정도 앓을 거다. 조금 괴로워도 죽을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피부가 보랏빛으로 서서히 변한다. 내성이 생겼다는 증거다. 세 달 정도 후면 우리처럼 완전히 보라색으로 변하고 독인이 될 거다.”

“그 독을 치료하는 방법은 없나요? 약초라던가.”

“너도 보라색의 초원을 봤으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스레스에 있는 생물은 모두 중독된 상태다. 그건 식물도 예외 없다. 물론 몬스터도 마찬가지다.”

테드는 조용히 자신의 몸상태를 살폈다. 마력을 일으켜 확인해본 결과 아주 작은 이물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에 손을 얹고 해독 마법인 큐어를 발동한다. 다행히 독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플레인이 감탄 성을 내뱉었다.

“해독 마법인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군.”

“다행히 마법이 먹히네요. 마법사가 있었을 때는 해독했었나요?

“하지 않았다. 그 마법사는 치료계열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해독마법은 종족이 ‘독인’인 되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독인이라고 해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건 잘 모르겠는데요. 혹시 하스레스의 독이 없으면 죽기라도 하나요?”

테드가 가볍게 물었다. 아무리 독인이라고 해도 독이 없으면 죽는다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플레인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죽는다. 하스레스의 독은 독인인 우리에겐 산소나 다름없다. 육체의 내부구조가 아예 바뀐 것이다. 하스레스의 밖을 나가본 적은 없지만 시스템이 그렇게 알려줬으니 틀림없는 사실이겠지.”

“……짜증나지 않나요? 지금 상황에 대해서.”

“감옥 같다고 생각하나?”

플레인이 날카로운 눈을 하며 물어왔다. 테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대로 한순간 감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스레스를 벗어나면 죽는다. 그 사실을 놓고 보자면 테드에게 이 보라색 세상은 거대한 감옥으로 느껴졌다.

“나도 그렇게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다. 비록 좁은 세상이라도 결코 감옥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스레스를 모욕하지 마라.”

“예. 죄송합니다.”

“아니. 너도 그런 뜻은 없었겠지. 그저 앞으로 조심해주길 바랄 뿐이다. 우리 마을에는 거친자들이 많기에 외부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필시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거다.”

테드는 이후로 몇 시간 동안 플레인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마법 물품, 마도구를 수리했다. 수리가 불가능한 마도구는 몇 개 없었고, 부품 교체가 필요한 것은 자신의 아공간에 있는 부품을 꺼내 수리했다.

테드는 플레인이 지켜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과 대화를 나눠 친밀감을 갖게 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중요한 마도구에 허튼 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아공간을 가지고 있군. 혹시 작물의 씨앗이나 생활에 필요한 마도구를 가지고 있나? 또 있으면 나눠줄 수 있겠나? 물론 대가는 치르도록 하지.”

“작물의 씨앗이나… 열매라면 몇 개 있어요. 생활용 마도구는 찾아봐야 알겠네요.”

“대가는 마석이면 되겠나?”

“이곳에서 마석은 그다지 가치가 높지 않겠죠. 좋네요. 그거. 교환하죠. 마석은 쓸데가 많거든요.”

대미궁의 최심층으로 생각하는 만큼 마석의 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을 것이다. 질 좋은 마석은 팔아도 돈이 되고, 스크롤이나 마도구를 제작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마석을 모아두는 곳은 따로 있다. 따라와라.”

테드는 구석에 박혀 드리누워 자고 있는 바알을 깨우기 위해 그녀의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나 여자아이의 육체를 가진 마왕님은 입가에 침을 흘리며 단잠에 빠져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억지로 깨웠다간 한소리 들을 것 같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바알이 아니라 칼바람 마을 사람들이 걱정됐다.

잠시 고민하던 테드는 짐짝처럼 그녀를 어깨에 들쳐 멨다.

“여동생인가? 서로 닮은 것 같지는 않다만.”

“아뇨. 애……. 아는 동생입니다.”

무심코 애완동물이라 말하려다 고쳤다. 바알의 현재 외모는 어린 여자아이다. 바알의 정체를 모르는 그에게 바알을 애완동물이라 말하면, 그자 자신을 좋게 봐줘도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테드가 그의 뒤를 따라 간 곳은 마을의 구석으로 낡은 집이 있었다. 다른 집보다 조금 커다란 집은 창문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익숙하게 문을 잡아 당겨 열었다.

순간 테드는 할 말을 잃었다.

내부를 채우고 있는 것은 보라색빛을 은은하게 내뿜고 있는 마석이었다. 질 좋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하나하나가 순도 높은 마석이었다. 크기는 모두 주먹만 했고, 그 중 하나를 대충 가격으로 환산하자면 100골드는 족히 나갈 정도다.

그런 마석이 집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옛날부터 사용할 일도 없으나 땅바닥에 버리자니 그 가치가 아까워서 모아두고 있었다. 아공간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라. 후하게 쳐주도록 하지.”

“대박.”

바알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며 테드가 감탄성을 흘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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