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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주권결정전.
“선수 교대다. 바알. 막타는 내꺼야.”
보라색 스킨헤드의 남자는 징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는 백염으로 이글거리는 하얀 지옥을 뚫고 나온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육체에 입은 상처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테드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워낙 인상 깊어서 쉽게 잊혀 지지 않았다.
“…바론.”
기억 속에 있는 그 이름을 입술 밖으로 내어 중얼거린다.
바론은 자신의 이름을 듣고 한층 더 짙은 미소로 화답했다.
“좋아. 날 기억하고 있네? 기분 좋은걸! 그때 못 끝낸 걸 해야지?”
바론은 이곳까지 오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를 비롯한 악마들은 북쪽 끝에서부터 시작했다. 바알은 시작하자마자 멋대로 혼자서 움직였다. 아스타로트도 어쩌지 못하는 악마를 서열도 가지지 않은 악마와 인간에 불과한 바론이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론은 마음쓰지 않고 다른 악마들과 함께 다른 국가의 대표들을 상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시시했다. 사탄의 힘이라는 것을 가진 악마들은 시스템의 제약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힘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권결정전에는 아스타로트에게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이 부탁하며 억지로 참가했는데, 생각했던 만큼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변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고 하얀 불의 검이 떨어졌다. 재앙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함께 온 악마들은 하얀 불꽃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재조차 남기지 않고 죽어나갔다.
바론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가지고 있는 루나틱 블레이드의 힘이었다. 마법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루나틱 블레이드는 하얀 불꽃을 베어버리고, 그 힘을 흡수했다. 살아남은 바론은 뒤늦게 섬의 중심에 있는 산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느끼고 찾아왔다.
“바론, 이 빌어먹을 새끼가! 끼어들지 마! 여긴 너 따위가 끼어들 곳이 아니야.”
바알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의 몸으로부터 포악한 기세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바론은 이마에 떠져 있는 3번째 눈과 함께 바알을 쳐다보고선 비웃음을 흘렸다.
“꼴이 말이 아니잖아. 바알? 이미 진거나 다름없는데 뭘.”
평소라면 알아서 기었을 것이다. 아무리 바론이 미친놈이라 해도 바알은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 막대했다. 조금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로 자신을 죽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바알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에 있는 테드가 먼저였다.
“아직 일은 안 끝났어. 지금이라도 좋으니까 빠져. 안 그럼 지금 내 손에 뒤진다.”
“평소라면 지렸을 건데. 지금은 조금도 안 쫄려.”
바알의 따가운 시선을 간단히 무시하며 바알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아스타로트가 내게 이렇게 말했어. 네가 테드 크루시안에게 자비를 베풀 경우, 내가 직접 죽여 버리라고. 아마 다른 악마놈들도 그런 지시를 받았을걸?”
바알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아스타로트라면 충분히 그랬을 가능성이 있었다.
“주제도 모르는 짓거리를….”
바론은 이를 가는 바알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이를 검으로 베어냈다. 파이어볼을 이루고 있는 마력은 곧바로 그의 검인 루나틱 블레이드에 흡수되어 바론의 힘이 된다. 그러나 효율을 최악이라 할 수 있어서, 바론에게 주어지는 힘을 얼마 되지 않는다.
“네 마법은 내겐 통하지 않아! 내가 바로 네 천적이라 할 수 있지!”
바론이 도약했다. 현재 바론은 산으로 올라오면서 루나틱 블레이드로 흡수한 하얀 불꽃 덕분에 최고의 컨디션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와 비교하자면 3배 정도 강하다.
테드가 아공간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라그나로크의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드워프제 검이었다. 물론 마법을 발동할 생각은 없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철소리가 울렸다.
“……이런.”
테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검에 새겨진 마법이 사라지는 것을 쳐다봤다. 마법이 발동되지 않았는데도 마법진이 사라진다. 마법무기는 아예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마법으로 이루어져 있는 물건인 이시스의 경우엔 저 검에 닿기만 해도 파괴될 것이다.
“마법은 안 통한다니까!”
발과 주먹, 검이 연속적으로 몰아친다. 바알과 달리 무식하지 않았다. 난잡해 보이는 그 공격에는 분명히 기술이 존재했다. 테드는 미래를 보면서 피해낼 것은 피해내고, 받아낼 것은 받아냈다.
그러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지금 상태에서 딱 봐도 전사로 보이는 바론의 속도에 대처하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몸이 삐그덕 거린다.
암브로시아를 사용하고 싶으나 상대가 시간을 주지 않았다. 시간을 멈춰도 그는 저번처럼 태연하게 움직일 것이다. 상대하기 최악이었다.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고! 일단 왼팔을 가져갈까?!”
바론의 검이 테드의 왼쪽 어깻죽지를 스쳐지나갔다. 피부가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테드의 고성능인 눈이 빈틈을 찾아냈다. 그 비어있는 옆구리로 검을 찔려들어간다.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마치 지렁이를 연상케하는 움직임으로 바론이 피했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 신법이란거야. 마법사 양반은 잘 모르지?”
바론이 웃으며 어깨를 크게 들어올렸다.
“내 손에 뒤진다고 했다!”
뒤에서 바알이 나타나 바론의 머리를 후려쳤다.
바알은 안중에도 없던 바론은 뒷통수를 얻어맞고 바닥을 굴렸다. 흙바닥을 5번을 구른 그가 일어났다. 지워지지 않은 입가에 미소가 섬뜩하다.
바론은 바알과 테드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좋아. 동시에 상대 해줄게! 생각해보니 둘 다 놓치기 아깝거든! 후하하!”
슬슬 백염이 번져오는 것을 느낀 바론이 진심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산통을 깨듯 시스템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허수차원의 붕괴률 80%를 확인했습니다.]
[주권결정전의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현재 참가자들을 확인. 안전을 위해 강제로 네메스로 복귀합니다.]
[카운트 다운 10. 9. 8….]
“이런 제길!!”
있는대로 인상을 찌푸린 바론이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막 달아오르려던 참인데 빌어먹을 시스템이 산통을 다 깨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진심으로 나선다고 해도 10초 안에 결판을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안 해! 나중에 다시 하자고.”
바론을 힘을 쭉 빼고서 고개를 돌렸다. 짜증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공간을 삼키고 있는 백색의 화염을 쳐다봤다.
반면 테드는 알림창을 보며 안색을 굳혔다. 주권결정전이 다시 이루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바론과 바알을 이대로 돌려보내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특히나 바알의 경우 다시 싸우게 될 경우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라그나로크는 특성상 한 번 사용하면 제어할 수 없으니 이번 같은 행운은 다시 기대하기 힘들다.
‘남은 건 8초! 이 기회를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순 없다.’
다행히도 현재 바알은 테드의 바로 앞에 있었다. 그녀는 언짢은 얼굴로 알림창을 보고 있었다.
테드가 양손을 뻗어 바알의 가녀린 목을 손에 쥐었다.
조금도 딱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웠다. 마왕의 목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크윽?!”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순 없다.”
그 목을 부러뜨리기 위해 힘을 준다. 목을 완전히 분질러 버린다면, 현재의 바알이 회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썩어도 준치. 힘이 없다고 해도 마족의 신체다. 마력으로 힘을 강화시키지 않으면 부러뜨려질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다.”
“…커억…! 컥! …큽!”
4초가 남았을 무렵에 괴롭다는 듯 소리를 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어둠, 권능인 폭식이 테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테드는 영력을 일으켜 권능에 저항했다.
3초. 목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테드는 바론이 덤벼들지 않을까 쳐다봤다. 기우였다. 그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2초. 바알의 눈이 위로 돌아가고, 입술을 통해 투명한 침이 턱을 타고 내렸다.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손바닥을 통해서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 물렁거리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쁜 촉감이었다.
1초. 겉보기에는 확실하게 죽었다. 그러나 어딘가 불안했다. 정말 그 광폭의 마왕이, 이렇게 쉽게 죽었을까? 영력을 움직여서 확인사살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에 의한 전이가 시작되었다.
섬으로 왔을 때와 달리 두통이 덮쳐왔다. 허수차원이 라그나로크로 소멸된 영향이었다.
테드는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을 느끼고 정신을 잃었다.
⁂ ⁂ ⁂
두 눈을 감은 테드는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후두부와 등에 느껴지는 딱딱한 감각은 썩 좋지 않았지만, 몸앞을 덮고 있는 적당한 무게를 가진 그것은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불은 아니었다. 이불이라 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래. 꼭 사이나가 자신의 위에 엎드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이나?!”
두 눈을 번쩍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천장이 없는 하늘이었다. 다만 익숙한 하늘이 아니었다.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는 하늘이었다. 하얀색이었던 구름도 연한 보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머릿속을 뒤지다가 포기했다. 보라색의 하늘이면 유명할 텐데, 자신의 지식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테드는 자신의 몸 위에 있는 정신을 잃은 바알을 무감정하게 쳐다봤다. 부러뜨렸을 목은 어느새 회복되어 있다. 머리를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기대고 있다. 규칙적인 호흡을 보면 잠들어 있는게 틀림없었다.
다행이었다. 그녀보다 먼저 깨어났다는 사실이.
테드가 충격으로 바알이 깨어나지 않게 조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널찍하고 큰 바위 위였다. 바위는 보랏빛을 내는 초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테드는 정신을 잃고 있는 바알을 내려다봤다. 마왕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주권결정전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허수차원으로 오기 전에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본래라면 바알과 테드가 함께 이동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마도 몸이 이어져 있고 허수차원이 불안정했던 것이 이유이리라.
비록 주권결정전 안에서 죽이지 못했지만, 다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테드가 주먹을 들었다. 주먹으로 머리를 내려쳐 박살낼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종속 마법! 상대가 바알이라 조금 불안하긴 한데… 고대 마법 중에서 영혼에 제약을 거는 마법이 하나 있었지.”
스틱스라는 고대 마법이다. 원래는 고대 종족인 레칸 간의 계약할 때 사용하는 마법으로 이걸 약간 변형해서 사용하면 종속마법이 될 수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바꾸는 것이고, 영력도 얼마 되지 않기에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바알을 완전히 종속시킬 수 있냐는 것이다. 그녀는 폭식이라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영혼에 마법을 걸어도 폭식으로 간단하게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확률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허나 확실한 것은 그녀의 힘이 탐난다는 것이다. 에이션트 드래곤 하나를 주먹 한 방으로 없애버리는 그 힘.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반대로 실패했을 경우의 불안도 남는다.
잠시 생각하던 테드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계약의 고대 마법을 거는 동시에 종속의 저주를 건다. 물론 육체가 아닌 영혼이다. 테드는 영혼을 볼 수 있고, 영력을 활용한다면 이론적으로 가능했다. 다만 성공과 실패는 장담할 수 없다.
“망설일 시간도 아깝군. 좋아. 한다. 실패하면… 바로 죽이지. 뭐.”
애써 긴장을 풀면서 꼼짝도 않는 바알을 향해 손을 뻗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