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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주권결정전.
테드는 집행관 3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으로 힘을 증명했다.
그날 이후, 귀족들이 라이거에게 주권결정전에 관한 주제를 입에 올리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었으니 어느 정도 테드와 라이거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테드의 무력을 보았음에도 믿지 못하겠다는 귀족들이 있는 반면에, 테드를 조력한다는 이유로 주권결정전에 참가자격을 원하는 귀족들이 있었다.
또한 테드의 실력을 알아본 귀족들이 조출한 선물과 함께 별궁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무작정 그들의 선물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 중에선 테드가 처리하기 곤란한 물건도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받는 순간 강제로 정치판에 뛰어들게 되는 선물 같은 것이라거나.
“안녕하세요. 테드 님.”
주권결정전까지 일주일을 앞두고 애쉬가 별궁을 찾아왔다. 애쉬가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고, 라이거처럼 시답잖은 이유로 찾아오는 경우도 없었기에 테드는 하던 작업을 멈추고 그를 맞이했다.
애쉬의 얼굴은 빈말로도 좋지 못했다. 피부는 메마른 논밭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거칠었고, 평소 윤기가 돌던 검은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며 여기저기 뻗쳐 있었다. 안경아래의 두 눈에는 진한 다크 서클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의 깔끔한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지친 인상의 남자만이 있었다.
애쉬는 테드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미소였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무슨 일 있었나요?”
“무슨 일이라… 예. 뭐, 있었죠. 아주 많이요.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지금은 170시간 정도 깨어 있는 상태죠. 마법약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데 그것도 한계죠. 오늘밤은 반드시 자야겠습니다. 정말로.”
애쉬가 기다렸다는 듯이 푸념을 털어 놓았다.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말을 보아하니 상당히 쌓여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뭐… 오래 잡을 수 없겠네요. 그래서 절 찾아온 이유가…?”
“제가 테드님을 찾아온 이유는 몇 개 없죠. 테드 님도 짐작하고 계시겠죠. 정보를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잠을 못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주권결정전을 앞두고 대륙 곳곳에 파견되어 있는 첩보원들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양질의 정보가 일제히 쏟아졌기 때문이다. 애쉬는 잠까지 줄여가며 정보를 정리했다.
“그래도 굳이 직접 찾아오는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저 정보 전달이 목적이면 사람을 시키거나, 수정구를 이용해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쉬고 싶었습니다. 테드님을 만난다는 건 아주 좋은 핑계죠.”
웃으며 말한 애쉬는 사이나가 건네는 커피를 받았다. 테드는 그의 말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애쉬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자신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애쉬는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몸을 지배하려는 잠기운을 찍어누르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딥크스에서 일이 터졌습니다.”
“……지금 시기에 말이죠. 보통 일은 아니겠죠. 어떤 일이죠? 내전이라도 일어났어요?”
테드는 스스로가 말하고서도 내전에 대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딥크스는 여황이 권력을 꽉 쥐고 있다. 권력의 관리유지까지 완벽하니 반역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고,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곧바로 진압될 것이다.
“사탄교. 사탄교가 딥크스에 나타났습니다. 악마가 마족들을 선동하고 있어요. 천족들이 천사를 따르듯, 마족들이 악마를 따르고 있어요. 이대로 있으면 딥크스가 프리티스처럼 될 수도 있어요.”
“사탄교가 대외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군요. 주권결정전이 시작되는 시기를 노린 거군요.”
테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동안 드래프리온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탄교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 활동하는 이유는 지금 모든 국가의 주목도가 주권결정전에 쏠리기 때문이었다.
“최신 소식을 말화자면, 메피아 여황이 사탄교를 향한 강수를 두기 시작했어요.”
“강수… 라는건?”
“사탄교를 딥크스의 공적으로 선포했으며 병사를 파견했습니다. 악마와 마족간의 전투가 실현되었어요. 문제는 사탄교를 옹호하는 마족들이 나오면서 동족상잔의 꼴이 났다는 거죠.”
“…….”
테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의 나라 이야기다. 라고 생각하며 넘어가는건 불가능했다. 테드는 사탄교와 너무 연관되어 있었다.
“……현재 전투 양상은 어떻게 되죠? 사탄교가 이기고 있나요?”
“그럴리가요. 아무리 사탄교라고 해도 상대는 딥크스. 대륙에 두 개밖에 없는 제국 중 하나입니다. 사탄교가 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딥크스에서 사탄교를 사라질 거라 보고 있어요.”
사탄교가 지고 있다는 것은 서열을 가진 악마들이 나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알이 나섰다면 딥크스는 단숨에 사탄교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것이다. 테드는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탄교가 어떤 목적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모르겠는데. 사탄교의 목적이 뭐죠?”
“그건 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한가지 신경쓰이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2개월 전까지 딥크스의 황궁에 그레온 그레고리 라는 악마가 머물렀다고 하더군요. 메피아 여황이 직접 정보를 통제한 탓에 뒤늦게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레온!”
테드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레온 그레모리. 서열 32위의 악마. 과거를 보는 권능을 가진 성가신 놈이다.
“놈이 왜 딥크스 황궁에 찾아갔는지, 메피아 여황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 도리가 없어요.”
메피아 여황은 철저했다. 그레온이 황궁에 머물렸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었지만, 딱 거기 까지였다. 그 외에 그레온과 관련된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
“상황을 보자면 무언가 협상을 했고, 결렬 되었기에 사탄교와 딥크스가 전투를 벌였다는 겁니다만, 무언가 석연치 않아요. 정말로 협상이 결렬 되었는지, 아니면 협상이 아닌 무언가가 있었는지.”
“벌어진 전투 마저도 계획의 일부일지도 모르죠. 항상 고마워요. 애쉬 씨. 이런 정보를 가져다 줘서.”
“괜히 심려만 끼쳐드리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만, 사탄교와 관련된 정보는 우선적으로 테드 님께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권결정전에 대한 다른 나라의 정보인데… 필요하신가요?”
“아뇨. 별로 필요 없는데요. 아, 그래도 제가 꼭 들어야 하는 정보라면 듣도록 하죠.”
애쉬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없네요. 그들이 테드님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그래요? 그럼.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
“사이나 님의 음식은 항상 맛있죠.”
애쉬의 얼굴에 아주 약간이지만 화색이 돋았다.
⁂ ⁂ ⁂
테드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서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차분히 주권결정전이 시작되는 오후 12시 정각을 기다렸다. 앞으로 1분. 테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 주권 결정전에 참가한 자들 대부분이 죽을 것이다. 싸우다 죽는 것이 아니라, 휘말려서 죽는다. 그것에 대한 미약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죄책감. 옛날이라면 느껴보지도 못했을 그것이 느껴졌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언젠가 전장에서 보았던 병사들처럼, 죄책감이 무너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또 언제든지 떨쳐 낼 수 있는 미약한 죄책감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도 불안했다.
테드는 전투에 앞서 습관적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아공간의 물품을 확인했다. 몸은 최상이었으며, 아공간에 들어서 있는 물품 중에 빠진 것은 없었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다.
[주권결정전의 참가자격이 있음을 확인되었습니다. 참가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의 알림창을 한 번 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참가의사를 표했다.
[테드 크루시안.]
[인간종, 펠리스 대표. 확인완료.]
[허수차원 122로 전송합니다.]
테드의 몸이 방안에서 사라졌다.
⁂ ⁂ ⁂
주권결정전은 네메스 대륙과 조금도 관련이 없는 허수 차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환경은 네메스 대륙과 완전히 동일하기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무리가 되는 점은 없었다.
또 주권결정전의 룰과 필드에 대한 정보는 시스템에 의해 참가자가 허수 차원으로 이동하면서 자동적으로 머릿속에 주입된다.
이번 주권결정전이 벌어지는 허수 차원은 하나의 섬이었다. 크기는 대도시의 5배 정도 되며. 강이 있고, 산도 있으며, 숲도 있는 곳이었다.
이번 주권결정전의 룰은 홍주(虹珠)를 찾는 것이다. 무지개 빛을 내는 구슬인 홍주는 섬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이걸 찾아내는 것이다. 홍주를 가장 많이 모으는 세력이 이번 주권결정전의 승리자가 되어 온갖 자원이 넘쳐나는 섬인 유토피아의 주권을 갖는다.
테드가 나타난 곳은 섬의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의 아래에 있는 숲속이었다. 테드는 어떻게 움직일지 잠시 고민하다가 산으로 올라갔다.
주권결정전이 실행되는 시간은 총 4시간이다. 다르게 4시간이 경과할 때까지 홍주를 찾고 지켜야 한다. 아니면 적의 홍주를 빼앗거나.
그러나 승리 방법은 또 한 가지 있다. 어떤 의미로 홍주를 찾는 것보다 매우 간편하다.
전멸.
상대 세력의 대표자들을 전멸시켜 강제로 탈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후에 남아 있는 자가 승리한다. 홍주를 찾을 필요도 없고, 4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기척을 숨기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두 발로 거침없이 산으로 오르던 테드가 굉음이 울리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강의 하류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서쪽의 늪지대에서 불길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북쪽 눈의 언덕에서 깜짝 놀란 사이클롭스가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주권결정전이 시작한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국가의 정예들이 참가하여 날뛰고 있는 이곳의 분위기는 치열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다. 또한 섬 자체에 있는 몬스터들도 범상치가 않았다. 아마도 홍주 몇 개는 몬스터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저 눈에 보이는 사이클롭스라던가.
“이 섬, 어딘가에 바알이 있겠지.”
바알의 모습은 보이진 않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로워진 직감이 확실하다고 고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전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오늘 여기서 둘 중에 한 명을 죽을 것이다.
“선수필승.”
선공권은 이쪽에 있었다.
그리고 함부로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