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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주권결정전.
28. 주권결정전.
주권결정전이 일어나기 3개월 전, 테드는 펠리스의 왕궁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생각했던 만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테드는 펠리스의 대표로 혼자서 참가하기를 바랬는데, 주권결정전에 테드 혼자 단독으로 참가한다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고위 귀족들과 집행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주권 결정전이란 공을 쌓기 좋은 전장터이기 때문이다. 공적을 위해 목숨을 버릴 인간들은 수두룩했다. 특히나 현재의 펠리스는 안정되어 있어 공적을 쌓기 힘든 시기인 것도 한몫했다.
국왕인 라이거가 대놓고 지지하고 있어 불만을 표출하는 자들은 없으나, 테드를 보는 눈들은 곱지 않았다. 테드의 정확한 실력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실력도 직접보지 않은 그들은 대부분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들의 입장에선 주권결정전의 참가 인원이 단 한 명이란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테드가 수 많은 참가 인원 중 한명이었다면 그들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펠리스 왕국 출신이라 하기엔 애매한 테드 한 명을 보내는 것은 주권결정전을 포기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는 것으로 들린 것이다.
“시끄러워 죽겠더군. 신하놈들은 요즘 입만 열면 주권결정전에 관한 것을 얘기하고, 뿐만 아니라 아침마다 상소문으로 올려서 미치겠다.”
테드의 별궁으로 찾아온 라이거가 사이나가 건네주는 홍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는 테드가 별궁에 머물면서 가끔씩 적은 호위를 데리고, 혹은 호위도 없이 별궁으로 찾아왔다. 지금은 왕궁과 이어져 있는 비밀 통로로 온 것이니 호위가 없는 쪽이었다.
“그거 참 안됐네요.”
테드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최근 들어 찾아오는 빈도가 늘었다. 이전에는 2주에 한 번 이었다면 요즘에는 1주일에 2번 정도다. 더군다나 올 때마다 하는 소리의 대부분이 저것이었다.
은연중에 깔려 있는 네가 어떻게 해봐라, 라는 그 뜻을 테드가 모를 리가 없었다.
테드는 모른척했다. 정치에 관련되는 일 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테드에게 있어 정치란 가만히 있어도 이유 없이 피곤한 곳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아슬아슬하다. 라이거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나다보니 자신을 찾아오는 귀족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덤으로 사이나의 미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는 시간 남아도는 귀족들도 있었다. 자신에게 사이나를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귀족도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과인이 스트레스로 죽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해결책을 내기로 했다.”
“드디어 해결책을 찾으셨군요. 라이거 전하라면 확실하겠죠.”
“해결책은 원래부터 몇 가지 있었다. 단지 단점이 있어서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지.”
“기밀이 아니라면 해결책이란걸 알 수 있을까요?”
지난 몇 개월 동안 질질 끌고 오던 문제였고, 거짓말로도 자신과 관련 없다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문제였기에 궁금하긴 했다.
“첫 번째로 본보기다. 본보기로 상소문을 올린 한 귀족의 머리통에 철퇴를 꽂아 넣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닥치게 되지.”
“……해결책이라기 보단 엄청나게 문제인데요.”
결과적으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신하를 죽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폭군이라 불리는 라이거라 할지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당장의 소란은 가라앉을 테지만, 그보다 큰 화가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래. 숙청은 이미 끝나 죽일 놈이 없다는 게 문제지. 그것들은 시끄러우나 제 할 일은 하는 놈들이다. 지금의 펠리스를 유지하기 위해선 필요한 것들이지.”
당연히 농담 삼아 말해본 것이라며 라이거가 뒷말을 덧붙였다. 테드로선 라이거가 행한 숙청을 알고 있으니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매우 살벌한 농담이었다.
“두 번째로는 적당한 자들을 골라서 주권 결정전에 참가 시키는 거다.”
“그건….”
“그래. 그대와의 계약에 위반되는 거지. 하지만 한, 두 명 정도는 상관없지 않나?”
금색 머리카락 아래에 있는 붉은색의 눈과 푸른색의 눈이 빛을 반짝였다. 그와 자신이 나눈 계약은 입으로 통한 구두 계약일 뿐이다. 계약서는 어디에도 없다. 내용을 바꾸려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그들을 챙겨줄 여유는 없습니다. 분명히 죽을 겁니다. 적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제 마법에 휘말려서.”
“제것들이 참가 하고 싶다 해서 참가시켜 주었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라고 말하고 싶으나, 아무리 그래도 과인의 신하들이다. 그곳이 사지임을 알면서도 밀어 넣을 수는 없지. 그대의 실력이라면 몇 명 정도는 보호하는 게 가능하지 않나?”
“……드래프리온에서 사탄교가 주권결정전에 참가하겠다고 공언했지요. 이번 주권결정전에 어떤 악마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그 놈들은 시스템의 제약을 받고 있지 않아요.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펠리스 왕국의 최고의 무력이라 손꼽히는 집행자로도 고위 악마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입니다.”
“그러고 보니 반 년 전에 프리티스 제국이 사탄교에 삼천에 달하는 병사를 원정을 보냈다가 전멸했었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한 명의 악마에게 당했다고 하지. 집행자를 격하하는 그 발언은 불쾌하지만 이해가 가는군.”
불쾌하다고 하지만 라이거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는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철저하게 웃어야 할 때와 화내야 할 때를 구분했다.
테드가 가장 많이 본 그의 표정은 웃는 표정이었고, 다음으로 무표정이었다. 그것또한 실제로 웃고 싶어서 웃는 건지, 억지로 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그대가 그들 앞에서 힘을 보이는 것이네. 그대의 힘을 본다면 뭐라고 하지 못하겠지.”
“……제 힘을 본다고 해서 그들이 이해할까요? 어디 산을 날리는 걸 보여줘야 하나요?”
주권결정전까지 남은 시간은 3개월이다. 적은 자신의 힘을 알고 있었다. 여기서 마냥 감추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원활하게 움직이려면 숨겨야 할 것은 숨기되, 보여야 할 것은 보여야 했다.
“긍정적이군. 과인은 그대가 조금이라도 고민할 줄 알았다.”
“이대로 있다면 귀족들이 저에게 압박을 넣을 것 같거든요. 저도 시끄러운건 질색인지라 조용하게 만들고 싶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찾아올걸 그랬군. 괜히 그대를 배려한답시고 참았다가 스트레스만 더 받은 꼴이다.”
그가 말없이 찻잔을 사이나에게 내밀었다. 사이나는 찻주전자를 기울여 그의 잔에 홍차를 따랐다. 그는 찻잔에 담긴 붉은색 액체를 한 번 보더니 조심스레 입을 가져다 댔다.
“언제 봐도 그대의 메이드는 유능하군. 쓸데없는 말이 없다는건 좋은 일이다. 모든 화근은 입에서 부터 시작된다고 하니.”
“전하의 메이드들도 유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특수 훈련을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건 소문이 과장됐군. 훈련이 아니라 단순한 교육일 뿐이다. 전투 능력은 가지고 있으나 기사보다 약간 더 강한 정도가 전부다. 문제는 말이 많다는 거지. 아마 왕궁에 울리는 소리 중 절반 이상은 메이드에게서 나오는 것일거다.”
“뭐… 활기차서 좋겠네요.”
“그건 그렇지. 그것들이 없었으면 왕궁은 사막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라이거가 찻잔을 내렸다. 잔에 담긴 내용물은 없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집행관 3명과 그대 한명을 대련에 붙일 생각이다.”
“3명이라 괜찮네요. 관전자들은 귀족들이겠죠.”
“집행관 3명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건가. 놀랍군. 대련 시간은 일주일 정도 뒤가 되겠군. 그들도 스케줄이 있으니 어쩌면 더 늦어질지도 모른다. 장소는 왕궁 지하에 있는 훈련장을 사용하도록 하지. 소문이 퍼질 내용이라 해도 구태여 평민들에게 까지 알릴 일은 아니니.”
“전하가 편하신대로. 그런데 집행관 3명의 동의도 얻지 않으신건가요?”
“과인이 하라면 해야지. 그들이 거부할 수 있으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테드는 라이거의 명령이 떨어지지 말자 알겠다고 무릎을 꿇는 집행관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었다. 집행관이 라이거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럼 그리 알고 저도 준비하도록 하죠.”
“그대가 준비할게 뭐있나. 미리 말해두는데 사상자가 있어선 안 된다. 그대가 적당히 봐주면서 하거라.”
“…봐준다니. 집행관은 펠리스 최고 무력입니다. 전하.”
“그대의 힘이라면 애쉬 경에게 전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집행관 전원이 달려든다고 해도 그대 하나를 이길지… 과인은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패배를 생각하고 있지. 그대의 힘은 상식을 벗어났다.”
라이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드가 별궁에 머무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집행관이 되라거나, 펠리스 소속이 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테드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슬슬 올때가 됐군.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그의 말이 끝나는 것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입구에서 애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듣지 않아도 뻔했다. 사라진 국왕을 찾아 온 것이다.
애쉬는 일어나 있는 라이거를 보고서 자신의 이마를 잡았다.
“…또 여기 계셨습니까. 전하. 여기에 오는건 막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발 말없이 사라지는 것은 그만둬 주시지 않겠습니까?”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을 뿐이다. 경은 호들갑이 심하군.”
“국가의 중심이 말도 없이 사라졌는데 호들갑을 안 떨게 생겼습니까.”
“어차피 경도 과인이 이곳에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익숙해지고도 남았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진다는 건 방심을 뜻합니다. 전하.”
“경은 과인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딱딱하군. 다른 자들을 상대할 때는 융통성을 잘도 발휘하면서 말이야.”
라이거가 툴툴 거리며 방을 벗어났다. 애쉬는 라이거의 뒤를 따르기 전 테드와 사이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하고선 라이거가 혹시라도 사라질까봐 곧장 달려서 라이거 뒤에 붙었다.
“잘 어울리는 주종이야. 그렇게 생각 안 해?”
테드가 사이나를 향해 물었다. 사이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가 보기엔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테드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느때와 같이 집무실에 앉아 있는 메피아는 테드의 위치를 파악한 정보를 받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위치는 펠리스 왕궁의 별궁.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테드 크루시안은 펠리스의 대표로서 주권결정전에 참가할 예정이다. 거기까지는 손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본 미래대로 행해지느냐는 것이로군. 차라리 이번 주권결정전은 포기하는 게 낫겠어.”
자신이 준비한 특수 병사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보고 있다. 상대는 시간까지 멈추는 어처구니없는 괴물이다. 일회용 병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프리티스 놈들은 아예 손을 대지도 않았지.”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렸을 뿐만이 아니라, 굴욕을 감수하고서 직접 연락을 취해 테드 크루시안의 위험성을 알렸다. 그러나 프리티스 제국은 반신반의 했으며, 드래프리온에 자리잡은 사탄교와 악마의 등장에 테드 크루시안은 이미 생각 저편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프리티스 제국은 주권결정전이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악마를 죽일 수 있을지 생각하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악마 놈들은 이제 와서 접촉을 해왔고. 골치 아픈 일들 투성이군.”
무엇보다 지금 당장 문제인 것이 사탄교의 악마가 접촉해온 것이다. 접촉해온 악마는 그레온 그레모리다.
은밀하게 찾아왔다면 몰라도 아예 대놓고 성문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서열 제 32위의 악마이다 보니 마족들의 호의를 받고 있었다. 그레온 그레모리는 성에서 기거하면서 무엇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방안에 틀어박혀 놀고먹는 중이다.
메피아의 눈에는 마족을 선동하려는 준비 작업으로 보였다.
현재 그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멀리 있는 테드나 프리티스가 아니라, 곁에 있는 그레온이었다.
“함부로 대했다간 마족들의 비난이 쏟아지겠지.”
천사와 천족.
악마와 마족.
그 어느 경우도 뗄 수 없는 사이다.
다행인 점은 마족들이 천족이 천사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대접 받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면 원하는 대로 대접해주겠다만, 얼토당토않은 제안이라면 단칼에 죽이겠다.”
메피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진심을 내비쳤다.
마족은 악마의 사용하기 좋은 노예가 아니었다. 악마라는 이유로 마족을 지배하려 든다면, 그것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메피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마음 한켠으로 후자 쪽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후자라면 스승을 끌어들일 구실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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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