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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맞선.
강철의 무기 실험은 수아가 깨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6시간 정도이고, 횟수로 따지자면 200이 넘는다.
베르만과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한 것도 수아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다. 그때의 베르만은 반쯤 정신을 놓고서 질문에 주저리주저리 있는말 없는말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그의 말을 정리하자면 우선 베르만은 처음부터 헤타리온 가문을 노리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통해 맞선을 제의 받은 것이 게기가 되어 지금의 범행을 준비했다. 범행의 준비라고 해봤자 무기를 옮길 마법 주머니를 준비하고, 범행 수단인 저주독을 암시장을 통해 구매한 것이 전부다. 베르만에게 있어 이번이 4번째 범행이었다.
데리고 온 암살자는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 자신의 신변을 위해 구매한 것이며, 방안에 설치되어 있는 수정구를 알아차린 것도 암살자의 눈썰미였다. 그가 간과한 게 있다면 저택에 테드라는 괴물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공정의 설계도인데 본래 베르만은 비공정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돈이 되는 것은 알아도 처리하는게 쉽지 않은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헤타리온이라는 가문 하나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튜논이라는 왕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어떤 차이인줄 잘 알고 있었다. 베르만도 튜논을 적으로 돌리는 것에는 거부감을 느꼈다. 허나 베르만의 계획을 알고 있는 암살자가 제안을 해왔다. 비공정 설계도를 안전하게 처리할 루트와 안전을 보장해줄테니 설계도를 얻으라는 것이다.
물론 베르만은 암살자의 말만을 듣고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니었다. 비공정 설계도의 값과 자신의 안정성을 포함해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제안에 승낙했다.
암살자가 비공정 설계도를 판매하는 곳은 드래프리온이었고, 지금의 드래프리온은 밀항이 활발한데 단속도 제대로 하지 않는 상태이며, 멀리 떨어져 있는 튜논이 마음대로 나설수도 없는 곳이었다.
베르만은 비공정 설계도와 강철의 무기를 처분한 돈으로 드래프리온에서 떵떵 거리며 살 계획을 세웠다. 드래프리온이 지루해졋을 무렵에는 적당히 시간이 지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을 때 몰래 대륙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테드는 암살자와 베르만의 처분을 강철에게 맡겼다. 이건 자신이 아니라 강철과 튜논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자네들과 먹는 식사도 이게 마지막이구만. 정말 아쉽네.”
테드와 사이나가 떠나는 날인 오늘은 마지막으로 저택 식당에 앉아 겅철과 수아와 함께 식사를 나누고 있었다.
강철은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고 있었고, 수아는 아닌척하지만 침울해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단지 한 달 조금 넘는 시간동안 같이 생활한 것뿐이지만 정이 든 것이다.
“좋은 인연이었어요. 좋은 선물도 받았고요.”
“자네가 준 도움에 비하면 비하기 부끄러운 물건이네만.”
테드는 헤타리온에게서 물건을 2개 받았다. 헤타리온이 공들여 만든 물건들로서 내다팔아도 어지간한 저택보다 비싸게 팔리는 것들이다. 물론 테드는 이것들을 팔 생각이 없었다.
하나는 전기톱. 훌륭한 대화수단인 이것은 사람하나를 순식간에 갈아버릴 정도의 흉악한 무기다. 장점은 바위까지 손쉽게 베어내는 절삭력이다. 어지간한 검은 그냥 썰어버린다. 단점은 마석을 자주 갈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에너지 소모가 컸다. 구태여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기톱이 아니라 마석톱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나이프였다. 이건 테드가 사이나를 위해 고른 물건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강철이 가지고 있는 것은 테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선 무기의 경우, 마법사인 테드가 사용하는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인첸트를 위해 그가 만든 검을 몇 십개 사들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회용이었다. 무기는 마법의 보주인 이시스로 충분했다.
그리고 갑옷. 네메스 대륙 최고의 방어구라 할 수 있는 ‘위광’이 있는 테드에게 있어 거추장 스러운 물건일 뿐이었다. 그가 만든 방어구는 특수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바알의 일격을 막아낼 정도의 방어구는 없었다.
테드가 나이프를 선택한 것은 사이나와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철이 간단하게 백설(Snow White)이라 이름붙인 이건 이름대로 새하얀 도신을 가지고 있었다. 티끌 하나 없어 새하얀 도신은 짧았다. 용도는 전투가 아니라 생활용에 있었다. 물론 전투용으로도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참고로 강철은 나이프에 장미를 새기려다가 실패해버려 새하얗게 되었다고 했다.
“너무 좋은걸 받아서 그냥 가기 미안할 정도인데요.”
“내 손녀를 구해 주었는데 그 정도가 아니면 수지가 맞지 않네. 나는 더 가져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네. 가져가겠나?”
“그럼 센테나리오로.”
“차라리 날 죽이게. 그건 절대로 안 되네. 절대!”
물론 센테나리오를 가져갈 생각은 없었다. 밖의 도로는 마땅치 않았고, 센테나리오를 관리하는 것도 힘들었다.
테드는 실실 웃으며 수아 쪽을 쳐다봤다. 수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실실 쪼개기나 하고. 기분 나쁜데.”
“아니, 네가 우리한테 이런 걸 줄줄은 몰랐거든. 뜻밖이었지. 무기같은 것만 만들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잘 만드는 구나 싶어서.”
“……대장장이가 무기만 만들 줄 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마이스터는 뭐든지 만들줄 알아야해.”
수아가 자부심이 담아 말했다.
그녀가 테드와 사이나에게 선물한 것은 브로치였다. 특별한 능력은 없고 은색의 복잡한 문양을 하고 있는 손바닥의 반도 하지 않는 작은 브로치다.
테드는 수아를 놀리기 위해 가슴팍에 달았다. 그러나 효과는 별로 보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이런 멋진 물건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사이나가 정중하게 말했다. 그녀의 메이드복, 가슴팍에는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액세서리 같은 자기를 잘 꾸미지 않는 그녀가 자발적으로 브로치를 단 것은 매우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별, 별거 아니야.”
수아가 얼굴을 붉혔다. 수아는 진심으로 말하는 것에 약했다.
그 후로, 강철이 술을 마셔야 한다고 권유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헤타리온의 저택을 나설 수 있었다.
저택의 입구에선 애쉬가 싱글벙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테드 님.”
“어제도 수정구로 대화는 나눈 것으로 아는데요.”
“직접 보는 것은 오랜만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제 부탁하신 걸 조사해뒀습니다. 흙 발톱 암살단은 뒷세계에선 제법 유명해서 조사하기 수월했지요. 암살단장이라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굳이 테드 님이 나설 필요도 없을 정도에요. 당장 놈을 잡아서 대령할까요?”
테드는 베르만이 데려온 암살자에 대한 정보를 애쉬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애쉬는 언제나 그렇듯 정보를 가지고 왔다.
“관둬요. 여긴 펠리스가 아닌 튜논이고, 분노하신 강철 헤타리온 님께서 나서기로 하셨으니까요. 그보다 궁금한 것은 놈들과 드래프리온과의 관계인데요.”
베르만의 말에 의하면 암살자가 비공정 설계도를 드래프리온에 팔라고 제안을 해왔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드래프리온은 사탄교의 지배하에 있는 곳이다. 물론 사탄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확대된 걱정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테드는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확인해야만 했다.
“요즘 네메스의 뒷세계는 드래프리온과의 밀무역으로 시끌벅적합니다. 드래프리온의 상층부가 개판이 되면서 단속을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지 않기 때문이죠. 흙 발톱 암살단은 테드님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사탄교의 끄나풀이 아닙니다. 밀무역으로 이득 좀 챙겨보려는 하이에나 일뿐이죠.”
“사탄교와 관련이 없다면 됐어요. 신경 꺼도 상관없겠네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애쉬가 얼굴에 띄운 미소를 지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걱정을 가지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번 기회에 밀무역의 품목을 조사해봤습니다. 대부분이 무기나 방어구였으며, 일부가 식량이었습니다. 배의 재료가 되는 목재도 밀무역되고 있더군요. 테드 님이라면 아시겠죠. 이것들은….”
“전쟁에 필요한 것들이죠.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죠. 드래프리온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군요. 그것도 대놓고.”
밀무역에 관한 것은 조금만 조사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마 각국의 정상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애쉬가 이제야 알게 된 것은 그가 드래프리온 밀무역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악마에 대한 것을 위주로 정보를 긁어 모으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네메스의 국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건가요?”
“밀무역에 대한 단속은 하고 있습니다만,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오히려 귀족들이 밀무역에 관여해서 돈을 벌기도 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들은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자신들이 이길거라 장담하고 있지요. 심각성을 모릅니다.”
네메스 대륙은 하나로 이루어져 있기에 항해 기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다. 해로 보단 육로를 이용했다. 섬이라는 이점이 있는 드래프리온은 침략하기 힘든 곳이지만, 반대로 생각해 드래프리온으로부터 침략 받기도 힘들었다. 그것이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발상이었다.
“만약에 사탄교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언제 전쟁을 일으킬까요?”
테드가 진지한 얼굴로 애쉬를 향해 물었다. 애쉬는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탄교가 전쟁을 일으켜서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제가 사탄교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주권결정전이 일어나는 시기를 노릴 것 같군요. 모든 국가들의 시선이 주권 결정전에 몰릴테니까요.”
“그런데 사탄교가 주권결정전에 참가할 가능성도 있겠죠?”
“드래프리온의 왕궁을 차지했다면 당연히 용왕의 옥쇄를 얻었겠지요. 왕의 증거인 그것을 가졌다는 것은 참가 자격을 얻었다는 거겠죠.”
분명히 주권 결정전에 나올 것이다. 테드는 여기서 직감을 느꼈다.
“주권 결정전이 얼마나 남았죠?”
“대충 1년하고 조금이군요. 물론 테드 님이 참가하시는 것이니, 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전 조금 걱정되는데요.”
“그런 것 치고는 자신만만해 보이는군요.”
“이번 주권결정전에서 사탄교가 나선다 해도 어쩌지 못하는 아주 화끈한 마법을 선보이려고요.”
⁂ ⁂ ⁂
“주권 결정전?”
바알이 아스타로트를 향해 되물었다. 아스타로트는 서류에 눈을 떼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바알 네가 참가한다면 승자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승자의 특권인 유토피아의 주권을 가질 수 있겠지.”
“내가 그딴 시시한 곳에 나갈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퉁명스럽게 말한 바알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푹신한 배개에 얼굴을 묻었다. 무릎을 침대에 대고 세워져 있는 양쪽 종아리가 허공에서 천천히 발길질을 했다.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테드 크루시안이 나온다고 해도?”
테드의 이름에 바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와의 싸움은 아주 오랜만에 만족스러움을 선사했으며,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은 빠르게 성장한다는데. 혹시 그때보다 성장한 것은 아닐까?
그녀는 아랫도리로 슬금슬금 손을 내리다가 관뒀다. 어차피 손장난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녀석이 참가하는지 어떻게 알고?”
“대륙의 중요한 일에는 빠지지 않는 놈이니까. 그리고 설령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도 참가할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가 주권 결정전에 참가한다고 공표하기만 해도 충분히 놈은 참가할 테니까.”
바알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양팔을 활짝 펼친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기운차게 외쳤다.
“씨발! 좋아! 달아오르는데!”
요근래 들어 지루한 일만 있어서 무기력하게 있던 바알이었다. 재밌는 일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학살의 경우도 처음에 짜릿함은 느낄 수 없었다. 학살당하는 놈들의 목숨 구걸이나 저주의 말은 항상 똑같은 래퍼토리였기 때문이었다. 입으로는 살려 달라, 저주 한다 거리지만 행동으로 발버둥치는 놈들은 없었다.
“네가 참가한다니 다행이군. 저번처럼 놓치는 실수는 범하지 말기를 바라지.”
“아, 개씹썅, 그 얘기 좀 꺼내지 마라. 내가 존나 미안해서 네말대로 얌전히 있어 주잖아? 이제 그만 우려먹을 때 됐잖아. 이미 맹물이라고.”
“미안하군.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어서. 언제 마왕에게 이런 건방진 말을 해보겠나? 네가 이해해라.”
“나처럼 관대한 마왕이 아니라, 다른 두 새끼였으면 넌 진즉에 뒈졌어, 새꺄.”
“근데 넌 알고 있냐? 그 놈의 주권결정전 때가 딱 3년째 되는 날인걸.”
바알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물었다. 서류를 넘기던 아스타로트의 손이 잠시 멈췄다.
잊을 리가 없다.
3년. 그것은 바알에게 받은 기간이었다. 그 기간 안에 바알의 앞에 미카엘라를 불러내지 못하면 바알의 손에 죽는다. 그런 계약이었다.
“…문제없다. 네가 주권결정전의 다른 참가자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돌아오면 그토록 기대하던 여자와 만나게 해주겠다.”
“손 떨고 있는 거 다 보여 새꺄.”
“…….”
아스타로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계획의 실패가 더 두려웠다.
“딱 3년째가 되는 날이니까. 아슬아슬 한 거지? 응?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봐. 가능성은 몇 퍼센트야?”
아스타로트의 뒤로 천천히 다가온 바알이 붉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성공할 확률은 대략… 65%다.”
“네가 내손에 뒈질 확률이 35%나 되는 거야? 이야~. 스릴 넘치겠네.”
“…….”
아스타로트는 성공확률이 20% 라는 사실을 감추었다. 그녀가 알면 더욱 빈정거릴 것이며, 짜증을 부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런 말 하는 새끼들이 꼭 실패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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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