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209화 (209/277)

209====================

27. 맞선.

[강철 헤타리온 님 이시죠? 지켜보고 계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손녀 분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죠. 저주독에 중독된 상태이니까요. 제가 아주 약간의 방법만 취하면 아름다운 손녀 분은 영원히 잠들겠죠. 본론에 들어가자면 저는 강철님과 조금 일방적인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테드는 그의 말을 듣고 당장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을 멈췄다.

공간 마법을 사용한다면 베르만을 죽이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독에 중독된 수아를 구하는 것은 정보가 없는 지금으로선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저주독이다. 마법이 아닌 주술로 만들어낸 저주를 독으로 만든 것은 테드도 함부로 해독하지 못한다.

“영감님. 진정해요. 지금 패닉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마력을 담은 손으로 강철의 어꺠를 잡았다. 강철은 이유 모를 차가움이 자신의 몸안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한껏 침착해진 표정으로 테드를 쳐다봤다.

“지금 수아가 놈에게…….”

격정적으로 입을 열려다 이를 악물고 멈췄다. 지금 테드에게 분노를 내비치는 것은 화풀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기엔 살아온 세월이 허락하지 않았다.

“……잡혀 있네. 지금 당장 찾아가 죽여 버리고 싶네. 방법이 없겠나?”

“여기 불세출의 대마도사가 있는데 왜 없겠나요. 하지만 영감님. 지금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저놈을 죽이는게 아니라, 수아를 구하는 거죠. 수아에게 먹인 것이 어떤 저주독인지 알 필요가 있어요.”

저주독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하지만 대표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대상의 몸안에 직접 투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주사기 같은 것으로 혈관속에 직접 넣는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먹이는 것으로 성립한다.

방안에 설치되어 있는 수정구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고만 있다면, 화면을 보고 있는 테드 일행 몰래 저주독을 먹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안보이게 각도만 조절하면 되니까.

“자네에게 또 도움을 받게 되는군. 하지만 이번엔 사양하지 않겠네. 부디 손녀를 구해주게! 내 뭐든 할테니!”

“아무리 이런 상황이라도 뭐든 이라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먹여주고 재워준 밥값은 할테니 걱정마요.”

테드가 다시 시선을 화면속으로 움직였다.

베르만은 소파에 편하게 앉아 다리를 꼬고 그 위에 양손을 깍지를 낀채로 있었다. 납치범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여유로운 자세였다.

충동적으로 일을 벌인 것은 아닐것이고, 이 짓을 처음으로 한 것도 아닐 것이다.

[아, 이거 일방통행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헤타리온 님이 보고 있는 건 틀림없을 테니. 그리고 일방적으로 이쪽의 요구를 전하기에 딱 알맞은 기능이네요. 혹시 제 계획을 알고 미리 설치해두셨습니까? 그런 거라면 좀 무서운데.]

베르만이 조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테드는 인상을 찌푸렸고, 강철이 이를 빠득 갈았다.

테드가 마법을 사용했다. 공간계열의 마법이지만 텔레포트나 블링크 같은 순간이동은 아니었다.

[내용을… 들어보겠다.]

테드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강철 특유의 걸쭉하면서도 터프한 목소리였고, 화면 속에 나온 소리와 완벽하게 겹쳐졌다.

베르만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방통행이 아니었군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다행이기도 하네요. 상대방이 침묵만 고수해서야 이쪽 입장에선 답답하기 그지없거든요. 또 뭔 짓을 할지 모르고.]

[수아는 무사한 건가?]

[곧바로 수아 씨의 안부를 묻는 겁니까. ……뭐, 하나뿐인 손녀이니 당연한 반응이겠지요. 수아 씨는 무사합니다. 지금은 자고 있을 뿐이지요. 지금은.]

베르만의 시선이 앞에 뻗어 있는 수아에게 향했다. 마치 아무 흥미 없는 물건을 보는 듯한 무감정한 눈이었다. 테드의 입장에선 나았다. 적어도 심심풀이로 수아에게 몹쓸짓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저주독이란 건 뭐지?]

[아버지에게 들었던 성격과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손녀가 걸려 있어서 그런가. 저주독에 관해선… 들어 본적이 없나요? 명색의 마스터 마이스터가? 그건 좀 실망인데요. 그래도 설명은 해드리죠.]

베르만이 주위를 한 차례 둘러봤다. 의미없는 행동은 아니고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주술의 저주를 독으로 만들어낸 겁니다. 그쪽 분야에 숙련된 주술사만이 만들 수 있고 평범한 방법으론 입수가 불가능해서 더럽게 비싸죠. 사용하기도 까다롭고요. 하지만 제대로 한 번 사용하면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은 없다는 걸 알게 되죠. 그리고 저주독은 사용자가 특정한 행동을 해야만 발동됩니다. 수아 씨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건 수면제를 같이 먹였기 때문이고요.]

베르만이 턱에 손을 대고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지만 친절한 설명이었군요.]

[지금 이 일은… 네 아비도 연관되어 있나?!]

저택 밖에 모르는 조력자가 있으면 일은 복잡해진다. 물론 수아를 구하는 것으로 일을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베르만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 테드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일엔 관련 없어요. 그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좋아서 말이죠. 제 본모습도 모르고 있습니다. …멍청하게 사람이 좋으니까 어머니가… 아니. 이건 실언이군요. 그 인간에 대해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으니, 되도록 언급하지 말아주시죠. 나도 모르게 열이 뻗쳐서 눈앞의 여자를 죽여 버릴지도 모르잖아?]

뒤의 말은 이전에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

테드는 조용히 저주독에 대처를 생각했다. 손발이 묶이고 입을 봉해 베르만을 제압했을 때도 저주독을 발동할 수 있다면 제압의 의미가 사라진다.

또 만약에 발동하기 전에,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하게 죽여 버린다면? 저주독이 발동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발동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요구 조건을 말하지요. 총 두 가지가 있는데요. 우선은 헤타리온님이 만든 무기들을 원합니다. 물론 양산품 따위가 아니라 마스터 마이스터로서 진심을 다해 만든 무구로요. 일단 헤타리온 님이 가지고 계신 무구들은 조사해 놨으니 하나라도 빼돌리면 손녀 분의 팔 한 짝이 개먹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테드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철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어떤 심정일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그건 좋지 못하다.

[두 번째 요구는… 비공정의 설계도입니다. 다른 것도 탐나긴 한데 유감스럽게도 챙길 시간이 없거든요.]

“비공정 설계도라고…?!”

강철이 얼굴을 굳혔다. 그의 머릿속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비공정 설계도는 장인이 아닌 일반인이 구해봤자 되파는 것 말고는 큰 이득이 없다. 그러면서 튜논 왕국은 비공정에 관해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관리하기 때문에 처리하기도 쉽지 않으며 위험성이 높았다.

베르만은 무역 상인의 아들이다. 처리할 방법은 여러 가지 있을 것이고, 높은 확률로 다른 왕국에 팔아넘길 것이다. 현재 비공정에 관한 기술은 튜논의 전유물이나 다름 없는데, 설계도가 유출 된다면 국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강철이 주먹을 꽉 쥐었다. 현재의 강철이 있는 것은 튜논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젊은 시절에 재능을 알아본 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었다. 그런데 튜논을 배신하라고? 열불이 치솟았다.

[좋다. 건네주지. 단, 수아의 저주독을 푸는 게 조건이다.]

강철이 고개를 획 돌려 테드를 바라봤다.

“자네! 뭘 멋대로 결정하는 건가?!”

“어차피 저 놈을 살려둘 생각은 없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대충 해결방안이 떠올랐거든요.”

“해결 방안을?! 수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확실하겠지?!”

“네. 생각해보니 간단하더라구요. 인질이 죽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요.”

테드가 씨익 웃었다. 그래 죽지 않으면 된다. 저주독이 발동한다 하더라도 죽지 않는다면 저주독은 이미 상관없다.

[……순조롭게 풀려서 좋군요. 하지만 수아 씨를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저도 도망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수아 씨는 여기에 내버려둘 것입니다. 저주독은 3일 동안 유지되니 저를 3일 동안 쫓지 못 할 테니까요. 그 정도 시간이면 잠수타기에 충분하죠.]

베르만이 자축을 하듯 짝, 짝 박수를 쳤다. 손과 손이 마주쳐서 발생하는 소리가 불쾌하게 여겨졌다.

[일단 방 한 쪽에 물건들을 전부 모아두겠습니까? 운송할 방법은 이미 준비해두었으니 헤타리온 님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옮기는 일이니 1시간이면 되겠지요? 그 와중에 허튼 짓을 한다면 소중한 손녀의 몸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다.]

뒷말은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 거리면서 경고했다.

베르만은 차분히 강철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3분이 흘러도 강철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자신의 말대로 무구들을 옮기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을까.

[손녀 사랑이 지극하시군요. 헤타리온 님.]

베르만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난 것들의 약점을 잡고 마음대로 부리자면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특히나 이번 상대는 튜논 왕국의 마스터 마이스터다. 펠리스 왕국으로 치자면 대귀족이라 할 수 있는 신분이였다.

그러나 베르만의 웃음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목에 닿여 있는 순백의 레이피어를 쳐다봤다. 얼음으로 만든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이었다.

‘어느새?’

아무리 자신이 상인이라고 하더라도 하는 일이 거칠다보니 자기 단련은 빼먹지 않았다. 돈을 이용해 뛰어난 기사에게 훈련까지 받아 마나까지 다룰 줄 알았다. 그런 자신이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고?

고개를 움직이려하다가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걸 깨달았다. 눈꺼풀도 제대로 감기지 않는다. 무언가에 지배당하는 굴욕감을 느끼며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새하얀 검의 주인은 은발의 메이드였다. 아름다운 외모는 한순간 지금 상황을 잊을 정도였다. 또 눈앞에는 어느새 검은 머리의 청년이 있었다. 그는 수아의 몸 상태를 살피고는 아공간에서 검은색 책을 꺼내들었다. 수아의 오른 검지에서 피를 빼내어 책에 묻혔다. 그는 이번에 베르만에게 다가가 똑같이 피를 빼내어 책에 묻혔다.

그리고 순간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책에서 뿜어져 게걸스럽게 공간을 훑고 사라졌다.

“같잖은 인질극이나 벌이고 말이야. 좀 바르게 살면 어디가 덧나냐?”

테드가 베르만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베르만이 그를 노려보다가 천장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이걸 찾습니까.”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허공에 무언가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건 복면을 쓰고 있는 목이었다. 유일하게 노출되어 있는 두 개의 눈구멍에는 어떤 고통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베르만이 데려온 암살자가 틀림없었다. 그의 실력은 베르만 보다 몇 수나 뛰어났다.

“쥐새끼가 있길래 우리 메이드가 죽여 버렸어. 쥐새끼나 바퀴벌레 같은 처리는 우리 메이드가 아주 잘하거든.”

테드가 베르만의 품안을 뒤졌다. 나온 것은 금화가 들어 있는 주머니와 나이프 한 자루, 수정구가 전부였다. 테드는 나이프를 던져 버리고 수정구를 들었다. 마법 수정구로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

“예상대로 해독제는 없네.”

그의 말대로라면 저주독은 발동하지 않는다면 3일이 지나서 알아서 풀릴테니 굳이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예 만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거짓말이 아니라면이다.

“근데 그 저주독이란거 의외로 간단하더라. 마법이 아니라 주술이라 좀 쫄았는데 웬만한 저주 마법보다 더 쉬워서 놀랐어. 역시 주술보단 마법이 최고라니까.”

테드의 눈은 수아를 보는 순간 단숨에 저주독을 파악했다. 그녀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마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될 정도로 조잡했기에 마력으로 감싸서 없애버렸다.

“여러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일단 몇 번 죽고 대화하자.”

베르만이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이상하게도 잘린 목의 단면에서 무언가에 막힌 듯 피가 흘려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는 테드의 말을 이해했다. 죽을 수 없었다.

2번 정도 머리가 잘리고, 3번 심장이 찔리고, 2번 배가 갈라졌을까. 접견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콧김을 씩씩 뿜어내고 있는 늙은 드워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손에는 커다란 망치가. 왼손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도끼를 들고 있었다.

“아주 좋은 것을 하고 있지 않나. 나도 좀 끼워주게.”

뿐만이 아니라 등뒤에는 수 많은 무기를 싣고 있는 카트가 보였다. 검, 창, 할버드, 나이프, 플랑베르주, 레이피어, 쿠크리, 낫, 모닝스타 등등 유명한 것들부터 전투에 익숙한 테드도 어디에 쓰는지 모를 무기까지 한 가득이었다.

“……상관없는데. 그 뒤에 무기들은 뭡니까?”

“저 놈이 내 무기들을 원하지 않았나? 그래서 특별히 가져왔네. 챙기는데 시간이 걸렸지.”

베르만이 덜덜 떨리는 눈으로 테드를 쳐다봤다. 눈은 이미 젖어 있었고, 무언가에 지배 당해 몸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는 필사적으로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테드는 그를 바라보다가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웨이터처럼 양손으로 공손히 베르만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법은 풀리지 않으니 좋을 만큼 즐겨주시지요.”

“대마도사인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네. 내 나중에 사례의 뜻으로 끝내주는 무기 하나 챙겨주겠네. 내가 전심전력을 다해서 만든 무기네. 소장용으로 따로 보관하고 있었네만 자네라면 전혀 아깝지 않아.”

“오오. 마스터 마이스터가 전력으로 만든 무기라…. 엄청 기대되는데요. 혹시 그 무기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마침 여기에 가져왔네.”

강철이 손에 쥔 무기를 내려놓고 카트의 아랫부분에 고이 모셔둔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가 능숙하게 무기의 전원을 켰다. 장착되어 있는 마석이 돌아가고 위잉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살벌하게 돌아가는 체인톱의 모습에 테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사이나의 어깨를 잡고서 뒤로 물러났다. 가죽 가면과 앞치마가 매우 잘 어울릴 것 같은 무기였다.

“훌륭한… 대화수단이네요.”

“역시 자네는 알아보는군. 이걸 자네에게 선물로 주도록 하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좀 쓰겠네.”

“부디 마음껏 쓰세요.”

테드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