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208화 (20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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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맞선.

“상단의 이름은 뭔데요?”

테드가 강철을 향해 묻자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일퀘스트 상단일세. 상단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저자의 아비, 현재의 상단주도 우리와 같은 사도네. 그것도 한국 출신이지. 일퀘라니. 웃기지 않나?”

“성실해 보이는 이름이긴 한데 처음 듣는 이름의 상단인데요. 마스터 마이스터와 거래할 정도면 어느 정도 유명할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자와만 거래했다면 유명해졌겠지만, 아쉽게도 내겐 수많은 거래처 중 하나네. 그리고 물건을 직접 파는게 아니라 무역이라는 유통을 담당해서 일반인들은 모른다더군. 제법 큰 상단인데 말이야.”

“그렇군요.”

화면에 나온 남녀는 서로 일어서 인사하고서 마주 앉았다. 성격이나 기타 자잘한 것은 제외하고 외모만으로 판단하자면 둘 다 훈남, 훈녀로 불릴 정도의 외모라서 잘 어울렸다.

[듣던 것과 달라 상당히 놀랐습니다.]

[……신경쓰이는 말이네요. 출처는 할아버님이 틀림없겠죠. 도대체 어떤 말을 들으셨나요?]

오고가는 대화중에 테드와 강철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가 강철을 할아버님이라 말하는 순간 너무 어울리지 않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할, 할아버님이라니… 한때는 저렇게 불러줬으면 했네만… 지금 들으니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구만. 오그라든다고 해야 하나.”

“도대체 신부 수업이 어떻게 진행됐길래 저런 말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건지….”

테드와 강철이 경악하든 말든, 그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얼굴에 기름때를 묻히고 다니는 못 말리는 말괄량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뭐…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할아버님은 남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녔군요.]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방안에 화면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명백하게 강철을 겨냥해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테드가 힐끗 강철을 쳐다봤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굳어 있는 그가 보였다. 아마 후폭풍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성격상 절대로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도대체 밖에서 뭘 이야기하고 다니시는 거에요?”

“아니, 그게 말일세. 이 나이가 되면 할만한 이야기는 자식이나 손녀에 관한것밖에 없다네. 거기다 수아는 젊은 나이에 하이 마이스터가 된 천재이지 않은가. 자랑하려고 떠벌리고 다니다 보니… 뭐, 그렇게 됐네.”

“저 녀석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테죠. 수고하세요.”

“도와주지 않는 건가?”

“이건 순전히 영감님의 입이 잘못했잖아요. 입을 멋대로 놀리면 뭐되는 건, 지구나 여기나 똑같아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후우. 그래. 이놈의 입이 주책이지, 주책이야.”

그 후로도 맞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하호호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져나갔다. 주로 대화를 이끄는 것은 맞선 상대인 베르만이었다. 그는 상인답게 대화가 끊이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자연스럽게 수아의 정보를 끄집어낸다.

보고 있는 테드가 감탄할 정도였다.

“과연… 상단의 후계자라는 명칭은 폼이 아닌 것 같네. 말하는 솜씨가 좋아.”

강철은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른 베르만을 못마땅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너무 말을 잘하는군. 말 잘하는 남자는 바람기가 있다고 하는데.”

“어디서 들은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속설이에요. 저를 봐요 바람기가 없잖아요.”

“아니. 자네는 딱히 말을 잘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네. 그냥 생각 없이 내뱉는 거지.”

강철의 말에 테드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맞선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어느새 편안한 분위기가 되어 있어서 수아가 실수하지 않을까 했지만, 수아는 시종일관 처음의 태도를 유지했다.

여자의 내숭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그저 공순이로 밖에 안보였던 수아가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테드는 내심 놀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드가 카트를 끌고 와서 점심을 차리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겠지만, 이번에 한해서 접견실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강철의 수작이었다.

메이드가 요리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대화는 이어졌다.

[아직 23살밖에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 하이 마이스터 라면서요? 세간에서는 불세출의 천재라고도 하던데.]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할아버님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마이스터의 시험은 운이 개입될 요소가 전혀 없고, 출신을 따지지 않고 개인 실력만을 철저하게 본다고 들었습니다. 겸손도 좋지만, 과하면 스스로를 깎을 자해밖에 되지 않아요.]

[……좋은 말이네요. 그래도 할아버님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마스터 마이스터의 곁에서 일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일이니까요. 아마 할아버님이 없었다면 하이 마이스터는커녕 마이스터도 되지 못했겠죠.]

[강철님은 대단하시군요.]

[예. 할아버님은 대단하시답니다.]

테드가 고개를 돌려 강철을 쳐다봤다. 히죽이면서 그의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상했다.

“……뭘 그렇게 웃고 있는 건가. 굉장히 재수 없어 보여서 짜증이 나려고 하네만.”

“아, 이거 실례. 대단하신 강철님의 말이니 얼른 웃음을 지우도록 하죠.”

“……자네가 내 아들이라면 지금쯤 얻어터져서 질질 짜고 있을 걸세.”

“그거 참. 영감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게 다행이네요.”

테드가 낄낄 웃으며 대꾸하고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무슨 헛짓거리인가 했는데 막상 보고있자니 재밌었다.

테이블 위에 보를 깔고 음식을 질서정연하게 나열하던 메이드장이 지나가는 어조로 요리 중에 수아가 만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요리까지 하시는 겁니까?! 이거 놀랍군요. 어떤 게 수아 씨의 요리인가요?]

열렬하게 관심을 표하는 베르만을 향해 수아가 부끄러움이 담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기 앞에 있는 샐러드빵이에요. 오늘 낮에 만든건데… 설마 올라올 줄이야. 실망 하실 테니 먹지 않았으면 하네요.]

[아뇨!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줄 알수 없으니, 꼭 먹어봐야겠습니다.]

그가 가장먼저 샐러드 빵을 집어 들었다. 동그란 빵에 반쯤 칼집을 내서, 그 벌어진 틈에 샐러드가 들어 있는 간단한 요리였다. 다르게 사라다빵이라고 불리는데 햄버거와 닮아 있었다.

테드가 입맛을 다셨다. 그는 저 사라다빵의 맛을 알고 있었다. 사이나가 가끔씩 해주는 요리다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오늘은 저게 먹고 싶었다.

[이럴 수가! 엄청나게 맛있군요! 팔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에요. 아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와 함께 팔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베르만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테드는 겨우 사라다빵 하나로 저 정도의 리액션이라며 감탄을 할 정도였다. 연예인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정작 그의 반응을 정면에서 보고 있는 수아는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옅은 홍조를 띄면서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사이나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요리를 먹은 것이었고, 맛있다고 해주니 기쁜 것이다.

거기다 사이나는 그저 간단하게 맛있다고 말해주는 것으로 끝내니, 저런 반응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가! 나도 먹어본 적 없는 수아의 요리를! 저런 부러운 자식을 봤나!!”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철을 보며 테드가 고개를 저었다.

“댁이 데려온 남자거든요. 질투할게 따로 있죠.”

“하지만 말일세! 할아버님인 내가 먼저 먹는 게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저놈은 장유유서를 모르는 건가! 이거 그렇게 안 봤는데… 나 원 참!”

“남자의 질투는 추합니다. 특히나 손녀사위가 될 지도 모르는데 질투하면 되나요.”

“자네는 누구 편인가!”

“누구 편도 아닌데요.”

식사 중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간간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수아의 생각을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봐서는 진심으로 지금의 만남이 즐겁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질투를 해대던 강철은 어느 순간부터 조용히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언가 복잡한 표정을 한 그는 어딘가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기에 아들 녀석이 있었다면, 딸이 다 컸다고 아주 좋아했을까. 아니면 나처럼 베르만을 질투했을까.”

“……전 영감님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흔히들 부전자전이라고 하니 영감님처럼 질투했겠죠.”

“그러고 보니 자네가 우리 집에서 생활하는 것도 한 달이 넘어가는 군. 자네는 수아의 부모님, 내 자식 부부의 관해선 한 번도 묻지 않았지.”

“남의 가정에 참견할 정도로 인격자는 아니고, 관심도 별로 없어서요.”

저택 곳곳에 마도구를 이용해 찍은 가족 사진이 있었다. 복도에 지나가도 눈에 들어왔다. 다만 수아와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은 먼 옛날, 수아가 고블린 보다 작았을 시절의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수아의 아비는 말일세. 수와와 같이 하이 마이스터였네. 재능에 있어선 수아에 비해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네.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비공정을 만들 정도이니 말 다했지.”

강철의 시선은 화면에 향하고 있으나, 초점은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대단하네요. 비공정이란거 보통 마스터 마이스터에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거대 프로젝트잖아요.”

하이 마이스터가 주도해서 드워프 왕국 튜논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비공정을 제작하는 것은 정말로 드물었다. 더군다나 당시 그의 나이가 서른셋이란걸 감안하자면 천재라는 말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비공정이란건 모든 마이스터의 꿈이라네. 내 아들 녀석도 비공정을 만드는 것을 꿈꿨지. 왕국에게 비공정의 제작을 의뢰받았을 땐 정말로 기뻐하더군. 나는 녀석을 말리지 않은걸 지금도 후회하네.”

“영감님의 아들이면 말린다고 해서 안 할 거라 생각되지 않는데요.”

흔히들 드워프는 고집이 세다고 한다. 그 질긴 고집이 있었기 때문에 제작 분야에 있어 드워프가 최고라 불리는 것이리라.

“그 말 대로네. 날 닮아서 고집하나는 끝내줬지. 그와 함께 실력도 끝내줬고. 그런데 그 고집이 문제가 되버렸어. 제작 중에 마법사와 불화가 터진 거야. 사과하면 될 것을 기어코 관계를 파탄내고 마법사 없이 제작에 들어갔지. 녀석은 수아처럼 마도공학에 제법 자신이 있었거든. 마법도 사용할 줄 알았지.”

“……실패했군요.”

마법이란건 아주 조금의 실수만으로도 이상한 반응을 일으키는 위험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전문 마법사가 아니라 대장장이였다. 비공정에 들어가는 마법진이 쉬운 것일리 없으니, 실패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공정의 완성은 되었네. 하지만 실험 단계에서 공중에서 폭발해버렸지. 국가에서 비공식적으로 제작되던 것이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아 녀석에게 까지 알리지 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녀석이 비공정에 집착하는 것도 아마 제 부모가 비공정의 폭발로 죽었기 때문이겠지.”

“영감님은 녀석이 비공정을 제작하는 것에 반대하시나요?”

“한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네. 녀석의 꿈을 내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막을 권리는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밤을 새가면서 비공정에 대해 공부하는 녀석을 보면 입밖으로도 내지 못하지.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네. 그런 참혹한 실패가 다시 되풀이되지 않게 말일세.”

“영감님 손녀니 별 문제 없겠죠.”

“자네는 참 간단하게 말하는 구만. 내가 이 말을 어떤 심정으로 꺼냈는지 아는가?”

“짐작도 안 되고, 할 생각도 없는데요. 완전히 타인인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지금와선 끼어들기엔 늦었고, 괜히 왈가왈부했다간 본전도 못 찾을게 뻔하죠. 영감님도 그걸 바라면서 제게 말한 건 아닐테고.”

“그래. 자네 말대로 그냥 누군가에게 말해보고 싶었네. 그래도 사람이 매정하게… 위로의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참 안됐네요. 힘내세요.”

“…….”

강철이 어이가 없는 눈으로 테드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다시 화면을 바라본다. 메이드들이 들어와서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다.

“영감님. 저 떠납니다. 한 3일 정도 후에요.”

“그런가. 조금 심심해지겠구만. 자네완 제법 잘 맞는 것 같았거든. 그래도 자네가 미리 말해줘서 다행이군. 내 눈엔 자네가 소리 소문 없이 떠날 것처럼 보였거든.”

“저 그렇게 매정한 놈은 아니에요.”

“굳이 따지자면 나쁜 놈은 아니지. 좋은 놈도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상한 놈이라 할 수 있겠지.”

“놈, 놈, 놈. 거참 듣는 놈 기분 나쁩니다.”

“자네는 운이 좋아. 마스터 마이스터와 인연을 맺었으니 말일세. 나중에 다시 찾아오게. 그 때 봐서 기분 좋으면 공짜로 의뢰를 받아 줄수도 있네. 물론 간단한 일에 한정해서.”

“영감님은 말년에 복이 터졌어요. 대마도사인 나와 인연을 맺었으니까요. 나중에 불러주세요. 그 때 봐서 기분 좋으면 끝내주는 마법진 하나 설치해드리죠. 물론 귀찮으면 안하겠지만.”

테드와 강철이 서로를 보며 실실 웃고 있자니, 수아의 맞선을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변이 일어났다.

느닷없이 수아가 쓰러진 것이다. 앉은 상태로 몸을 비틀거리더니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의자에 축 늘어져서 정신을 잃은 것이다. 깜짝 놀란 강철이 일어났고, 테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이나가 두 눈을 좁혔다.

테드와 사이나는 설치되어 있는 수정구를 빤히 들어보는 베르만이 보였다. 지금까지 짓고 있떤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는 인상이 바뀌어 굉장히 날카로워 보였다. 그 시선은 화면 너머의 자신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강철 헤타리온 님 이시죠? 지켜보고 계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손녀 분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시죠. 저주독에 중독된 상태이니까요. 제가 아주 약간의 방법만 취하면 아름다운 손녀 분은 영원히 잠들겠죠. 본론에 들어가자면 저는 강철님과 조금 일방적인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 작품 후기 ============================

오늘 밤, 베르만이 지옥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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