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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맞선.
27. 맞선.
수아는 할아버지인 강철과의 거래로 비공정의 설계도를 얻는 대신에 사이나에게서 신부 수업을 받게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사이나에게 수업을 받는 건 싫었지만, 그녀의 실력만큼은 수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처음에는 자신있었다. 신부 수업 정도야 졸면서 대충 받아도 충분히 만족할 만큼의 수준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젊은 나이에 하이 마스터의 실력에 오른 수아 답게 자신감이 충만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과 현실은 달랐다.
“무슨… 의자에 앉는 것까지 신경 써? 지금 장난하는 거야?”
수업 첫날에 가장 먼저 받은 지적은 앉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수아는 일의 특성상 남들 앞에 앉을 일은 거의 없으며, 생활 중에 앉을 때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기에 제 마음대로 앉았다.
작업복은 바지였고, 치마라는 것을 어릴 때를 제외하곤 입어 본적이 없는 수아는 다리를 쩍 벌려 앉는 것이 편하면서 습관이 되었다.
“혼자 있을 때는 상관없습니다만, 곁에 누군가가 있다면 다리를 벌리는건 관둬주시지요. 천박해보입니다.”
“천박…?! 아니, 천박한건 네 치마라고 생각하는데. 바람만 불어도 속옷이 보일 정도로 짧잖아. 앉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시범을 보일 필요가 있겠죠. 자, 보시지요.”
사이나가 그녀의 앞에 의자를 가져오더니 다소곳이 앉았다. 허벅지를 딱 붙이고, 그 위에 손을 포개어 올렸다. 허리는 꼿꼿하게 폈으며 고개는 똑바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탁월한 외모 탓인지 여자인 자신이 봐도 확실히 아름다웠다.
“많은걸 바라지 않습니다. 허리를 피고 다리를 붙여 앉으십시오. 아가씨께선 빨리 수업을 끝마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좋아. 수업이 진행될 동안만 따르겠어.”
사이나와 말싸움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수아는 조용히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말하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고? 장난쳐? 내 집에서 내가 말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몹시 거슬리지만, 말투를 고치라고 까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조금 억양을 부드럽게 하고 목소리를 낮추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목소리에 관한것까지 지적받았지만, 마냥 스트레스 받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화장이란 것도 배웠다. 생전 처음으로 스스로의 손으로 한 화장은 제법 신기했으며 재밌었다.
“본판이 나쁘지 않으니 화장만 제대로 해도 상당히 예쁘시군요.”
“여자들이 왜 화장에 목메는지 알 것 같아. 이거 완전 변신 수준이잖아.”
거울 속에는 귀여움이 남아 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요염함이 서린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그래도 공구를 만지는 쪽이 훨씬 재밌었다. 화장은 가끔 특별한 날에 하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장인인 나야 그렇다 치고, 넌 왜 화장을 안 하는 거야?”
“전 화장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도 정말 간단하게 하죠. 어설프게 화장을 했다간 오히려 본전도 못 찾으니까요.”
“잘나셨네.”
수아가 툭 내뱉었다. 뭐라고 쏘아 붙이고 싶지만, 사이나의 외모는 그녀가 보기에도 완벽할 정도다. 수아가 보기에도 그녀에게 있어 화장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내가 만든 요리지만 완벽한 것 같아. 의외로 재밌기도 하고. 간간히 해야겠어.”
“과연. 손재주가 좋으시니 요리는 별로 건드릴게 없군요.”
“근데 요리는 왜 배워야 하는 거야? 어차피 요리사가 알아서 해주잖아?”
수아는 항상 저택에서 일하는 요리사의 음식을 먹었다. 직접 손으로 요리해본적도 없고, 지금은 없는 부모님들이 요리하는 것을 본적도 없었다. 할아버지의 경우도 말할 것도 없다.
“남자는 여자가 해주는 요리를 좋아합니다. 언젠가 써먹을 일이 있을 겁니다.”
“아니, 써먹을 일은 없어. 난 결혼 따윈 안 할 거니까.”
자신이 만든 오믈렛을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은 수아가 말했다. 오믈렛의 부드러움이 확연히 느껴졌다.
“……맞선 약속이 잡혀 있는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할아버지가 멋대로 정한 맞선 약속이지. 도대체 왜 그렇게 날 시집보내려고 안달 인건지….”
신부 수업이 끝나는 날에 맞선이 잡혀 있었다. 강철이 수아에게 말하기를, 신부 수업의 결과를 평가하는 겸해서 맞선을 진행한 것이라 한다.
평가의 결과가 나쁘면 신부 수업을 계속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당연히 그냥 수긍할 수아가 아니었다. 바락바락 따지니 강철이 마지못해 마나 액체의 일부를 준다는 조건을 붙였다.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닌 걸로 보이시는 군요.”
“마나액체가 걸려 있으니까. 거기다 맞선일 뿐이야. 결혼이 아니지. 맞선은 좋게 끝낸 뒤에 상대 남자는 신경 끄면 돼. 상대해주지 않겠다는데 지가 어쩌겠어.”
“강철님이 슬퍼 하실겁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결혼 같은 건 진짜 못 해. 나중은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내게도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다고!”
수아가 큰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만든 비공정으로 하늘을 날아보는 것이 수아의 하나뿐인 꿈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비공정의 설계도를 손에 넣었다. 물론 강철의 설계도 대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용이고, 자신의 비공정에 관한 설계도는 제작 중이다. 언제 완성될지는 자신도 몰랐다.
“결혼 뒤에 꿈을 쫓으면 되지 않습니까? 굳이 한 쪽을 포기해야 할 필요성은 없어 보입니다만.”
“두 개 모두를 관리하기에는 내 꿈이 너무 커. 가정과 일, 두 개 모두 수행할 여유는 내게 없어.”
“뜻이 확고하시니 더 이상 이것에 대해선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난 너의 그런 점이 좋아. 유능하기도 하고. 이 기회에 우리 집에 취직하는 게 어때? 그 남자, 마법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 같던데.”
“주인님에게서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노려 보지마. 네가 노려보면 왠지 몸이 떨려서 기분 나쁘니까.”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신부 수업의 마지막 날, 맞선은 다가왔다.
⁂ ⁂ ⁂
테드는 강철의 작업실 한쪽 방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TV를 보며 어이가 없는 헛웃음을 지었다. 겉보기에는 사각형의 벽걸이용 TV지만 실상은 모양이 특이한 마법 수정구나 다름없었다. 효율 쪽은 작은 수정구가 더 나았다.
TV의 앞에는 소파와 탁자가 있었다. 탁자위에는 온갖 음료와 과자가 고루고루 배치되어 있었다.
5인용은 될법한 소파에 앉은 강철은 딱딱한 쌀과자를 씹어 먹으며 테드와 사이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부른 이유가 뭔가 했더니… 도촬을 공유하기 위해선인가요.”
TV속에는 접견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수아가 보였다. 지금은 하이 마스터가 아닌, 마스터 마이스터의 손녀인 그녀는 연한 분홍빛이 드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얌전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촬 이라니! 깜짝 놀랄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이건 수아도 동의한 일이네! 평가를 하려면 제대로 봐야하지 않겠나?”
“상대방은 모르는 일이지 않나요. 걸리면 욕먹는 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걱정 말게. 결코 걸리지 않을 곳에 설치해두었으니. 그리고 자네도 여기에온 이상 빼도 박도 못하는 공범자가 된 걸세.”
테드와 사이나가 소파에 앉았다. 테드는 자연스럽게 등을 기대고 앉아 화면 속에 비치는 수아를 쳐다봤다.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적갈색 머리를 늘어뜨리고, 옅은 화장을 한 그녀는 테드가 알고 있는 수아와 동일인물인지 의심될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신부 수업이 정말 효과있는 것 같네요.”
“나도 놀랐네. 설마하니 저 말괄량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모두 사이나 양 덕이네.”
강철이 감격에 젖은 말을 했고, 사이나는 별거 아니라며 대답하며 화면을 쳐다봤다.
접견실은 맞선을 보기 위한 장소로서 메이드들이 어제부터 꾸민 곳이다. 원래는 단조로운 벽과 가구 몇 개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강철은 의뢰를 받을 때, 집이 아닌 밖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손님이 집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삭막한 그곳은 꽃이 그려진 벽지가 붙여져 있으며, 가구 몇 개가 더 들어가있고 꽃병을 비롯한 장식품들이 있었다. 모두가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귀족의 접견실이란 느낌이 확 풍겼다.
그리고 실제로 마이스터는 튜논 왕국에선 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상대는 누군가요? 마스터 마이스터의 손녀이자 하이 마이스터의 상대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닐 텐데.”
“당연히 어중이떠중이는 아닐세.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고 상대는 구하느라 조금 힘들긴 했네만, 나도 한 번 만나 본적이 있고, 결혼해도 좋다고 생각한 상대이네. 조금 말해주자면 상대는 외국의 상인이네”
“저번에 저 한테 맞선 제의를 하셨죠.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데요.”
“자네에게 한 건 반쯤은 농담이었네. 그래도 반은 진심이니… 지금도 아직 늦지 않았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양하도록 하죠. 저 녀석이랑 저는 안 맞아요. 툭툭 내뱉는 말을 보고 있으면 동생 생각이 나서 연애도 못하겠는데 결혼은 말이 안 되죠.”
강철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화면에 비추는 광경이 워낙에 지루하다보니 멈춰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간간히 손을 움직이는 수아가 아니었다면 메이드를 시켜 확인해봤을 것이다.
흐뭇하게 자신의 손녀를 바라보던 강철은 문득 위화감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면에 나온 수아는 분명하게 자신의 손녀였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드레스를 입고, 머리 모양을 바꾸고 화장을 했다고 해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위화감이….
지긋이 바라보던 강철이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이럴 수가, 수아에게 가슴이 있구만!!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마법인가… 아니, 뽕인가!”
테드가 어이가 없는 눈으로 강철을 쳐다봤다.
“여기에 저 녀석이 있었다면 엄청나게 욕했을 거에요.”
“저것도 사이나 양의 작품인가?”
사이나는 약간 망설이는 기색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계서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좋으니 말렸습니다만… 듣지를 않더군요.”
“과연. 뽕이란 느낌이 전혀 없었는데 사이나 양의 실력이었구만. 수아에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다면 감쪽같이 속았을 걸세!”
“겨우 뽕가지고 호들갑은….”
테드가 고개를 내저었을 때, 화면 속 접견실의 문이 열리며 한 명의 남성이 나타났다. 밝은 금색 머리카락을 한 인간 남자였다. 깔끔한 정장차림을 한 남자는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있었다. 몸도 전문적일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었고, 고개 숙여 하는 인사에도 어색함은 없었다. 예의바른 훈남이였다.
“종족은 인간일세. 거래 때문에 종종 만나는 상단주의 아들일세. 후계자로서 수완도 뛰어나고 인격자로서 직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지. 이름은 베르만. 올해로 25살이 되는 싹싹한 청년이네. 거기에 후계자의 일 때문에 연애경험도 없는 순수한 청년이지.”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신원은 확실 한 거죠?”
“그의 아비인 상단주와는 10년이 넘게 만났네. 신원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지. 자네는 의외로 걱정이 많군. 소심하다고 해야 하나.”
“정치하는 놈들만큼 웃으면서 통수치는 놈들은 상인 정도 밖에 없어서 해본 말이에요.”
테드가 고개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10년 지기 친구도 배신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는 말은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초를 칠 필요는 없었고,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강철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손녀의 일이니 확실하게 맞선 상대를 조사했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