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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튜논.
테드의 뒤를 따르는 패잔병들은 베니를 힐끗 쳐다볼 뿐 입을 열어 말을 걸거나, 친근하게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 이들은 없었다. 그들의 눈은 공허할 뿐이었다. 베니는 썩어빠진 좀비를 연상했다.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 각각 검과 가죽자루를 들고 그레이 라이온의 시체로 다가갔다. 베니는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루팅, 몬스터의 시체에서 전리품을 획득하는 행위다. 그레이 라이온의 가죽은 강철보다 더 비싸고, 발톱과 송곳니는 드워프들이 탐내는 재료였다. 덤으로 그 몸 안에 품고 있는 마석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팔면은 돈이 된다.
물론 이 시체의 소유권은 테드에게 있었다. 그는 관심 없다는 듯이 걸어가기 시작했고, 패잔병의 절반의 무리가 그를 따라 움직였다. 나머지 절반은 전리품을 챙기는 쪽이었다.
베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등이 마치 목숨과 돈,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강철보다 질긴 가죽을 벗겨내기 위해 고생하는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게 노력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베니는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 볼까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특별한 감정 따윈 없는 길거리에 지나치는 타인을 보는 눈과 비슷했다. 말을 들어도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으며, 모험가들이 괜히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뒤따르는게 아니라 생각했다.
테드는 이시스 안내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 길이 올바른지, 아니면 틀린 길인지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던전에 들어오고서 한 번도 막다른 길에 들어선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올바른 길일 것이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테드는 바닥에 널브러지고 벽에 붙어있는 시체와 피를 쳐다봤다. 시체 대부분이 찢겨져 있고 사라져 있다. 몬스터에게 먹힌 흔적이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얼마되지 않는다. 아마도 방금전에 마주친 그레이 라이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모험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목숨일 텐데. ……탐욕이 무섭구만, 무서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험가처럼 목숨을 거는 대신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직업은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험이 좋아서 모험가를 하는 이는 매우 적었다.
베니는 지면에 초라하게 떨어져 있는 은색의 스태프를 보고 헐레벌떡 달려가 주워들었다. 이곳 튜논으로 와서 재산의 절반을 투자해 만든 드워프의 무기였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여성 모험가가 상반신만 남아 있는 여자 시체의 손에서 피투성이의 단검을 빼내고 있었다.
“저, 저기!”
여성 모험가가 베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용무를 말하라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지긋이 쳐다봤다.
“그, 그건 제 동료의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래. 알았다.”
여성 모험가는 순순히 손에 들고 있는 피투성이의 단검을 베니에게 건넸다. 베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싸울 여유는 없었다.
여성 모험가는 다시 그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베니는 손안에 든 단검을 보면서 뒤따라 걸었다.
레인저였던 여동료가 사용하던 단검은 피로 얼룩져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자신의 스태프처럼 은제에 미스릴이 함유되어 있었다. 미스릴 양만 따지자면 자신의 것보다 더 많았다. 당연히 스태프보다 가격이 더 높았다.
동료가 기름묻은 천으로 손질 할 때면 빛을 받아 반짝반짝 거려서 흉기임에도 불구하고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이걸 가지고 있는 동료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젠 내꺼야.”
베니가 단검의 자루를 꽉 쥐었다.
테드는 미로의 안으로 들어가면서 몬스터가 출현하는 빈도가 줄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미로의 초입부분에선 미노타우르스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는데, 미로의 안쪽으로 갈수록 미노타우르스는 보이지 않고, 그레이 라이온이나 드레이크의 아종 같은 신체능력이 지나치게 뛰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의 신체능력에 대해 말하자면, 일반 모험가들은 차라리 특수 속성을 가진 녀석들이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다.
“함정을 파악하는 능력은 인정해줘야겠어. 길도 잘 찾으니 딱 네비게이션이네.”
아직 실험이 끝나지 않았으니 이시스의 정확한 전투 능력은 단정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펙만 보자면 마도사와 1대1을 붙여도 이길 정도다. 우선은 캐스팅 속도가 더럽게 빠르고, 분석과 파악 능력이 뛰어나다. 어지간한 마법은 곧바로 디스펠해버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마도사가 아닌 검사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뛰어나도 이시스는 결국 보주, 마법사의 무기에 불과했다. 능동적이면서도 기민하게 움직이는 검사는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마나가 담긴 검의 공격을 받으면, 아무리 이시스가 강도를 올린다고 해도 박살날 위험함이 있었다.
“강도 테스트도 해야하는데… 그거 부서질까봐 못하겠다.”
일단은 이시스의 코어를 감싸고 있는 미스릴 조각들이 있는 만큼 상당한 강도라고 생각되긴 했다. 정확히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강철은 일반적인 파이어볼은 정면으로 맞아도 흠집하나 낼 수 없다고 장담했지만, 테드의 눈에는 이시스가 유리구슬과 동급으로 보였다.
간간히 몬스터가 덤벼오긴 했지만, 이시스를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는 없었다. 이시스의 마법캐스팅 속도 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마도사가 하기 힘든 일을 몬스터가 해낼 리가 없었다.
“이게 보스 룸인가. 확실히 지도가 없으면 일반적으로 찾기 힘들겠는데.”
테드는 눈앞에 있는 여러 동물이 조각되어 있는 3M 폭의 철문을 쳐다봤다.
몬스터의 출현 빈도가 적어지면서 미로가 더욱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갈림길은 기본이었고, 심할 경우에 7갈래로 나뉘어진 경우도 있었다. 미로의 벽은 시스템의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부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시스가 없었다면 상당히 애먹었을 것이다.
“열어.”
테드가 불량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참고로 그는 던전에 온뒤로 주머니에서 손을 뺀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시스가 철문을 향해 날아가더니 그대로 살짝 부딪혔다. 그리고 서서히 출력을 올려서 철문을 밀어댔다.
테드가 혀를 쯧쯧 찼다.
“아이고, 이 미련한 것아. 마법은 폼이더냐?”
테드는 확실히 이시스를 향해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방법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이시스는 마법이 아닌 자신의 몸을 미는 것으로 문을 열려고 한 것이다. 이시스가 뒤늦게 바람계열 마법을 사용해 철문을 열었다.
그곳은 기괴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땅은 어두운 보라색이었고, 10M는 족히 넘는 천장은 진녹색의 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건물의 내부로 보였는데 창문은 없고, 기둥도 없이 뻥 뚫려 있었다. 다만, 벽근처에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같이 정교한 미노타우르스의 석상이 나란히 있었다. 석상의 숫자는 대략 20개다.
그리고 방의 끝에는 옥좌에 앉아 있는 괴물이 있었다. 거대한 체구에 세 개의 제각각 다른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 있는 것은 미노타우르스와 닮아 있는 머리에는 3개의 날카로운 뿔이 마치 삼지창처럼 나와 있다. 오른쪽에는 사자 갈기가 없는 사자머리다. 두 눈을 부릅뜬 중간의 소머리와 달리 어딘가 졸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왼쪽에는 파충류, 드레이크의 머리다. 날카로운 눈동자로 침입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몸은 근육질로 되어 있는 인간의 것으로 타이트한 검은색의 가죽 옷을 입고 있다.
“벨로크인가. 마계에 있는 하급 마수로 알려져 있는데… 누군가가 소환했으면 던전이 생성되지 않았을 테니 시스템이 보스 몬스터로 만들어 놓은 건가.”
벨로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3M에 달하는 거구였다. 벨로크는 의자의 옆에 세워둔 할버드와 클레이모어를 각각 한손으로 들었다.
테드는 자신의 주위에 부유하고 있는 이시스를 오른손으로 잡았다. 불안감을 호소하듯 청백색의 빛이 몇 번씩이나 점등했으나 무시하고 오른쪽 어깨를 크게 뒤로 젖혔다.
“이시스! 너로 정했다!”
옅은 청백색 빛을 발하는 구체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목표는 당연히 벨로크였다.
이시스가 허공을 날아가는 와중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푸른색의 빛이 이시스의 주위에 나타났다. 빛은 이윽고 형상을 취하기 시작한다. 이시스를 중심으로 빛의 몸통이 생성되고 팔과 다리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내 빛은 알 수 없는 메탈이 되었다.
골렘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조립형 로봇에 가까운 외형이었다. 전체적인 색깔은 은색이었고, 팔과 다리에 머리까지 있었다. 이시스의 본체는 가슴 부분에 있었다.
이것은 테드가 설정한 마법이 아니라, 이시스가 완성되는 순간 시스템으로부터 설정된 스킬이었다. 스킬의 이름은 ‘메카 로드(The Mecha Lord)’로 효과는 일시적으로 기계 장비를 소환하는 것이다. 말이 장비를 소환하는 것이지 테드가 보기엔 그냥 기계 골렘이 되는 스킬이었다.
소환된 기계 장비는 이시스의 주인인 테드도 사용하지 못한다. 오로지 이시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시스가 강철로 된 팔을 들었다. 오른손등부분에서 칼날이 튀어나왔다. 이번엔 왼손을 겨누었다. 검은색 딱딱한 손이 팔목으로 들어가더니 동그란 총구 5개가 튀어나왔다. 총구로부터 불이 뿜어졌다. 벨로크를 향해 총알 세례가 떨어졌다.
벨로크는 피하지 않았고, 그대로 몸으로 총알을 받아냈다. 총알이 튕겨나갔으나, 피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벨로크가 옆으로 뛰어 총알을 피해냈다.
벨로크의 오른쪽에 있는 사자머리가 포효를 내질렀다. 이시스가 생물이었다면 원초적인 공포가 정신을 잠식했을 것이나, 이시스는 감정이 없는 물건이었다.
이시스의 검이 맹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할버드와 함께 오른팔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벨로크의 소머리가 비명을 내질렀고, 드레이크 머리가 입을 쩌억 벌리며 불을 뿜었다.
이시스가 왼손을 뻗었다. 5개의 총구가 철컹이는 소리와 함께 팔 안으로 꺼지더니 커다란 총구가 나타났다. 총구는 드레이크 머리가 내뿜는 불보다 더 강력한 불을 방사했다. 시뻘건 불꽃이 벨로크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괴물의 끔찍한 비명이 공간에 가득 채웠다.
벨로크가 마구잡이로 대검을 휘둘렀다. 이시스의 몸체에 부딪히며 쾅쾅 거리는 소리가 울렸지만, 애꿎은 대검의 날만 나갈 뿐이었다. 이시스의 기계 몸은 부서지지 않았다. 하급 마수는 이시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역시 하급 마수로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군. 시스템의 제한 때문에 약해진 건 아닌 걸로 보이는데….’
벨로크가 약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살벌한 외모와 달리 그저 주된 능력은 우월한 신체능력뿐이었다. 특이한 스킬이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테드의 눈에는 미노타우로스 보다 뛰어난 신체능력을 가진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메카 로드라는 스킬은 좋긴 좋은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단 말이지.’
사람으로 치자면 마법사를 검사로 바꾸는 스킬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총기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의 개입이 전혀 없어서 강철 영감님이 탐내는 물건이기도 하지.’
물론 이시스를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시스가 진동검으로 마무리를 지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시스가 모든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테드의 목아래에 은색 칼날이 닿았다. 날이 짧은 단검이었지만, 목을 자르는 것에는 굳이 검이 롱소드처럼 길 필요 없이 날카로움만 있으면 충분했다. 테드를 노리는 것은 단검뿐만이 아니었다. 창이 등을 꿰뚫을 준비를 하고 있고, 검이 옆구리를 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구해주었던 모험가 5명이 흉흉한 눈길과 함께 흉기를 겨누고 있었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분명 저 구체같은 것이 특별한 물건인거겠지. 하지만 지금 저건 멀리 떨어져 있다. 저게 날아오는 것 보다 우리의 검이 더욱 빠르다.”
옆구리를 노리는 검을 가진 여성 모험가가 입을 열었다. 목에 가래가 끼인 듯 한 거친 음성이었다.
“……요즘 모험가는 은혜를 통수로 갚나봐?”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면 더러운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은 네가 함정에 걸린 나를 구해줬기 때문이다.”
테드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향했다. 거기엔 은빛 단검을 쥐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베니였다.
베니는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어, 어쩔 수 없어요. 모두 이렇게 하기로 정했으니까…!”
얼굴과 말만으로 보자면 억지로 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평탄했다.
“운이 좋네. 너.”
테드가 말했다. 베니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선선한 바람이 느껴지고 따뜻한 무언가가 그녀의 왼쪽 뺨에 닿았다.
익숙한 감촉,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가 뺨에 묻었다.
“어?”
이 피는 누구의 것이지?
베니는 뒤늦게 단검을 쥐고 있는 자신의 팔에 실선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팔은 깔끔하게 떨어졌다. 잘려진 팔의 단면에서 뿜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사방에서 바닥으로 철푸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시선을 돌리자 모험가들 모두가 조각나 떨어져 있었다. 피와 내장의 냄새가 코끝을 찔렸다.
베니가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청백색 빛을 내는 구체가 앞으로 달려왔다. 베니가 울상을 지었다.
“뭐, 뭔가요. 이게?”
“나랑 가까이 있어서 살았어. 다시 말하지만 넌 운이 좋아.”
인비저블 기요틴이라는 바람계열 범위 마법이었다. 공강내의 무엇이든 무차별적으로 베어버리는 스킬이다. 참고로 베니의 팔을 베어낸 것은 기요틴이 아니라 이시스가 쏘아낸 단순한 윈드 커터다. 그녀는 운 좋게 기요틴의 범위 밖에 있었다.
“덕분에 좋은걸 알았어. 이시스의 우선순위가 제대로 되어 있는 걸 확인했거든.”
이시스가 마법을 발동했다. 베니의 몸에 붉은색 불꽃이 달라붙어 타올랐다. 근처에 있는 테드는 조금의 열기도 느끼지 못했다.
“끼야야야야야야약!!!!”
베니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불꽃은 조금도 꺼지지 않았다.
“확실한건 좋지만 버스트 플레임은 조금 과한데.”
이시스가 테드의 주위를 빙 돌았다. 마치 보호를 하는 느낌이었다.
“가장 중요한건 제대로 되어있는 모양이니 합격이야. 마무리해.”
던전이 클리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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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