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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203화 (20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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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튜논.

사이나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 한 쪽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들어간 사이에. 센테나리오 점검이 끝났다.

드워프들은 제각각 흩어졌고 수아는 공구를 챙겨들며 테드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테드를 한차례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점검은 끝났어. 할아버지가 이미 완벽하게 준비해놔서 우리가 할 일이 없어. 타이어의 상태도 완벽하고.”

“그럼 남은 건 우승컵을 영감님에게 안겨주는 일만 남았군.”

수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우승이 정해져 있는 것 마냥 거만하게 말하는 테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만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아무리 할아버지의 차라고 해도 우승하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레이스에 참가한 다른 7명도 범상치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이번에 열리는건 비공식이라 우승컵같은건 없어.”

“최고의 차와 최고의 드라이버가 만났어. 우승 조건은 이미 갖추어 졌지.”

“…네 그 자만심이 사고를 일으켜 할아버지의 차를 망가트리면 절대로 용서안 할 거야. 알겠어?”

“걱정마. 네가 시집을 갈 수 있도록 신부수업을 받게 해주지.”

“…큭.”

수아가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강철에게 내기에 대해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수아는 테드를 상대하는 것을 관뒀다. 괜히 그에게 화를 내봤자 자신의 목만 아프다는 것을 지난 짧은 경험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때 마침, 대기실 한 쪽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방문이 열리며 사이나가 걸어 나왔다. 테드가 숨을 삼키고 수아가 아연실색했다.

가장먼저 눈에 띄는 것은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고 있는 하얀색의 탱크탑이었다. 어깨까지 감싸고 있다. 몸에 착 달라붙기 때문에 가는 허리와 풍만한 가슴의 둘레 차이를 한눈에도 볼 수 있었다.

하의는 극단적으로 짧은 치마였다. 조금만 방심해도 안이 보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타이트한 치마의 아래에는 하얗고 매끈한 다리가 뻗어 나와 있다.

그녀는 하얀색의 하이힐을 신고 있었는데 굉장히 고혹적이었다. 사이나의 은색 머리칼이 조명을 받아 반짝거렸다.

수아는 저 냉정한 여자가 자기 의지로 저런 옷을 입을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질린 눈으로 테드를 쳐다봤다. 만악의 근원은 입을 헤벌쭉하고 벌리며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저런 것이 자신이 봤던 모든 마법사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사이나야. 완벽해!”

수아는 사이나의 풍만한 가슴에서 눈을 뗐다. 계속 보고 있으면 자신의 가슴이 떠올라 한 없이 절망스러워진다.

“……당신은 그런 옷을 입고도 쪽팔리지도 않아?”

“…주인님이 원하시면 어떤 일이라도 하는 것이 메이드입니다.”

“극한직업이네. 메이드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수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 ⁂ ⁂

레이스 트랙 출발선에 선 검은색 센테나리오의 안에 앉은 테드는 우선은 안전벨트를 확인했다. 몸통이 의자에 단단히 구속되어 있는 느낌은 조금 갑갑해도 든든함이 들었다. 그리고 옆을 돌려 사이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안전벨트라는 개념을 모르고 있었다. 테드를 따라 매긴 했지만 엉성한 느낌이다.

아직 출발하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자신의 안전벨트를 해제하고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안전벨트는 생명선이야. 답답하더라도 제대로 매는 게 좋아.”

사이나의 풍만한 가슴이 방해되긴 하지만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안전벨트를 매게 했다. 테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안전벨트를 메고 핸들을 잡았다.

입가에 있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자면 여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랜 세월간 테드를 보아온 사이나는 그것이 허세임을 단번에 간파했다. 미소는 알게 모르게 경직되어 있으며, 시선은 정면의 신호등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괜찮습니까? 주인님. 너무 긴장 하시는 게 아닌지….”

“괜찮아. 바알과 싸웠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 쯤이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어.”

테드는 출발선에 서고 나서야 경쟁자들의 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슈퍼카를 몰고 있는 것은 테드 뿐만이 아니었다. 테드를 비롯한 3명 정도가 슈퍼카이고, 나머지 4명은 트럭이나 평범한 자가용이었다. 이곳이 판타지 세계임을 생각하면 내부는 분명하게 마개조되어 있을 것이니 겉모습에 속아 얕볼 수 없었다.

특히나 트럭같은 경우 그 외견이 변신로봇영화에 나오는 트럭과 매우 흡사해서 놀랐다. 실제로 변신하는게 아닐까하고 기대될 정도였다.

“사이나. 그걸 부탁해.”

붉은빛을 내고 있는 신호등을 지긋이 노려보며 테드가 말했다. 이미 사전에 그녀와 얘기는 끝났다.

“예. 알겠습니다. 오빠 달려.”

“아니, 잠깐. 지금이 아니라. 그리고 왠지 무감정한데.”

원래 그녀는 무감정했지만, 고저 없이 차분하게 내뱉는 말은 오늘따라 더욱더 무감정했다. 뭐, 이런 것에 부끄러워하기에는 물고 빨고 다했지만.

신호등이 주황색으로 바뀌었다. 테드가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팍 주었다.

레이스 트랙의 바닥은 아쉽게도 아스팔트가 아니었다. 평평한 바위산을 다듬어 레이스의 트랙으로 만든 것이다. 도로의 점검은 이미 끝나서 먼지구름이 일어날 일은 없다고 관리를 맡은 드워프가 호언장담했다.

“보니까 도로가 안 좋네. 이거 우승 못 할 수도 있겠는걸.”

두 눈을 부릅뜨고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변명을 준비했다.

“괜찮습니다. 주인님이 질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지.”

테드는 어느때와 같은 사이나의 믿음이 조금 무거웠다.

그리고 마침내 신호등의 등불이 바뀌었다. 테드가 있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8개의 차량이 점점 속도를 높이며 뻗어나갔다.

“그래! 이거야!”

가장 먼저 선두에 도달한 것은 검은색의 센테나리오였으며 그 뒤를 거대한 파란색 트럭과 훼라리가 달라붙었다. 테드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마구 밝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브레이크는 사치지!”

귀를 강타하는 배기음이 기분 좋았다.

또한 아스팔트가 아닌 바위도로인데도 불구하고 달리는 맛이 끝내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속 200KM를 돌파했다. 테드의 센테나리오에 달라붙은 차량은 없었다. 아쉽게도 네메스 대륙에서 자동차의 외견은 그럭저럭 따라 해도 내부까지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시속 100KM가 고작인 것이다.

허나 강철의 센테나리오는 달랐다. 최고 장인이 전심전력을 다해 만든 물건인 만큼 최대 속력이 무려 300KM 넘었다.

테드는 타이어나 엔진 등의 기타 상황을 조금더 고려하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시속 300KM를 넘어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사이나가 양손으로 안전벨트를 붙잡았다.

그리고 대망의 첫 번째 코너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레이크? 아, 그게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는 걸.”

“…….”

사이나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검은색 센테나리오는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코너에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지만 타이어가 멈추면서 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도로에서 미끄러지며 코너를 통과했다. 깔끔한 드리프트였다.

“내가 왕년에 레이스 게임을 얼마나했는데! 이 정도 쯤이야!”

레이스 트랙을 3바퀴 먼저 돌면 우승이었는데 이미 테드의 센테나리오를 따라오는 차량은 없었다.

자신의 우승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면서 300KM가 넘는 속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트랙은 5바퀴를 돌아야하고 아직 경기는 초반이었다.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방심할 수 없었다.

코너는 환상적인 드리프트로 해결하면서 달리다보니 어느새 한 바퀴를 전부 돌고 모여서 아웅다웅 2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달리고 있는 차들의 뒤꽁무니가 보였다.

“이런 귀여운 자식들! 먼저 지나간다! 이 느림보들아!”

물론 차안에서 외친 말이라 그들에게 테드의 조롱이 들릴 리가 없었다.

테드는 전투로 다져진 감각을 십분 발휘해 그들 사이를 지나쳐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로 위를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을 때, 무언가가 끼어들었다. 끼어든 것은 상반신이 여자이면서 팔 대신 갈색의 날개가 있으며, 하반신이 털로 뒤덮이고 종아리가 조류의 비쩍 마르면서도 단단한 형태의 다리를 하고 있는 몬스터인 하피였다.

테드는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려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 누구도 날 막을 수 없다!”

센테나리오 주위에 배리어를 두르고 그대로 쳐박았다. 하피의 몸이 피를 흘리며 터져나갔다. 지면으로 떨어졌을 때는 이미 곤죽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다행이 떨어진 곳은 도로 밖이었다.

도로 위에는 또 다른 하피가 내려앉고 있었다.

“내 우승을 방해하는 놈들이 많군.”

어느새 붉게 변한 테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은 것은 마지막 한 바퀴였다. 하피 같은 저열한 몬스터가 막아서기엔 우승이 코앞이었다.

“저 주인님……. 이미 레이싱은 중지 된 것 같습니다만.”

사이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피의 갑작스러운 난입으로 주위를 혼비백산이었다. 도로를 달리고 있던 차들은 일찌감치 주행을 멈추었다. 저 관중석에서 수아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보였다.

“앱솔루트 배리어.”

사이나는 테드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마법명의 소리를 듣고 그가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알 듯 모르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피를 7마리 정도 로드킬 했을 때, 테드의 검은색 센테나리오는 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테드가 주행을 멈추자 수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오는게 보였다. 테드는 혀를 차면서 차밖으로 내렸다.

하늘에는 수 십 마리에 달하는 하피가 동족을 해친 테드를 향해 적의를 내보이고 있었다.

무리 생활을 하는 하피는 동족애가 남다르다. 하피를 사냥할 때의 주의 점은, 하피들의 시야 밖에서 하피를 한 마리씩 천천히 처리하는 것이다. 만약 다른 하피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동족을 살해하게 되면 떼로 몰려와서 동족의 복수를 하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조류 놈들이. 감히 신성한 레이스에 끼어들어?!”

테드가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테드의 단독 레이싱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수아가 맹렬히 달려오면서 분노의 외침을 터트렸다.

“몬스터가 나타났는데도 멈추지 않고… 제정신이야?! 믿을 수 없어! 이제 됐으니까! 빨리 차를 버리고 도망…….”

“진정하시지요.”

흥분한 상태에서 도망치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어깨를 잡는 차가운 손길에 멈췄다. 거기에 노출도 높은 옷을 입은 사이나가 있었다. 사이나는 수 십 마리가 넘는 하피를 눈앞에 두고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냉정함에 수아 또한 전염되듯 머리가 식어갔다.

머리가 식자 시야가 넓어졌다. 수 십 마리의 하피가 하늘에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하피가 노리는 것은 동족을 잔혹하게 로드킬한 검은색 자동차였다.

“아…. 무심코 여기에 와버렸잖아. 젠장!”

이 병신은 그냥 버리고 도망치는 건데. 머리를 붙잡고 작게 중얼거리며 후회했다.

사이나가 테드에게 받은 하얀색의 양산을 펼쳐 수아에게 씌웠다. 수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노려봤다. 갑자기 양산을 펼쳐 시야를 가리는 미친 짓을 하는 이유가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몬스터에게 둘러싸인 공포로 냉정한 메이드도 맛이간 것일까.

그러나 이내 수아는 양산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후두둑, 하고 붉은 비가 하늘에서 세차게 내렸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하늘에 있는 수 십마리의 하피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찢겨져 나가고 있었다. 날개가 찢기고, 허리가 찢기고, 머리가 찢기고, 다리가 찢긴다.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무언가에 베여나간다.

하이 마스터인 수아로선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검이 하피를 무참히 도륙하는 것 같았다.

“블레이드 샤워(Blade Shower). 바람 속성 고위마법 중 하나입니다. 설마 이 정도의 규모로 발동이 가능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만… 역시 주인님이시군요. 대단합니다.”

수아는 처음 들어보는 마법명이었다. 저런 무지막지한 마법이 있다고 생각지도 못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테드가 작업하는 것을 몇 번 본적이 있기에 보통 실력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벼운 행동거지에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의 비가 멈췄다. 더 이상 하늘에 있는 하피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도로에는 하피의 육체 파편이 널브러져 있었다.

사이나가 양산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서 접었다.

“이곳에 몬스터가 나올거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근처에 몬스터의 둥지라도 있었어?”

천천히 다가온 테드가 검은색의 눈동자로 수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수 십에 달하는 몬스터 무리를 학살하고서 태연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와 자신은 사는 세계가 달랐다.

“……그럴 리가 없잖아. 주위에 몬스터 둥지가 있었다면 애초에 이곳에 레이스를 벌일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어. 하피는 여기서 많이 떨어진 바위산에 살아. 비공정으로 3시간을 걸리는 거리에 있어.”

“그럼 하피가 둥지를 버리고 철새 마냥 날아왔다는 건데….”

테드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영역을 벗어날 때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 영역내에 먹을거리가 없거나, 또 다른 강자에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빼앗겼을 경우다.

잠시 생각하던 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확한 원인이 뭔지 여기서 알아낼 수 없었다.

“일단 불카누스로 돌아가자. 이런 일의 전문가인 모험가 길드에 알려야겠어.”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100M 오타났습니다. KM입니다. 죄송합니다. 보고 어이가 없어서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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