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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튜논.
도시의 중앙 가장 큰 시계탑이 오후 6시 정각을 가리키자 종소리가 도시내에 울려 퍼졌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종소리는 묵직하고도 웅장했다.
불카누스에는 수 십 개의 시계탑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서 타종 소리를 내는 것은 중앙의 시계탑뿐이다. 도시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높게 지어진 중앙 시계탑은 영국 런던의 빅 벤을 쏙 빼닮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빅 벤이 떠오르는 비주얼이네요.”
“음. 그건 내가 디자인했네. 젊었을 적에 내 동료와 같이 만들었지. 그리고 실제 빅 벤보다 조금 더 높네. 불카누스 도시에 있는 시계탑들은 모두 저것의 자극을 받은 드워프들이 만들었지.”
“새벽에 종소리가 울리면 짜증날 것 같은데.”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만 타종하네. 거기다 볼카누스의 건축물들은 기술 유출 방지 때문에 기본적으로 방음시설이 뛰어나지. 집안에 있으면 타종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야.”
“그거 참 다행이군요. 전 늦잠을 아주 좋아하는지라.”
“젊은 것이 벌써부터 나태해져서는.”
강철이 쯧쯧 혀를 차며 저택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저택들의 크기는 하나같이 으리으리했으며 저마다 특징이 달랐다. 어느 것은 뾰족한 원뿔 모양의 지붕이었고, 어느 것은 평평한 지붕이었다.
기와를 올린 저택도 있었고, 그저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한 저택도 있었다. 삼각 모양의 저택, 하트 모양의 저택, 그야 말로 각양각색이다.
“설마해서 묻는데 저 하트 모양의 집은 아니겠죠?”
“해리슨의 집이군. 그는 여자보다 남자를 더 좋아하는 친구지. 우리 집은 조금 더 안쪽에 있네. 해리슨의 집이 좋다면 내 직접 해리슨에게 말해 머물게 해줄 수도 있네만?”
“사양하죠.”
테드가 더 없이 진지한 얼굴로 즉답했다. 안타깝게도 해리슨이란 친구와 친해질 생각은 없었다.
테드와 사이나는 점점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황혼 빛으로 물들인 골목길을 걸어가며 애쉬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는 따로 처리할일이 있다며 뒤늦게 불카누스에 도착할 것이라 말했다. 문제는 그 시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도착했네. 여기가 우리 집이지. 멋지지 않나?”
“의외로 평범한 저택이네요.”
짧은 감상평을 말했다. 겉보기의 저택은 여타의 귀족들이 사는 저택이나 다름없었다. 제법 크긴했지만, 특이한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원에는 분수도 있었고, 앉아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집은 평범한 게 최고라 생각해서 말이지.”
강철은 대문의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사용인으로 추정되는 정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짧은 대화가 끝난 후 대문이 자동문처럼 양옆으로 열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에 도착하자 사용인들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 20명에 달하는 사용인이었다. 메이드, 집사, 정원사, 요리사까지 반 이상이 드워프였고, 나머지 반은 타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주님.”
대표로 입을 연 것은 메이드복을 한 중년 여성 드워프였다. 사이나와 다르게 치마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전통적인 메이드복을 입고 있었다. 관록이 느껴지는 그녀는 차분하게 강철의 대답을 기다렸다.
“음. 여기 있는 자들은 내 손님으로서 우리집에 머물게 되었네. 손님방을 준비해주게. 지금은 일단 나랑 같이 공방으로 가겠네. 맛있는 저녁을 부탁하지.”
“가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닭고기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런데 녀석은 어디 있나? 보이지 않는군. 밖에 나가있나?”
“아가씨라면 공방 안에 있습니다. 일단은 가주님의 귀환을 알렸습니다만…. 지금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어차피 공방으로 갈 것이라 괜찮네. 녀석은 또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게 틀림없겠군.”
강철은 테드와 사이나를 이끌고 공방이 있는 지하로 움직였다. 지하라 하면 음침한 광경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통로는 새하얗고 천장에선 조명이 지나칠 정도로 밝아 연구실 느낌이 들었다.
통로의 끝에는 매끈한 손잡이가 없는 강철문이 테드를 반겼다.
강철은 주머니에서 은색 막대같은 볼펜을 꺼내들고서 벽에다가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한글로 ‘강철’이라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검은색의 글씨는 푸르게 빛나더니 사라졌다. 이윽고 강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인식마법이네요. 볼펜이 열쇠군요. 그냥 가져다 대기만 해도 될 텐데.”
“바로 알아보는 건가…. 과연 뛰어난 마법사로군. 그리고 뭔가 적는 게 더 멋있지 않나.”
공방은 새하얀 바닥과 3M에 달하는 천장이 있었다. 출입구가 있는 방은 일종의 휴식처로 소파나 탁자같은 것이 널려 있었고, 벽 곳곳에 투명한 유리로된 문으로 여러개의 방이 있었다.
강철은 가장 안쪽에 있는 유리문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의 온기를 감지한 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거긴 새하얀 연구실같은 곳이었다.
먼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벽과 바닥이 반짝거렸고, 강철의 몸에 배여 있는 특유의 기름 냄새 대신 어딘가 깨끗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한 쪽 벽 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뜰이 늘어서 있고, 자잘한 부품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방의 중앙, 의자에 앉아 책상위에 놓인 은색물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인기척이 느껴지자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투박한 검정색 집게핀으로 틀어 올려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고정켰으며, 얼굴에는 화장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새하얗다. 또한 가장큰 특징은 귀가 뾰족한데 엘프처럼 길쭉하지 않다. 굳이 말하자면 엘프의 절반 정도되는 귀다. 키는 강철보다 조금 더 큰 정도다. 테드는 그녀의 귀를 보고 단숨에 그녀가 엘프와 드워프의 혼혈임을 알았다.
“늦었잖아, 할아버지.”
“부품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다. 예정보다 일주일은 늦었지. 그 덕분에 의뢰인들도 만났고.”
“뒤에 있는 불청객들이 의뢰인? 공방까지 데려오고 별일이네.”
그녀는 노골적으로 테드와 사이나를 훑어봤다. 사이나를 보는 중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 녀석, 수아야.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지 않느냐?”
“수아 헤타리온이야. 하이 마이스터지. 그래서 너희들은 뭔데?”
하이 마스터라는 말에 테드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실제로 그녀의 작업복에는 은색의 망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녀가 강철이 농담 삼아 말했던 손녀이리라.
“테드 크루시안. 의뢰인이죠.”
“사이나 루키페르. 보시는 대로 메이드입니다. 노골적인 적의가 기분 나쁘니 시선을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사이나가 차갑게 말했다. 실제로 수아는 누가 봐도 적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이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메이드라고? 그런데 치마가 왜 그리 짧아? 잠자리 전문인가 봐? 젖통도 크고 딱 이겠네.”
사이나는 수아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 쪽에 향한 것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수아의 가슴을 쳐다봤다. 거기엔 어디가 가슴이고 어디가 복부인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절벽이 있었다.
“질투입니까. 남자의 질투는 추하다고 하는데… 여자의 질투도 만만치 않게 추하군요.”
사이나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듯 팔짱을 꼈다.
수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뿌득하고 이가는 소리가 테드의 귀에도 들렸다.
“이년이….”
“수아야! 그만 두거라! 손님 앞에서 무슨 추태냐!”
수아는 자신의 머리를 콩하고 때리는 강철을 한 차례 불만스럽게 쳐다보고선 이내 자신의 작업대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네. 내 손녀가 가슴에 콤플렉스가 좀 있거든. 보시다시피 전혀 그 부분이 성장하지 않는단 말이지. 풍류환을 구하려고 노력해보곤 있으나… 경매장에서도 전혀 찾을 수 없더군. 구할 수 없는걸 보니 역시 환상의 물건이긴 하더군.”
풍류환이란 말에 테드는 반사적으로 사이나의 가슴을 쳐다봤다. 그녀의 가슴은 충분히 컸다. 양손을 활짝 펼쳐도 감당하지 못한다. 이 정도가 딱 좋다고 느꼈다. 너무 크면 그것도 좋지 않았다.
“풍류환이라… 일단 저도 모험가이니 구하게 되면 팔도록하죠. 제겐 딱히 필요 없는 물건이니.”
“그거 참 고맙군.”
옆에서 수아가 인상을 팍 쓰며 무지막지하게 노려봤찌만,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다.
“음. 그래서 본론이네만, 여기에 있는 수아를 참가시켜주지 않겠나? 성격은 좀 괴팍해도 고위 장인(High Meister)으로서 실력만큼은 확실하네. 특히나 마도 부분은 나보다 더 전문이라 할 수 있지.”
“마도 전문이라……. 보주 제작에 도움이 되겠군요. 비밀을 엄수해주신다면 상관없어요. 그렇다 해도 의뢰비는 더 못주지만요.”
“의뢰비는 충분하네.”
자신의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뭘 멋대로 진행 하는 거야. 그건 할아버지의 의뢰지. 내가 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에이션트 드래곤 하트를 만질 기회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겠지. 네게도 필시 도움 되는 일이테고… 의뢰비로 마나액체를 받았다. 뭐… 수아, 네가 정 하기 싫다면 안해도 상관없다.”
수아는 책상위에 놓여 있던 물건을 서랍 속에 던지듯 넣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적갈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테드와 강철을 번갈아 쳐다봤다. 강철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으쓱였고, 테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제작의뢰는 보주지. 그래서 의뢰인의 의견을 듣기 위해 여기로 끌고 왔네. 보주에 대한 설계는 끝났네만, 자네가 어떤 마법을 보주 안에 넣을지 정해줘야 작업에 착수할 수 있네.”
본래 보주는 대장장이가 아닌 마법사들이 제작하는 물건이었다. 마석을 가공해 만든 구슬에 마법을 부여하면 그게 바로 보주였다. 일단 한 번 만들기가 굉장히 까다롭고, 만들어도 스태프나 완드와 달리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기에 요즘의 마법사들은 보주를 사용하지 않는다. 젊은 마법사들은 보주가 뭔지도 모를 것이다.
“제가 보주에 부여할 것은 [이시스(Isis)]라는 마법입니다.”
“이시스? 처음 듣는 마법이구만. 자네의 비전 마법인가?”
“예, 뭐. 그렇죠.”
정확하게는 레칸의 지식 속에서 찾은 고대 마법이다.
“일단 그 마법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겠나? 물론 마법사들이 비전 마법을 남에게 말하는 걸 꺼려 한다는 걸 알고 있네. 하지만 어떤 마법인가에 따라 작업과정을 수정할 필요가 있네. 우리도 목적을 알아야 제대로 된 길을 찾지 않겠나?”
“자동연산술식마법이죠. 전 줄여서 자연식 마법이라 부르고 있죠.”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나? 검으로 따지자면 자동으로 적을 공격하는… 에고 소드 말일세.”
“예. 맞아요. 다른 점이 있다면 완전 자동이 아니라 제 뜻에 따라 독자적으로 마법을 행한다는 거겠죠.”
“터무니없는 걸 원하는군.”
강철이 두 눈을 빛냈다. 그의 장인으로서의 피가 끓어 올렸다. 힐끗 옆에 있는 수아를 보니 마찬가지다. 무표정을 애써 유지하고 있으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자네가 장인을 찾는 이유는 마도공학… 즉, 마공식 보주를 원하는 거구만.”
“일반 보주로는 내구도나 성능이 제 기대에 못 미칠 테니까요.”
스크롤에 마법을 부여하는 단순한 행위로도 보주의 제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선 다이아몬드를 나무반지에 처박는, 보물을 썩히는 꼴이 된다. 일단 제작할거라면 확실하면서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 전문가와 힘을 합치면 완성되는 물건은 격이 달라질 것이다.
“그 자연식 마법이라면 내가 설계한 것은 다 뜯어 고쳐야겠구만. 자네가 원하는 보주는 어떤 마법이든 발동할 수 있는 보주겠지?”
“네. 그게 어떤 마법이든… 설령 흑마법이라도 자동으로 발동할 수 있는 보주를 원해요.”
“이건 자네의 도움이 절실하겠구만. 부품 하나, 하나에 마법식과 마법진을 새겨줘야겠네. 필요하다면 에이션트 드래곤 하트를 갈아야 될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상관없어요. 다행히도 마법에 한해서 이 세계에서 저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거든요.”
테드가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로 자신감이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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