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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튜논.
“아스타로트. 언제까지 이딴 짓거리를 해야 해?”
아스타로트가 바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지루함이 가득하다. 바알은 아스타로트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숙청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두, 세 번만 솎아내면 더 이상 할 필요는 없을 거다.”
바알이 눈살을 찡그렸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닐 텐데?”
그녀가 상체를 똑바로 세웠다. 미미한 적의가 흘러나온다.
“우리가 한 계약은 용인 새끼들을 노예로 만드는 시시한 게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혹시 잊어 먹었어? 그럼 씨발, 내가 다시 네 몸에 각인시켜주랴?”
“그렇게 말해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미카엘라는 이곳이 아니라 천계에 있지. 지금으로선 천계의 문을 열순 없다. 성공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소환할 수도 없지. 미카엘라가 소환에 응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
아스타로트가 오른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사탄의 심장이 맥동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아까보다 조금 더 커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씩이지만 사탄의 심장은 성장하고 있었다.
“심장의 힘은 아직 미약하다. 시스템에 저항하는 건 고작해야 왕성이 한계일 뿐이지. 조건 중 하나는 사탄의 심장을 최소한 도시하나를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본래 목적은 드래프리온 전역을 커버하는 것이다만….”
“먹이라면 충분히 널리고 널렸을 텐데? 나는 말이야 약해빠진 것들을 지배하는 이유를 모르겠거든?”
바알은 압도적인 강자로서 약자를 경멸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약자는 지배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중간계의 생물 대부분이 벌레 이상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먹이를 소화하는 것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 서둘러 가다간 일을 망칠거다.”
“그래서. 결국 네가 왕국 놀이를 하는 거랑은 뭔 상관인데?”
“네 입장에선 터무니없는 약자에 불과할지라도 수가 쌓이면 쓸모가 많아진다. 지금 당장은 불만을 표할지 몰라도 귀족들이 대거 죽어나간 이상 반란군은 일어나지 않을 거고, 백성들은 제 생활 챙기기 바쁘니 우릴 신경쓰지 않을 거다.”
“……그리고?”
“여차할땐 제물로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천사들이 중간계에 내려왔을 때, 가장 까다로운 건 천족이다. 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천족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겠지. 바알. 우리는 천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병력이 없다. 악마는 지금 상황에서는 뭉치지 않고 있다.”
“나랑 너, 그레온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는데?”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천계를 열었을 때, 상대해야 할 천사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무녀의 예언이 있었다.”
“예언? 난 그딴 좆같은 거 믿지 않는 주읜데….”
바알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얼마전에 미래를 보는 녀석과 직접 주먹을 나웠다. 그 개싸움을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번엔 한 번 믿어볼까. 무슨 예언인데?”
“천사가 열리고 중간계에 쏟아지는 예언이다.”
“호오. 성공했다는 거네.”
“문제는 천사의 숫자가 수 천, 수만에 이른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탄의 심장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했다는 거지. 혹은 다른 방해가 있었거나.”
“그래서 데비크라는 버러지들을 만드는 건가. 내가 보기엔 쓸모없어 보이지만… 뭐, 좋아. 아직 기간은 남아 있으니까.”
바알이 옥좌에서 뛰듯이 내려왔다. 최근 그녀의 생활은 나태하기 짝이 없었다. 요리사들이 진상하는 요리를 먹고 고급술을 아낌없이 마시면서 취하면 퍼질러 잔다. 그것의 무한 반복이었다.
“아스타로트. 난 웬만한 약속은 꼭 지키는 년이야. 기간 안에 미카엘라 년을 보지 못하면… 넌 죽어.”
“……걱정마라. 마왕이란 이름의 무게는 충분히 알고 있으니.”
“믿는다.”
바알이 휘적휘적 걸으며 알현실을 나갔다.
“믿는다라….”
아스타로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바알의 말을 아스타로트는 믿을 수 없었다.
⁂ ⁂ ⁂
드워프 왕국 튜논의 국경은 거대한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황량하기가 사막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 바위산은 잡초도 보기 힘들 정도라 생물이 살아가기에 최악의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더 없는 축복이라며 이곳에 자리를 잡은 선조들을 칭송한다. 바위산 대부분이 광맥을 가지고 있는 광산이기 때문이다.
울퉁불퉁한 바위산은 험하다. 특히나 겨울이 되면 더욱 심해진다. 바위 표면이 얼어서 미끄럽게 변하기 때문이다. 높은 고도에 있기에 추위를 포함한 매서운 바람을 무시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튜논은 국경 근처에 마을이나 도시가 적다. 가까운 도시에 가기 위해선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물론 편안하게 갈 방법은 존재한다. 국경에 위치한 요새에서 정기적으로 운용하는 비공정을 타거나 워프게이트를 이용하는 것이다. 비공정은 신분이 확실하다면 누구나가 이용할 수 있지만, 워프게이트의 경우엔 비공정에 비해 3배에 달하는 비용이 소모된다. 더군다나 튜논은 워프게이트가 크게 활성화되지 않았다. 작은 도시나 특정한 도시에는 워프게이트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테드가 가려는 장인의 도시 불카누스는 워프게이트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튜논의 수도보다 더 유명한 도시로 알려져 있는 불카누스는 기술 유출 방지의 이유로 워프게이트가 없다. 그곳으로 가려면 비공정을 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재 테드 일행은 불카누스로 향하는 비공정을 탔다. 하늘을 나는 배인 비공정은 여객선과 달리 나무로 만들어져있다. 철로 만들면 무게가 너무 나가서 속도가 나오기는커녕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그 이유다.
“와우. 비행기보다 편한데.”
비공정 내부의 개인실에서 투명한 창문에 달라붙은 테드가 감탄하며 말했다. 깎아 자른 듯한 갈색의 바위산이 솟아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비행기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쾌적했다. 우선 승객들에게 작지만 개인실이 주어지고, 흔들림과 소음이 전혀 없다. 속도는 비행기의 절반도 되지 않지만 굉장히 편안했다. 이 상태에서 비행기의 속도가 나왔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침대에서 상체만을 일으켜 이불을 끌어안은 사이나가 말했다. 드러난 어깨선은 어떤 예술품보다 아름다웠으며,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던 은색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뻗쳐 있었다. 그녀의 흐트러진 모습은 볼 때 마다 새로웠다.
“언젠간 한 번 타보고 싶었기도 했고, 하늘에서 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어.”
테드가 음흉하게 웃었다.
개인적으로 비공정이 구름 위를 날았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비공정은 구름 보다 조금 아래에서 날았다.
“곧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식당에서 먹는게 어때?”
“식당의 음식을 먹는 건 상관없습니다만, 아침을 거르는 건 안 됩니다.”
테드는 단호한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사실 사이나가 옆에 있는 동안 특별한 일을 제외하곤 아침을 거른 적이 없었다. 밤새 아무리 괴롭혀도 그녀는 변함없이 아침을 준비했다.
건강은 성실함에서부터 유지된다는 게 사이나의 지론이었다.
창문에 유난히 끝이 뾰족한 검은 바위산이 보였다. 하늘을 찌르는 듯 한 창같은 모양의 바위였다.
“이렇게 느긋이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어.”
테드는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2개월 동안 사탄교가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은 것이 폭풍전의 고요함 같았다.
불안의 원인 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네메스 대륙의 국가들이 있었다. 분명히 드래프리온의 왕가가 악마들에게 지배 되고 있음을 알고 있는데도 불문에 붙이며 드래프리온과 무역을 시작했다.
한 나라가 사실상 붕괴되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있고, 극히 일부만이 사탄교를 경계하고 있었다.
어차피 드래프리온이라는 작은 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며 무시하고 있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사이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떠한 근거도, 이유도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묘한 힘이 있어 테드의 불안을 걷어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테드는 스스로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 ⁂ ⁂
비공정의 식당은 몇 개로 나뉘어져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부터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렴한 식당까지. 비공정의 승객은 돈만 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테드와 사이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으음. 그 메이드복은 특이하군! 디자인도 괜찮지만 성능은 훨씬 뛰어나군. 누가 만들었는지 가르쳐 주지 않겠나?”
식당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드워프 중년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키는 1M를 간신히 넘을 정도이고, 얼굴에는 두꺼운 주름이 져있다. 몸을 통통한데 자세히 보면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육체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짧게 쳐서 정리되어 있었으며, 드워프 하면 떠오르는 수염도 깨끗하게 면도하여 보이지 않았다.
기름 냄새가 나는 그는 사이나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정확하게는 그가 살피는 것은 메이드 복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죽고 싶으신가요?”
불쾌하게 말한 사이나가 드워프로부터 떨어졌다. 누추한 작업복을 입고 수 많은 공구가 들어 있는 벨트를 낀 드워프 남자는 느껴지는 살기에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게 아닐세. 이거, 처자의 옷이 매우 흥미로워서 나도 모르게 무례를 범했구만…. 혹시 괜찮다면 그 옷의 출처를 알 수 있겠는가?”
사이나가 입고 있는 메이드 복은 테드가 직접 마법을 부여했다. 전투적인 효과는 아니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마법들이 가득하다. 그래도 제법 사심이 듬뿍 들어가는 바람에 어지간한 갑옷 보다 내구도가 더 뛰어났다.
“제가 직접 재봉했습니다만.”
사이나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드워프를 노려봤다. 드워프는 머쓱해하면서도 메이드 복을 보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이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럼. 옷에 걸린 마법도 처자가 걸었나? 엄청난 실력이군.”
“……이건.”
사이나가 망설이며 테드를 쳐다봤다. 테드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남의 여자를 빤히 쳐다보는 늙은 드워프가 조금 불쾌하긴 해도, 한편으론 사이나의 메이드복의 성능을 알아본 그가 대단하다고도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복 위에 새겨져 있는 황금색 망치가 신경쓰였다.
“메이드복의 마법은 제가 부여했어요.”
“그거 정말인가?!”
드워프는 놀라서 소리 질렀다. 그러다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한 듯 갈색으로 그을린 볼을 살짝 붉히고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흥분해서 소개하는 걸 잊었군. 나는 이 비공정 ‘아비토’의 주인이자 마스터 마이스터인 강철 헤타리온이라 하네.”
“……강철? 혹시 사도인가요?”
“그렇네. 아, 자네도 사도인가? 내 이름에 반응한 걸로 봐선… 혹시 한국인?”
“테드 크루시안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고. 전생에는 한국인이였죠.”
“그렇군. 그래! 이거 정말 반갑구만!”
강철이 손을 척 내밀었다. 팔의 길이는 짧았으나 손의 크기는 테드보다 훨씬 컸다. 테드가 그의 단단한 돌 같은 손을 붙잡아 악수를 나눴다.
테드는 슬쩍 강철의 가슴팍에 새겨진 황금색 망치를 쳐다봤다.
튜논에서 작업복에 망치를 새길 수 있는 것은 장인, 마이스터에 한정된다. 보통의 마이스터는 갈색의 망치, 하이 마이스터는 은색, 최고 등급이라 할 수 있는 마스터 마이스터는 황금색이다.
눈앞에 있는 자는 튜논에도 열명도 되지 않는다는 마스터 마이스터 중 한 명이다.
“초면에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만… 괜찮다면 날 도와주지 않겠나? 물론 사례는 하겠네. 개인적인 일로 뛰어난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일세.”
상대가 일반 드워프 였다면 단번에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강철은 마스터 마이스터였다. 본래 테드는 불카누스에 있는 하이 마스터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우연치 않게 마스터 마이스터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도와드리죠. 하지만 저도 부탁이 있어요.”
“졸지에 거래를 하게 됐군. 무모한 부탁이 아니라면 상관없네.”
“그냥 제작의뢰에 불과해요. 그래서 강철님의 부탁은요?”
“별건 아니고. 그냥 마법을 하나 부여해주었으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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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