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96화 (196/277)

196====================

25. 에이션트 드래곤.

“가까운 미래를 보고, 내 인식에서 벗어난다…. 빌어먹을, 여기까지 오면 눈치 챌 수밖에 없잖아. 시간을 멈췄네. 이 씨발새끼!”

지면에 떨어진 테드의 귀에 바알의 고함이 똑똑히 들어왔다. 뇌가 흔들린 탓인지 그녀의 고함이 귓속에서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기분은 최악으로 떨어진다.

위광은 대부분의 데미지를 떠안는 대신 효과를 잃었다. 옷은 단순한 천조가리가 되었다. 더 이상 위광의 우월한 보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

다행히 바알은 끝장을 내기 위해 달려들지 않았다. 시야가 빙긍빙글 돌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와중에 그녀의 무식함 속에 숨어 있는 신중함이 이번엔 자신에게 이득이 되었음을 알았다. 라그나로크로 입은 상처가 제법 심한 모양이다.

테드는 눈으로 들어오려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한가롭게 자신의 몸을 치료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바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라그나로크의 힘이 담긴 검을 잃었다. 공간이동 마법으로 도망가는 것을 내버려 둘리도 없고, 한 번 크게 데인 그녀가 이번엔 진심으로 덤벼 올지도 모른다.

아스타로트가 바알을 소환하기 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보다가 방법을 하나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도박성이 유난히 짙었다. 애초에 아스타로트가 처음에 말한 8분뒤에 소환한다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이 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10분 혹은 15분 일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당장 죽게 생겼는데 뭔 고민이야. 살려면 해야지. 실패하면 죽는 거고.’

양손으로 지면을 짚고 힘을 준다. 순간 속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메슥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한바탕 토했다. 나온 것은 오늘 먹은 음식과 섞여 있는 핏덩어리다. 입안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토해내듯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 있다.

“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가늘고 새하얀 다리가 보였다. 테드는 고개를 들지 않고 땅바닥을 쳐다봤다.

바알의 다리를 보고서야, 그녀가 자신의 앞에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얻어 맞은 주먹 한 방에 감각이 개판이 되었다.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내 감상 정돈 조금 나중에 말하면 안 되나?”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시간을 살아 왔어. 대가리 일부분이 박살나고, 가슴이 뚫리고, 내장이 뽑혀나가고, 온몸이 불타고, 산채로 먹히고 온갖 고통은 다 느껴봤어. 근데 씨발. 웬만한 건 내 몸이 워낙에 끝내줘서 곧바로 회복됐거든? 팔이 잘라도 10초면 재생 할 정도의 내 회복능력이 이 목에 상처를 애먹고 있다고!”

테드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목을 붙잡고 있는 왼손 사이에 어둠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권능으로 상처를 막고 있는 모양이다. 이건 좋은 소식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너 존나 쩐다고.”

순식간에 바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녀의 찌푸린 표정은 사라지고 대신해 시니컬한 미소가 걸린다.

“당했을 땐 존나 빡쳤거든. 고작 인간한테 목이 불타는 고통을 받았으니까. 근데 차분히 생각해보니 이게 또 신기한 일인거야. 서열을 가진 악마도 못하는 업적을 이뤘는데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지!”

바알이 테드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기다란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흙바닥에 쓸렸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붉은색 눈이 테드의 눈을 마주봤다.

“이봐, 요술쟁이.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을래? 대우는 잘해줄게. 원한다면 아스타로트를 죽여줄 수도 있어. 이용할 가치가 있어서 당장은 어렵겠지만…. 의심스럽겠지만 이 제안은 내 진심이야. 나는 약자를 멸시하는 만큼 강자를 존중하거든.”

바알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는다면 지금 상황에서 손쉽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한다. 누구 밑에 들어가는 성격이 아니어서. 더더욱 네 밑은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를 것 같군.”

“유감.”

오른손에서 뻗어 나온 어둠이 테드를 덮쳤다. 허나 어둠은 애꿎은 허공만 삼켰다.

바알이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번에도 멈췄지. 응?”

“그래. 내가 시간을 멈췄다.”

“직접 들으니 진짜 재수 없네!”

지면을 포함한 모든 방향에서 테드를 노리고 어둠이 나타났다. 시간을 멈춘다고 해도 모든 방향을 포위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포위되기 직전 테드의 몸은 사라져 있었다.

바알은 짜증을 담아 혀를 찼다. 미래를 예지하는 힘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성가셨다.

“안색이 점점 안 좋아 지는게 눈에 보이는데. 아마도 무한정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게 아닌 거겠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바알은 대처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시간을 멈춰서 자신을 죽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죽일 수 있었다면 이미 죽였겠지.

“네가 날아가면서 등뒤가 보였어. 그건 분명히 레칸의 문장이야. 혹시 그 옷이 시간을 멈추는 힘의 정체야? 응?”

“…….”

테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알은 시간정지와 라그나로크 같은 또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경계해서 섣불리 다가가 주먹을 때리지 않았다.

바알이 파악하려는 듯이 테드를 쳐다봤다. 덕분에 벌어진 아주 잠시간의 고착상태. 테드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암브로시아(Ambrosia).”

고대 마법을 발동한다. 온전하게 발동한 것도 아니며, 열화시켜 발동한 것도 아니었다.

1분, 단 1분 동안 암브로시아의 효과를 압축 시키는 대신 위력을 올렸다.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는 알 수 없다. 처음 하는 것이라 실패할 가능성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마법은 성공했다. 온몸에 느껴지는 힘이 그것이다.

바알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변한 테드의 분위기와 힘을 감지한 것이다.

“씨발. 또 뭐야? 도대체 숨겨 놓은 게 몇 개야?”

“바알. 너는 나를 일초라도 빨리 죽였어야 했다.”

“지랄. 어차피 시간 정지 시켜서 다 피했을 거잖아? 안 그래?”

“…….”

매우 옳은 말이라 테드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영력도 거의 떨어졌고, 앞으로 멈출 수 있는 시간은 10몇 초에 불과했다.

테드가 지면을 박찼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바알의 앞에 도달했다.

“뭣…?!”

바알의 놀란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겉모습은 어린아이 인지라 제법 귀여웠다.

테드가 주먹을 뻗었다. 목표는 그녀의 얼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주먹이 통통한 뺨에 닿고, 바알의 몸이 테드가 방금 날아갔던 것처럼 날아가 땅바닥에 쳐박혔다.

“하. 하하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바알의 메마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끊겼을 때, 바알은 테드의 앞에 있었다. 그녀는 씩 웃고는 오른 주먹을 휘두른다. 테드가 복부를 맞았다. 양다리를 땅에 박아 날아가지 않았다.

“어라? 이번엔 맞았네? 이젠 시간도 못 맞추는 거?”

“그럴 리가. 피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테드의 주먹이 위에서 아래로 바알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떨어지는 머리를 무릎으로 올려 찬다. 왼손으로 상처입은 목을 붙잡고 있던 바알이 왼손을 본격적으로 전투에 투입시켰다.

그 이후는 단순한 치고 박기의 반복이었다.

그들은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정잡배처럼 싸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발차기와 주먹은 하나, 하나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거대한 바위마저 가볍게 깨부순다는 점이었다.

테드가 가슴을 맞으면, 바알은 한쪽 어깨가 뒤틀렸다. 바알의 왼팔이 꺾이면 테드가 피를 토했다.

몇 십초. 짧은 시간의 난투 끝에 테드는 바닥에 쓰러졌다. 패배의 원인은 회복력에 있었다. 암브로시아로 신체 능력을 바알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곤 하지만, 회복력만큼은 바알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악마와 인간이라는 종족의 차이였다.

“하하하하하하하! 기분 째지는데!!!”

바알이 광소를 내보이며 포효했다. 그녀의 앳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테드의 몸이 정상이 아니듯 바알의 몸또한 성치는 않았다. 한 쪽 눈은 밤탱이가 되어 퉁퉁 부어있으며, 왼팔은 반대방향으로 꺾여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오른발은 축 늘어져 힘이 없다. 활짝 벌린 입안은 피로 가득하며 두 개의 콧구멍에선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거야! 이거! 씨발! 이런 개싸움을 원했다고! 이게 진짜 싸움이지!”

방금의 전투는 무술이라는 잡기술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저 단순히 압도적인 힘으로 한 방, 한 방이 묵직한 일격을 가진 싸움이었다.

바알이 쓰러져 있는 테드를 내려다봤다. 바알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것조차 벅찰 정도다. 그럼에도 붉은 두 눈 만큼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냉정하게 빛나며 기회를 찾고 있었다.

바알의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 씨발! 갑자기 존나 꼴리네! 야, 한 번하자. 대줄게. 넌 어디 가서 바알 따먹었다고 자랑해도 돼. 존나 영웅취급 받을 거야.”

“미친년.”

바알이 검은색 핫팬츠의 단추를 열었다. 그녀의 몸에 딱 맞는 핫팬츠는 그것만으로 흘러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새하얀 살이 보였다. 바알은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뭘 빼고 그래. 네가 꼴리게 했으니 책임져야지.”

“네. 알겠습니다. 하고 덮칠 것 같나. 미안하지만 소아성애자가 아니어서.”

테드가 몸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암브로시아는 아직 풀리지 않았을 텐데. 양다리가 엄청나게 후들거렸다. 여기 저기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안 한다고? 너 인간 남자 맞냐? 내가 듣기로 그것들은 365일 발정이라던데.”

“안 해.”

테드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남은 시간은 수 십초. 그냥 한다고 하고 시간을 벌걸 그랬나하고 뒤늦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바알과 떡을 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바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무언가 떠올린 듯 씩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고자였구나. 너.”

“죽여 버린다.”

테드가 살의를 일으켰다. 주먹을 쥐었다.

바알이 양손을 휘저었다.

“관둬, 관둬. 넌 이미 제 상태도 아니지? 보면 알아. 반면에 난 벌써 절반 이상을 회복했다고. 이 빌어먹을 목만 제외하고.”

그녀가 말하는대로였다. 바알의 양팔과 양다리가 멀쩡하게 움직였다. 경이적인 회복속도였다.

싸우면 진다.

테드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걱정 마 안 죽일 테니까. 이번엔 순순히 물러나줄게. 대신…. 다음번에도 이렇게 싸워보자고. 난 이런 싸움 진짜 좋아하거든!”

테드는 경계를 그만두지 않았다. 언제 바알이 태도를 바꾸고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바알은 시간이 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시시껄렁한 농담 몇 개를 내뱉을 뿐이었다. 대부분이 욕과 음담패설뿐이어서 그녀의 어린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바알은 사라지기 직전에 테드의 멱살을 붙잡아 끌어 자신의 코앞으로 가져다 댔다. 암브로시아가 풀린 상태라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 있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테드는 그녀의 딱밤 한 방에 죽을 자신이 있었다.

“넌 내가 찍었어. 괜한 병신에게 뒈지지 말고. 나랑 뒹굴다 뒈져야 돼. 알겠어?”

“모르겠다만.”

“새끼. 좋으면서 빼기는.”

바알이 입술을 부딪혀왔다. 혀가 침입하려 했지만, 입술을 열지 않자 바알이 이를 세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테드의 피를 핥고 만족스럽게 낄낄 거리며 사라졌다.

테드는 바알이 사라지마자 땅바닥에 엎어졌다. 감긴 두 눈은 본래의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사이나… 더럽혀진 날 용서해줘….”

흙바닥에 고개를 쳐박고 수마에 빠져들었다. 사이나가 테드를 찾은 것은 그로부터 3분 뒤였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