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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에이션트 드래곤.
드래프리온의 수호룡, 중간계 최강의 생물이라 일컬어지는 에이션트 드래곤이 작은 주먹 한 방에 절명했다. 바알을 제외한 모든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광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쉽지 않았다.
바알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늘에 떠있는 아르손에게 시선을 주고, 사이나와 테드 크루시안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진다.
‘8분이라고 했던가.’
가장 빠르게 냉정을 되찾은 테드는 머리를 굴렸다. 아스타로트가 떠나기 전에 8분 뒤에 바알을 소환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 8분 동안 바알의 공격에서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주먹 한 방에 크루틱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 저런걸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도망칠까.’
그것이 최선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알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지도 불명확하다. 크루틱을 일격에 날려버린 힘이라면, 도망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도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도대체!]
“엉?”
울분에 찬 포효가 들려왔다. 바알의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온몸에서 청백색의 번갯불을 튀기고 있는 아르손이 있었다. 두 눈에선 살기가 줄줄 흘러나온다.
[도대체 네놈들은 무엇이 목적인 것이냐! 질리지 않고 네메스에 찾아 와서는…!]
바알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뭐, 탐나니깐 아니겠어? 마계는 더럽게 좁고, 더럽게 따분하거든.”
바알이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마계의 공기나 중간계의 공기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 숨 쉬는 것에 큰 지장은 없다.
“중간계는 공기도 달라. 마계의 공기는 끈적거리며 목구멍에 들러붙는 것 같아서 좆같은데, 중간계 공기는 그냥 확 뚫어 줘버려. 씨발, 진짜 질이 다르다니까. 질이.”
뭐가 그리 웃긴 것인지 그녀가 제 혼자 킬킬 거렸다.
[네년… 네년을 씹어 먹고, 그 빨간 머리 악마놈도 죽여버릴 것이다!]
아르손이 여의주를 까득 깨물었다. 산산조각난 여의주가 품고 있던 마나가 그대로 육체로 흡수되었다. 아르손을 중심으로 바람과 번개가 휘몰아쳤다. 그 모습은 흡사 폭풍의 갑옷을 두른 듯 했다.
“이런 날 먹겠다는 놈이 또 늘어났잖아. 이 모습이 되고선 대충 네가 2,000번째 정도 될 거야. 근데 날 먹어본 연놈이 없어. 아마 지금쯤 저승에서 열심히 딸딸이나 쳐대고 있을 걸.”
테드는 바알과 아르손이 서로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마법을 준비했다. 이미 사이나에겐 애쉬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텔레포트 마법을 은밀하게 그리기 시작한다. 아르손이 바알의 손에 곤죽이 됐을 때쯤이면, 자신들은 이곳에 없을 것이다.
“허튼 짓거리 하지마! 넌 조금 있다 놀아줄 테니까!”
바알이 발을 굴렀다. 거센 마력의 파동이 지면을 훑고 사라진다. 테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단지 마력을 방출한 것 뿐인데 내부가 흔들리고 마법진이 파괴되었다.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이었다. 동시에 그녀는 겉보기와 달리 테드가 은밀하게 마법을 준비하는 것을 눈치챌 정도로 예민했다.
테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약자의 기분, 무력감이다.
“자, 그럼.”
바알의 시선이 다시 아르손에게 향했다. 아르손은 중심에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동그란 구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체는 회전하면서 번개와 폭풍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빛마저 그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공간이 왜곡될 정도인가… 맞으면 아프겠는걸.”
바알은 어린아이의 장난을 받아 주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어디까지나 맞으면의 이야기지만.”
바알이 제자리에서 몸을 뛰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줄넘기를 하듯 다리도 굽히지 않은, 몸을 풀듯이 가벼운 제자리 뛰기였다. 7번째의 제자리 뛰기를 넘어 8번째가 되는 순간이었다. 바알의 몸이 사라졌다.
테드는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고결한 눈》은 바알의 움직임을 겨우 포착했다.
아르손의 코앞에 나타난 바알이 수도로 아르손의 목을 내리쳤다. 아르손의 거대한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흙먼지를 일으켰다.
“그리고 너무 느려. 필살기는 상대가 아무것도 못할 때 쓰라고. 병신.”
바알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내려섰다. 아르손의 신체는 허공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죽을때의 모습 그대로다. 공간을 빨아들이는 듯한 작은 폭풍도 사라지지 않고 회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르손의 육체가 땅으로 내려서고 폭풍이 바알을 노리고 떨어진다.
바알은 어디까지나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녀가 농구공을 넘겨받듯이 양손을 내밀었다.
검은 것. 어둠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것이 양손사이에 나타난다.
바알이 어둠을 폭풍을 향해 던졌다.
테드는 폭풍이 어둠을 집어 삼킬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폭풍은 공간까지 왜곡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블랙홀의 하위호환이다. 허나 나타난 결과는 예상과 정반대였다.
어둠이 순식간에 늘어나더니 폭풍을 단숨에 집어 삼켰다. 폭풍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좋아. 좋다고! 힘하나는 끝내주는데! 역시 보양식에 드래곤만 한 게 없다니까!”
폭식.
무엇이든 먹어서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권능.
사이나에게서 들은 바알의 권능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도 힘이지만, 권능도 그에 못지 않게 무지막지하다.
테드가 마력을 끌어 올렸다. 다음 차례가 자신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알의 시선
은 테드의 반대편을 쳐다봤다.
유난히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미로보다 더한 숲이었다. 한번 들어간다면 나오기 힘들 것이고, 추적자를 따돌리기에도 최적인 곳이었다. 아까 토벌대원들의 대부분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친 곳이기도 했다.
바알이 이곳에 나타나고 3분도 지나지 않았다. 토벌대원들이 전력으로 달려도 저 숲을 통과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만둬!”
바알의 의도를 눈치 챈 테드가 수 백 개의 얼음과 불꽃의 창을 쏘아 보냈다. 어둠이 지면에서 솟아나 수 백 개에 이르는 마법의 창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바알이 섬뜩하게 웃었다.
“부탁 받은 게 여기 있는 생물은 모조리 죽이는 거라서 말이지.”
숲에 어둠이 내리앉았다. 어둠은 안개가 퍼지듯이 점차 늘어나더니 졸지에 숲 전체를 둘렀다.
어둠에 가려 나뭇가지 하나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바알이 박수를 짝 쳤다.
어둠이 늘어날 때 보다 더 빠르게 수축되어 사라졌다.
그곳에 더 이상 숲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풀조각도, 돌덩이도 없는 흙만이 남아 있었다.
바알이 몸을 돌렸다.
“나머지 놈들은… 뭐, 시간 나면 죽이지. 저기 말이야. 네가 테드 크루시안 이라는 씨발 새끼지? 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 아스타로트는 존나 찡찡대는데 난 한편으론 감사하고 있다고.”
“……감사?”
“감사해야지. 네가 아스타로트가 세운 사이비교를 대륙에 퍼뜨리고, 찾아내서 끈질기게 방해해준 덕분에 그놈이 나를 찾아왔거든. 네가 아니었다면 중간계의 신선한 공기를 맡을 기회도 못 얻었을 거야. 그러니….”
바알이 테드의 앞에 나타났다. 테드는 그녀의 연보라색 머리카락으로부터 피비린내를 맡았다. 그건 일시적으로 풍기는 체향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수도 세아릴 수 없을 정도로 농축되고 압축되어 자연스럽게 풍기게 된 냄새다.
“적당히 놀아줄게. 앞으로 5분 정도 남았나? 원래 내가 적들은 그냥 일격에 다 쳐죽이는데. 넌 운이 굉장히 좋은 거야. 날 5분 이상 상대하고 살아남은 놈은 천계의 개썅년을 비롯해 다섯 명도 안 되거든.”
“그거 참, 영광… 입니다!”
테드의 주먹이 바알의 복부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친절하게도 노출되어 있는 새하얀 배에는 배꼽이라는 과녁이 있었다.
마력이 담겨 바위도 부숴버리는 주먹이 복부에 닿았다. 허나 바알의 반응은 없었다. 유녀의 매끈한 복부는 조금의 파문도 일으키지 않았다. 자신의 주먹이 솜주먹이 된 것 같았다.
“…….”
바알과 테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알이 씨익 웃었고, 테드도 그녀를 따라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익스플로젼 마법이 발동되어 폭발했다. 위광을 믿고 사용한 제로거리에서 발동했다.
검은 연기가 날아가며 바알의 모습이 드러난다. 효과는 없었다. 익스플로전은 바알의 머리카락 한 올 태우지 못했다.
바알이 주먹을 쥐었다.
“요술쟁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주먹이란 건 이렇게 쓰는 거야.”
복부에 작은 주먹이 꽂혔다. 테드의 몸이 뒤로 날아간다. 수 십 그루의 나무와 바위와 부딪히고서도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200M 이상 날아간 테드는 먼지로 인해 콜록였다.
크루틱을 단 번에 죽여버린 위력은 아니었으나, 위광이 아니었다면 확실하게 죽었을 위력이었다. 위광도 흔들렸다. 앞으로 한 대만 더 맞으면 당장 위광은 효과를 잃을 것이고 회복에 몇일은 걸릴 것이다.
테드는 스킬을 이용해 사이나에게 애쉬를 데리고 멀어지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도 바알은 사이나의 존재를 알면서도 보내주었다.
같은 악마라서 방심한 것인지, 어디로 도망치든 찾아내 죽일 자신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후자 쪽이라고 테드는 생각했다.
“아주 멀쩡하잖아? 씨발, 상급 악마 새끼들은 한 방에 뒈지던데. 그 새끼들은 어째 요술쟁이 인간보다 약하냐. 아주 날잡고 교육좀 시켜야겠어.”
바알이 지면을 박찼다. 테드를 향해 오른쪽 다리를 뻗으며 날았다.
앱솔루트 배리어로도 막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말로는 5분 동안 놀아주겠다는 건데… 주먹 한 방, 한 방이 황천으로 가는 초특급행 열차 티켓이었다.
날아오는 발차기를 어떤 마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 주먹의 위력을 생각하면 앱솔루트 배리어는 경로를 바꾸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검은 샌들을 신고 있는 작은 발이 테드의 머리를 가격하기 직전, 시간이 멈췄다.
“끄응. 진짜, 이 괴물같은 년은 왜 나타나선…. 시스템 자식. 제대로 일 안하나.”
테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같아선 이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마력을 움직이지 못해 두 다리로 도망가야 하는데, 시간을 멈출 수 있는 건 2분도 되지 않는다. 2분 동안 뛰어서 도망칠 수 있는 거리는 한정되어 있다. 금방 바알에게 붙잡힐 것이다.
다행인 점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그녀는 방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벌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드래곤을 일격에 죽여버리는 바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생각 일 것이다.
테드는 그 부분을 노리기로 했다.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엉? 이게 뭐야?!”
땅바닥에 내리꽂힌 자신의 공격에 바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라진 테드를 찾는건 어렵지 않았다. 기감으로 등뒤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어떻게 자신의 눈을 속이고 뒤로 돌아간 것인가다.
움직이는 모습은 뛰어난 자신의 눈으로도 확인하지 못했다. 공간 이동계 마법이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바알이 자신의 뒤를 쳐다봤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로 기묘한 자세를 하고 있는 테드가 보였다.
“뭐야, 어떻게 피했어? 움직이는 거 못 봤는데.”
“내가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못 봤나 보군.”
“내 눈보다 빠르다고?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병신새끼야. 그냥 말하기 싫으면 비장의 수라고 말해! 보나마나 시스템이 준 스킬인가 먼가하는 거겠지!”
테드가 오른손으로 후드 끝을 잡고 깊이 눌렀다. 그늘 속에서 붉은색의 두 눈이 반짝인다.
“이거야 원….”
바알이 달려들었다. 오른 주먹이 테드의 얼굴을 노렸다. 동시에 테드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주먹은 허공을 때렸다.
“…피했어? 아니, 뭔가 이상한데… 피하기보단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이 달려들 때 테드의 머리가 움직였다. 때리는 곳을 미리 알고 있는게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이 경우 2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독심술. 바알의 생각을 읽고 공격 경로를 알아낸 것이다.
둘째는 예지. 미래를 보고 공격을 피한 것.
“확인해보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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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