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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93화 (19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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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에이션트 드래곤.

“하여간 드래곤이란 것들은….”

현재 상황에서도 한도 끝도 없이 높은 자존심하나는 대단하다. 감탄사가 나온다. 그 자만감이 에이션트 드래곤을 멸종의 위기에 까지 내몰리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치지 않는다. 테드는 그들이 시스템에 의해 수호룡이 된 것이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아르손이라 했나…. 지금 상황에서는 크루틱을 처리 하는게 먼저 일 텐데.”

[이것은 드래곤의 일이다! 크루틱은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댁이 해결 못하니까 내가 나선거다. 지금 상황에서 뭐가 더 중요한지 똑똑한 머리로 생각해 봐라.”

[…….]

싸늘한 테드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르손으로 부터의 반박은 없었다. 자존심은 높아도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란 것이다.

아르손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르손. 네가 고작 인간 놈의 말에 넘어갈 줄은 몰랐군.]

[닥쳐라. 크루틱. 지금은 무엇보다 네놈을 막는 게 급선무다.]

[둘 모두 나의 흑마법의 제물이 되어라.]

호기롭게 외친 크루틱이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테드 크루시안이라는 인간은 아포칼립스를 사용한 것만 봐도 보통이 아니다. 둘 모두를 상대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해서 도망칠 생각은 일절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자신의 목적이 영원히 무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 수는 남아 있다.

[다크 스톤.]

크루틱의 곁에 생겨난 마법진으로부터 검은색 수정석이 나타났다. 1M가 넘는 크기를 가진 육각형의 수정은 허공에 떠있다.

테드가 눈가를 좁혔다. 처음 보는 흑마법이었다. 아마도 크루틱의 비전 마법일 것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아직 완성 되지 않은 흑마법의 실험물이 되는 것을.]

무슨 마법인지 모르지만, 내버려두면 귀찮아질게 뻔하니 파괴하는 게 나았다. 테드가 다크 스톤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붉은빛의 레이저가 쏘아졌다. 크루틱은 레이저를 막지 않았다.

붉은 빛의 레이저가 다크 스톤의 매끈매끈한 표면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레이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다크 스톤에서 검은색 연기가 흘러나와 크루틱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마법을 흡수한 건가.”

[마법뿐만이 아니다. 마나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흡수하지. 그게 설령 성법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다.]

자신이 만든 마법에 깊은 자부심이 깃든 말이었다.

“친절하게도 떠들어 주시는군.”

테드가 아공간을 열어 검을 꺼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양산형 검이다. 시스템에 의해 부여된 스킬이나, 마법적인 힘은 전혀 없다. 생각같아서는 대마법으로 한 번에 날려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대마법을 흡수할 수도 있었다. 고스란히 마나를 바치는 꼴이 된다.

이 경우엔 조금 번거롭더라도 안전하게 물리적인 힘으로 다크 스톤을 박살내면 그만이다.

[뭘 그렇게 준비하고 있나. 아르손!]

어둠으로 이루어진 3개의 창이 거대 마법을 준비하고 있는 아르손을 노린다. 마법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아르손이 창을 피하지 못하고 몸으로 받아 들였다. 창은 아르손의 피부에 아주 약간 생채기를 입혔다. 창에 걸려 있는 상처가 커지는 저주가 발동된다.

깡!

테드가 블링크로 단숨에 접근해 다크 스톤에 검을 내리쳤다. 부서진 것은 테드의 검 쪽이었다. 테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마법으로 강화시키지 않았다고 해도 강철검이 부러질 줄이야.

[헛수고다. 인간의 힘, 하물며 마법사인 네놈이 순수 육체능력으로 부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루틱은 자신 가까이 다가온 테드를 막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보라색의 독이 코와 입에서 흘러나와 퍼졌다.

독은 위광에 막혀 테드에게 닿지 못했다.

아공간을 열어 또 다른 장검을 꺼냈다. 마나를 아끼기 위해 3개의 ‘힘 강화(Strength)’ 마법을 사용한다. 검을 휘둘렀다. 깡! 이번에도 강철 검이 부러졌다.

독이 통하지 않는 것을 깨달은 크루틱이 커다란 꼬리를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배리어를 펼쳤던 테드는 혀를 찼다. 근처에 있는 다크 스톤이 배리어를 흡수한 것이다.

꼬리의 충격에 의해 뒤로 날아간다. 요란해보여도 그가 걸치고 있는 위광이 충격을 흡수했기에 실제로 받은 데미지는 없었다.

하늘에서 기회를 보던 아르손이 크루틱이 정신이 팔린 틀을 타 땅으로 쇄도했다. 입을 벌리고 물어뜯을 기세였다. 놀란 크르툭이 오징어가 먹물을 내뿜듯이 독을 분사했다. 아르손은 개의치 않았다.

아르손이 크루틱의 어깨를 깨물었다. 송곳니에서 하얀 번갯불이 튀었다. 아르손은 악어가 사냥을 하듯 몸을 회전시켰다.

크루틱이 팔과 다리를 이용해 아르손의 몸을 마구 쳤다. 그러나 아른손의 입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꼬리로 아르손의 몸을 마구 떄리자, 아르손의 길쭉한 몸이 아나콘다처럼 달라붙어 조이기 시작했다.

[아르소오오온!!]

그들이 한데 뒤엉켜 땅바닥을 굴렀다. 부딪힌 나무가 풀조각처럼 맥없이 쓰러지고, 근처에 있던 토벌대원이 미처 도망가지 못해 몸이 짓눌러 사망한다.

크루틱은 독주머니가 텅텅 빌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독을 내뿜어댔다. 땅이 검게 변색될 정도였다. 중독된 아르손의 힘이 점점 풀려나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크루틱이 아르손에게서 벗어났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뭐냐! 이 개 싸움은! 드래곤 답게 싸워라, 아르손!]

크루틱이 피를 흘리며 악을 질렀다. 아르손이 비틀거리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너를 죽여 세계를 수호하겠다!]

아르손의 입안에 투명한 구슬이 물린다. 한 없이 투명한 구슬에선 막대한 마나가 느껴졌다.

[드디어 여의주를 꺼내 물었군.]

비룡에게만 전해지는 특별한 비법으로 만들어진 여의주는 아르손이 마나를 모아놓은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드래곤 하트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마나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크루틱의 다크 스톤을 여의주를 저격해서 만든 것이다.

[모여들어라. 뇌전이여.]

아르손을 중심으로 폭풍이 형성된다.

[마룡화(The Evil Dragon).]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어둠이 크루틱의 몸에 달라붙었다. 크루틱의 몸집이 조금더 커지고, 이빨이 날카로워진다. 아르손에게 입은 상처는 급속도로 회복되어간다. 한 발자국 앞으로 걸어갔다. 넘치는 힘에 땅바닥이 파였다.

[사악한 흑마법의 결과물인가…! 추하구나, 크루틱!]

[이 압도적인 힘이 느껴지지 않는 거냐, 멍청한 아르손이여. 너를 먹고 이 감옥에서 벗어나겠다.]

그들이 끝을 향해 달려가려는 찰나였다. 붉은색 머리의 미청년, 아스타로트가 쓰러진 지르켈리안의 몸위에 올라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크루틱. 네 일은 끝났다. 수고했다.”

[……무슨 의미냐 아스타로트.]

기회를 엿보고 있던 테드가 사이나를 불렀다. 사탄교에 대비해 숨어 있던 사이나가 백색의 검, 나찰을 들고 아스타로트를 향해 뛰었다. 아스타로트가 팔을 저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용이 사이나를 노렸다. 사이나가 권능을 사용했다가 뒤로 물러났다. 사이나의 권능이 통하지 않았다.

현재 사이나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도 전에 봤을 때보다 강해졌다는 것이다. 사이나는 그가 시스템의 제약을 어떻게 푼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말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아스타로트!! 계약을 위반하려는 것이냐?!]

“계약은 너의 싸움에 내가 끼어들지 않는 것이었지. 안심해라. 나는 계약을 지킨다.”

아스타로트는 마력을 사정없이 끌어 올리는 테드와 적의를 불태우는 사이나를 한 번 보고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르켈리안의 시체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다. 마력과 굉장히 닮아 있는 그 기운은 엄밀히 말하자면 마력이 아니었다. 아스타로트를 비롯한 악마들은 이 기운을 ‘악마기(惡魔氣)’라고 부른다.

“감사를 표하지. 크루틱. 네 덕분에 쉽게 올 수 있었다.”

가볍게 점프해 지면에 착지한 아스타로트는 지르켈리안을 쳐다봤다. 지르켈리안의 꿰뚫린 가슴으로부터 검은색 촉수 수 십 개가 튀어나와 시체 여기저기에 연결한다. 검게 변한 지르켈리안의 시체가 마치 심장처럼 고동쳤다. 거대한 몸이 두근두근 거릴 때마다 땅이 진동한다.

사이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여갔다. 시체로부터 흘러나오는 악마기는 점점더 주위로 확산되고 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네가 가장 먼저 눈치 챘군. 하지만 네게 일일이 말해줄 시간은 없어서 말이지. 그리고… 아직 필요한 게 남아 있다.”

아스타로트가 크루틱을 쳐다봤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예상대로 사탄의 심장이 시스템의 개입을 막아주고 있다. 사탄의 심장 주위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지만, 중간계에서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에 비하면 패널티도 아니다.

“크루틱. 하나 충고해주지. 악마의 계약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이 충고가 네게 얼마만큼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만.”

[……네놈, 여기서 배신하는 것이냐?! 지금 당장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애석하게도 나는, 지금 만들어진 보물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너를 상대하는건 내가 아니다.”

아스타로트가 손을 저었다. 바로 앞에 그의 연옥 중 하나로 통하는 고품스러운 문이 만들어진다. 손잡이가 없는 시커먼 문이 소리 소문 없이 천천히 열렸다.

단지 문이 열린 것뿐인데도 온 사방에 엄청난 압박감이 내려앉았다.

크루틱의 분노가 찬물을 껴얹은 듯 식어버렸다. 아르손이 저도 모르게 더 높이 날아올라 거리를 벌렸다. 아스타로트의 뺨에 식은땀이 맺혔다. 항상 냉정하던 사이나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테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삼켰다.

주위에 있던 토벌대원들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도망쳤다. 여기가 온갖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드래곤 마운틴의 안쪽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이 휘몰아쳤다.

뚜벅. 발소리를 내며 문을 통과한 것은 통굽이 달리고 끈이 발목까지 감싸고 있는 검은색 샌들이었다. 하얗고 작은 발이었다. 허나 느껴지는 존재감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발을 시작으로 빠르게 모습이 드러났다. 근육이라곤 눈으로 찾을 볼 수 없는 새하얀 종아리와 허벅지가 이어졌고, 검은색의 핫팬츠 위에는 배꼽을 노출한 가는 허리가 있었다. 납작한 가슴 부위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탱크탑이 감싸고 있다.

7~8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유녀는 엉덩이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연보라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여아로밖에 보이지 않으나, 붉은색의 눈동자와 시니컬하게 웃고 있는 입가는 여자아이의 표정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바알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납작한 가슴안에 공기가 가득차 부풀어 오른다. 이윽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푸하아! 씨발! 이게 얼마만의 중간계의 신선한 공기냐! 악마기 따윈완 차원이 달라요. 차원이! 아주 죽여주네!”

유녀는 외양에 어울리는 앳된 목소리로 익숙하게 욕설을 지껄였다.

“바알. 네 도움이 필요하다.”

“…아앙? 지금 중간계의 공기에 흠뻑 젖어 있는 거 안 보이냐? 이 눈치 없는 새끼야.”

“넌 내게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공기를 만끽하는 건 그 후로 해도 늦지 않을 텐데.

그때는 네가 공기를 맡든지, 핥든지 신경 쓰지 않겠다.”

“칫. 그래. 내가 어떤 새끼를 족쳐줄까?”

바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찼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쪽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생물이다.”

아스타로트는 사탄의 심장에서 뽑아낸 기운을 바알에게 건넸다. 이것으로 사탄의 심장이 없어도 중간계에서 10분 정도는 문제없이 힘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음! 아주 좋아. 마음에 드는걸.”

“……8분 뒤에 널 다시 소환하겠다.”

바알은 대답하지 않고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보드라운 작은 손을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아스타로트가 지르켈리안의 시체와 함께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테드는 막을 수 없었다. 아스타로트를 신경 쓰기에는 바알의 위압감이 엄청났다. 지금도 몸이 위축되려고 한다.

“저게 광폭의 마왕인가…. 제길.”

테드가 입술을 곱씹었다. 전력을 다한다면 이길 수 있을까? 확신이 서기는커녕 질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자. 누구부터 죽을래? …음. 시간도 없으니 그냥 가까이 있는 검둥이 너 부터하자.”

자신이 언급됐을 때, 크루틱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것이 크루틱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다가왔다.

[이…! 주제도 모르는 악마 년이!]

크루틱이 한 입에 삼켜버리기 위해 지면을 박찼다. ‘마룡화’ 마법은 일시적으로 마룡이 되어 신체 능력을 대폭 상승시킨다. 아무리 자신의 독이 없고, 신체능력이 뛰어난 악마라 하더라도 단번에 씹어 먹을 수 있다.

“주제도 모르는 건 너야. 도마뱀.”

바알이 주먹을 쥐었다. 크루틱의 거대한 몸체를 보자면 너무 작아서 웃음도 안 나올 정도의 주먹이었다.

“좋은 거 알려줄까? 네 조상들을 술로 담궈 봤는데 끝내주게 맛있더라.”

주먹을 내질렀다.

저항도 비명도 없이 크루틱의 몸이 터져나갔다. 피와 내장과 살점이 후두둑 떨어졌다.

바알의 권압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숲이 갈라졌다. 나무가 빡빡하게 들어서 있던 숲의 일부가 통째로 날아가 길이 만들어졌다.

“아, 흑룡은 독 때문인지 아주 톡 쏘는 맛이었더라. 씨발. 괜히 땡기네. 용주는 다쳐먹어서 이젠 없는데….”

바알이 입을 쩝쩝 다셨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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