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25. 에이션트 드래곤.
“……플레이그(Plague). 크루틱 이 미친 새끼가….”
토벌대 전원이 감염되어 있었다.
테드가 이 지경에 와서야 알아차린 것은 크루틱의 실력과 마법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게 발동되는 흑마법의 특징에 있었다. 대마도사의 실력을 가진 테드가 이 정도이니 토벌대에서 알아채고 흑마법에 대비를 한 인물은 없었다.
“플레이그…? 이게 뭔지 알고 계십니까?”
콧구멍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애쉬가 물었다.
“흑마법이에요. 일종의 전염병이죠. 앞으로 3시간이면 토벌대는 전원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겠죠.”
요컨대 시한부 생명이란 말이다. 애쉬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치료법은 당연히 있겠죠?”
“플레이그는 결계처럼 지속형 범위마법이에요. 공기가 병균에 완전 오염 된거나 다름없어요. 포션이나 마법으로 치료해도 일시적인 회복일 뿐이죠. 성법의 고위 회복기인 ‘리스토레이션(Restoration)’라면 완전 회복할 수 있어도… 그 외에 방법은 플레이그의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술자를 죽이는 것뿐이죠.”
“여기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겠군요. 괜히 움직였다간 몬스터의 먹이가 될 테니까요.”
애쉬는 사면초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토벌대를 설득해 이곳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크루틱이 내버려둘 리가 없다.
크루틱을 죽이는 것도 마땅치 않다. 그도 수호룡 중 하나인 에이션트 드래곤이다. 이곳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건 테드와 사이나 밖에 없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요?”
“숨어 있는 사탄교를 찾아주세요.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숨어있는 사탄교가 모습을 드러낼지도 몰라요.”
“그럼 테드님은?”
“크루틱을 막아야겠죠. 수 천명을 죽게 내버려둘 순 없으니까요.”
흑마법은 마나와 생명력을 사용한다. 악독한 점은 자신의 마나와 생명력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것까지 멋대로 빼앗아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플레이그는 생명력을 뽑아내기 위한 수작일 것이다. 몰살이 목적이었다면 플레이그로 천천히 몰살 시키는 흑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
그때 녹룡 지르켈리안을 중심으로 거대한 강풍이 휘몰아쳤다. 지르켈리안의 주위에 머물려 있던 다크 스웜이 흩어진다. 허나 강풍이 멎자 다크 스웜이 다시금 모여들기 시작해 군체를 이룬다.
다크 스웜을 구성하고 있는 쇠파리는 육식 벌레다. 동물이나 사람을 갉아 먹는 것으로 마나를 흡수해 시전자에게 전달한다. 악질 적인 것은 상처에 알을 낳아 구더기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구더기 또한 육체를 갉아 먹어 순식간에 성장한다.
[언제까지 인간들 속에 숨어 있을 것이냐?!]
지르켈리안이 포효를 내질렀다. 녹색을 머금은 바람이 다크 스웜의 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다크 스웜의 일부가 피안개로 변해 허공중으로 사라진다.
테드는 저들 사이에 끼어들까하다가 멈췄다. 아직 크루틱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탄교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긴 꺼려졌다.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것이냐?]
지르켈리안의 거대한 몸에 다크 스웜이 달라붙는다. 날카로운 이빨은 지르켈리안의 녹색 비늘에 흠칫하나 내지 못했다. 지르켈리안에게 있어 다크 스웜은 귀찮은 날벌레밖에 되지 않았다.
[장난도 정도껏 해라!]
지르켈리안이 힘차게 날개 짓한다. 달라붙은 다크 스웜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금 들러붙으려던 다크 스웜이 녹색 바람을 만나 피로 변해 사라졌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해 분노하던 지르켈리안이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확실하게 크루틱의 기척을 느꼈다. 더러운 벌레를 조종하는 마법도 크루틱이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허나 그 오만한 크루틱이라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인간 사이에 숨는 치졸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크루틱이 아니라고 한다면 인간들이 이곳까지 올 리가 없다. 지르켈리안의 영역은 숲정령의 미로가 걸려 있는 곳이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이는 숲을 파괴하지 않는 한 도달할 수 없다.
[침입자들이여! 너희들에게 물을 것이 있다!]
지르켈리안이 아래로 내려 보자, 그렇게 스스로가 용맹하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용인들이 감히 시선을 마주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발끝만을 쳐다봤다. 그들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가?!]
토벌대원들은 누군가가 대표해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떨쳐내고 지르켈리안의 질문에 답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믿었던 토벌 대장마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대답하라!]
녹룡의 호통이 들려왔다. 몇몇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지르켈리안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겠다는 일념 아래에 필사적으로 기침을 참고 있던 토벌대원들이 일제히 기침을 토했다. 흙바닥에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그건 설마…!]
최악의 흑마법중 하나인 플레이그.
다크 스웜과 플레이그를 동시에 운용하는 것은 막대한 마나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그래. 드래곤처럼 막대한 마나가 아니라면.
[크루티이익!! 불가침의 약속까지 깨면서 침범한 이유가 무엇이냐! 마침내 그 더러온 욕망을 끄집어 낸 것이냐?!!]
번영을 뜻하는 녹룡과 재앙을 뜻하는 흑룡은 사이가 좋지 않다. 앙숙이라고 하면 귀엽고 원수라고 하면 부족감이 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숲과 함께 통째로 날려주마!]
지르켈리안은 대화로 크루틱을 추궁하려 했다. 평소에도 온갖사고를 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는 크루틱이었다.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같은 에이션트 드래곤인 그를 죽일 순 없다.
허나 이번엔 도가 심했다. 자신의 영역에 멋대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 공격마법을 전개했다. 놈에게 긍지와 명예는 없음을 오늘에 와서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지르켈리안이 입을 벌렸다. 큰입을 통해 천천히 숨을 마신다.
“브레스는 관둬라. 지르켈리안.”
평탄한 어조의 목소리는 주위에 녹아드는 것처럼 토벌대원들의 귀에 스며들었다.
토벌대원들의 얼굴이 거무튀튀하게 죽어갔다. 토벌대장이 녹룡을 향해 무례한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크루틱! 이게 뭐하는 짓거리지?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 당장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토벌대장의 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육체를 의태한 상태에선 능력도 제한되기에 녹룡의 브레스를 맞으면 중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설명이라… 그전에 앞서 질문이 있다. 지르켈리안.”
[질문. 질문이라고? 네놈에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이곳에 온 것과 아예 관련이 없는 질문은 아니지.”
크루틱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향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끊임없이 펼쳐진 산맥의 너머다.
“지르켈리안. 너는 이딴 좁아터진 섬에서 영역을 나눈다는 것이 비참하지 않나? 위대한 존재가 평생 집지키는 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미지 않나?”
[그 질문으로 확신했다. 네놈은 명예와 긍지를 져버렸군. 더 이상의 추태를 벌이기전에 이곳에서 멸해주마!]
지르켈리안이 대기의 마나를 들이 마쉰다. 브레스는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만큼 준비시간이 필요했다.
“……뭐. 뼈속까지 변견으로 전락한 네놈의 반응은 예상대로다.”
토벌대장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난다. 검은 안개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하나의 형상을 취한다. 의태를 풀고 본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어딘가 전갈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르켈리안과 비교하자면 절반도 되지 않은 체구다. 햇빛을 받은 검은색의 비늘은 곤충의 그것처럼 반질거린다. 몸통에는 길고 가는 6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꼬리의 끝은 굉장히 날카로우며 수 십 개의 뿔이 제멋대로 돋아나있다.
날개도 없는 그 몸이 유일하게 드래곤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머리 부분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뿔과 이빨은 한 눈에 봐도 알 정도로 드래곤의 머리였다.
“이, 이게 무슨!”
“토, 토벌대장이 드래곤…?”
“재앙의 크루틱이다! 도, 도망쳐야 해!”
크루틱의 근처에 있던 토벌대원들이 혼란에 빠져 여기저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르켈리안에게 경외를 느꼈다면, 크루틱에겐 원초적인 공포밖에 느끼지 않았다.
[어리석은 것들. 네놈들에게 죽어서 내 마나가 되는 영광을 주마. 컨슘(Consume).]
크루틱 주위에 있던 모험가들의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터져나갔다.
컨슘은 근처에 있는 적이나 아군을 폭사시켜 자신의 마나를 채우는 방법이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마나로 몸을 보호하면 컨슘에 저항하는 것은 쉽다. 허나 혼란에 빠진 토벌대원들은 기습적으로 발동한 컨슘에 저항하지 못했다.
지금 100명 정도가 폭사 당했지만, 크루틱을 만족시키기에는 너무도 부족했다.
마나를 한껏 모아 배가 부풀어 오른 지르켈리안이 크루틱을 향해 녹색의 숨결을 내뱉었다. 그의 브레스는 드래곤들의 브레스 중에서도 위력면에서 최상위에 속한다.
그라인딩 브레스(Grinding Breath).
닿는 순간 가루로 변해 사라지는 브레스가 크루틱을 향해 쏟아졌다. 물론 크루틱은 브레스를 맞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워프게이트(Warp Gate)]
크루틱 앞에 나타난 푸른색의 워프 게이트의 안으로 브레스가 들어간다. 직선거리로 밖에 나가지 못하는 브레스의 단점을 이용한 카운터다. 아무리 강력한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지르켈리안이 거구를 움직였다. 흑룡인 크루틱은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신체능력이 떨어지지만, 마법능력은 최상위라 할 수 있다. 특히나 크루틱은 흑마법을 통해 마나와 생명력을 보충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이어가면 지르켈리안에겐 승산이 점점 떨어진다.
[물어뜯어 주마 크루틱!]
지르켈리안의 비늘 하나하나에 은은한 녹색바람이 서린다. 그 몸에 닿는 순간 어지간한 자들은 그대로 갈려나갈 것이다.
[망자의 손(Death Grab)]
지면에 그려진 검은 마법진으로부터 뻗어 나온 수 백 개의 검은 손이 지르켈리안의 몸을 붙잡는다. 지르켈리안이 한 순간 멈칫거렸다. 그가 몸을 떨자 망자의 손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흡혈 벌레(Brood Insect)]
3M크기의 붉은색 벌레 수 십 마리가 시끄러운 날개 짓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나타났다. 그것들은 검처럼 날카로운 입을 가지고 있었다. 흡혈 벌레가 지르켈리안에게 달려들었다.
[나와라 정령들이여!]
바람과 대지의 정령이 수 십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령들은 단숨에 흡혈 벌레를 바람으로 찢어버리고, 바위로 뭉개버렸다.
[크루틱! 너에게 안식을 내려주마!]
지르켈리안이 크루틱의 정면에 도달해 입을 쩍 벌렸다. 단숨에 목을 물어 뜯으려는 찰나였다. 크루틱의 몸에서 검은 번개가 튀었다.
검은 번개는 지르켈리안의 녹색 바람을 뚫고 육체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내 몸안에 흐르고 있는 독을 이용해 만든, 마나까지 동결시키는 마비(Paralyse) 마법이다. 아무리 너라 해도 단숨에 회복할 수 없을 거다.]
지르켈리안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으나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마나도 동결되어 있다.
[우리 마지막 남은 에이션트 드래곤은 살아온 세월에 비해 전투 경험이 별로 없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에 대등한 힘을 가진 자를 상대하는 법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다르다. 흑마법이란 힘으로 여러 가지의 실험까지 끝마쳤다. 같은 에이션트 드래곤으로서의 정으로 하나 알려주마. 지르켈리안. 동등한 적을 만났을 때, 힘을 아껴두는 것이 아니다. 숨기거나 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다.]
크루틱이 입을 벌려 지르켈리안의 한 쪽 날개를 물었다. 2개의 가늘고 긴 팔로 지르켈리안의 몸을 잡고 목을 비틀었다. 날개가 찢어지며 바닥에 피가 흘렀다.
녹룡의 날개를 입안에서 컨슘을 발동해 씹어 먹는다. 과연 드래곤의 육체 일부. 1천명을 컨슘으로 포식했을 보다 더 넘는 양의 마나가 차오른다.
[네놈이 처음부터 모든 정령을 소환했다면 승산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드래곤의 몸은 중간계의 어떤 생물보다 강대하다. 하물며 지르켈리안을 마법까지 사용해 강화시켰다. 그러나 크루틱의 눈에는 미친소가 뿔을 들이밀며 무식하게 달려드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젠 지금 상황에 만족하고 안주한 오만 한 놈이 누구인지 너도 잘 알 테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창창했던 날씨에 먹구름이 끼이기 시작했다.
크루틱을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랜곤 마운틴으로 점점 퍼져나가는 먹구름은 백색의 번개를 품고 있다.
[네놈은 내 본신을 확인하는 순간 청룡을 불러냈지.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였겠다만…. 칭찬해주지. 네 선택은 옳았다.]
먹구름 속에서 길쭉한 몸을 가지고 있는 푸른색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속을 헤엄치듯 하늘을 유영하고 있는 청룡의 주위에 번갯불이 반짝인다.
[크루틱! 너를 이곳에서 처단하겠다!]
청룡의 포효와 함께 번개가 내려쳤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