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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에이션트 드래곤.
“도대체 무슨 짓거리지. 그레온?”
인형과의 정신연결이 끊어지자마자 아스타로트의 핀잔이 날라 왔다.
목소리에 은은하게 서려있는 살기로 보아 그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레온은 심각함을 모르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역추적에 대한 방비는 완벽하게 끝냈어. 계획에 대해선 조금도 발설하지 않았어. 우리가 토벌대의 안에 있는 걸 모를 거야.”
“네 경솔한 행동으로 우리가 있는 곳을 짐작하게 되었을 지도 모르지.”
“아스타로트. 네가 조심성이 많은 건 좋아. 하지만 넌 겨우 인간 놈 하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아스타로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인간 놈 하나 때문에 줄줄이 계획이 실패한 것을 그레온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아니다. 나는 그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위험하다.”
“아. 그래. 메타엘이 놈에게 뒈졌고, 바알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있는 네가 높게 평가하는 것도 이해가 가. 하지만 나도 직접 놈을 만났어. 두 눈으로 확인했지.”
“그 눈으로 확인했다면 알고 있을 텐데. 그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레온을 비롯한 대부분의 악마가 중간계의 생물을 하등하게 생각한다. 아스타로트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생물 중에는 돌연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아주 적은 확률로 나타나는 그것들은 상식으론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에겐 테드 크루시안이 그랬다.
“아니, 잠깐!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면 놈의 과거도 보았나?”
그레온의 얼굴에 있는 미소가 한층 더 짙어진다.
“못 봤어. 과거가 보이지 않아.”
“……과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이지? 네 권능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게 아니었나?”
그레온의 과거시의 권능은 대상을 시야안에 넣고 과거를 보려고 하면 발동한다. 마력이나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 상대는 알아차릴 수 없다.
“전부에게 통하는 건 아니야. 대표적으로 마왕이라 불리는 놈들이지. 또 권능에 대한 방어라던가 있으면 통하지 않아.”
“…즉. 놈을 만나고 얻은 건 하나도 없다는 거군. 놈에게는 너에 대한 정보를 주었고.”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그레온이 고개를 으쓱였다. 서열은 아스타로트가 높으나 이곳은 마계가 아니라 중간계였다. 그에게 질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의미는 있어. 거기서 사이나를 만났거든.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미모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어. 청혼도 했는데 단번에 차였지 뭐야.”
“사이나… 그렇군. 사이나의 과거를 보았군.”
“그래. 봤어. 덕분에 네가 흥미로워할 정보도 가지고 왔지.”
으득. 사이나의 과거를 생각하자 기분이 최악으로 떨어졌다. 테드라는 인간 놈과 매일 밤마다 물고 빨고 온갖 짓거리 다한 것을 생각하면 짜증이 치솟았다. 지금 당장 찾아가서 테드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허나 참는다. 아스타로트가 허락해줄 리가 없으며 지금은 시기상조임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흥미로운 정보라면?”
“만난 순간이 짧아서 전부를 보는 건 불가능했지만, 무녀가 예언한 미래에 대한 건 알아냈어.”
“무녀의 예언인가. 그건 도움이 되는 정보군. 어떤 미래지?”
“네메스 대륙의 미래. 나아가 우리의 미래라 할 수 있겠네.”
“……성공했나?”
“축하해. 예언에서 네 계획은 절반 정도는 성공했어. 절반은.”
“성공했다면 성공 한 거지… 절반은 무슨 소리지?”
아스타로트는 탁월하게 침착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재촉하듯 빨라져 있다.
“천계에서 천사가 쏟아져 내렸다던데?”
“…….”
사탄교는 표면적으로 사탄의 부활을 꾀하는 악의 무리로 되어 있다. 사탄교의 대부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간부진은 중간계에 마계와 천계를 연다는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다.
아스타로트는 중간계에 다시 한 번 대성전을 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절반이 성공 했다는 건 마계가 열리지 않았다는 거군. 혹은… 악마들이 움직이지 않았거나.”
전자의 경우는 아스타로트가 주의를 하면서 실행하면 된다. 무녀의 예언은 어디까지나 예언이기에 바꿀 수 있다. 허나 후자의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악마들을 선동할 방법이 아스타로트에겐 그다지 없었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악마랑 천사가 지금 맞붙으면 악마가 질게 뻔해. 성공을 가정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 게 좋을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레온. 이번에는 넘어가 주겠다. 그러나 다음은 없다. 아무리 너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아스타로트의 서슬퍼런 경고에도 그레온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냉소할 뿐이었다.
“그러시든가.”
⁂ ⁂ ⁂
드래곤 마운틴 토벌 11일 째.
토벌대와 상인무리의 공기에는 한계까지 팽창하여 당장이라도 터질것만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공기와 섞여 있었다. 함부로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드래곤 마운틴의 초입에서는 고블린이 튀어나왔겠지만,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산맥의 안쪽이다. 고블린과 코볼트 대신에 오우거가 숲에서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앞서나가는 토벌대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으로 땀이 한 바가지였다. 발을 내딛을 때도 조심스러웠으며, 긴장을 풀어주려는 목적으로 농담을 건네는 소수의 동료들에게도 히스테릭하게 반응할 정도로 신경에 날이 서있었다.
어제만 해도 땅 아래에서 튀어나온 데스윔과 광학미채로 모습을 숨긴다는 카멜레온 드래곤에 의해 토벌 대원 수 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는 산맥의 안쪽을 토벌하는 3~4일은 계속 될 것이다.
“뭐야. 갑자기 상인들이 시끄러워 지는데.”
사이나의 뒤를 꾸벅꾸벅 졸면서 걷던 테드는 상인 무리의 어느 한 곳에서 시작된 웅성거림이 파문이 퍼지듯 전염되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현재 그는 연이은 밤샘에 따라 매우 지친 상태이다.
아름다운 메이드 때문이 아니라 사탄교와의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준비하는 만큼 현재 완성된 것은 고작해야 한 개가 전부다.
“잠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애쉬가 재빠르게 웅성거림의 중심지로 다가갔다. 그가 돌아온 것은 15분후였다.
“아무래도 토벌대장이 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움직인 모양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원래 길에 자이언트 오우거가 부락을 있다는 모양입니다. 토벌대원들의 수준은 대부분이 신참이니 피해가는 판단을 내린 거겠죠. 전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이언트 오우거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일반 오우거에 비해 2배 이상 큰 자이언트 오우거는 웬만한 병기와 마법에는 통하지도 않기에 A급 모험가들도 꺼려하는 대형 몬스터다. 토벌대원으론 바위에 계란치기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요.”
테드가 애쉬를 쳐다봤다. 테드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것은 없었다. 또 토벌대장의 선택은 현명했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이언트 오우거왜 여기에 있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따로 드래곤 마운틴에 대해 알아봤습니다만, 그 정도의 대형 몬스터를 벌써부터 조우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제가 알기론 자이언트 오우거는 산맥의 아주 깊은 곳에 터전을 잡기 때문에 토벌대가 마주칠 일이 없는 몬스터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면 확실히 이상하네요. …뭐, 안쪽에 먹이가 부족했나보죠.”
테드의 대충 생각하며 내린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애쉬가 항의의 눈빛을 보냈지만, 현재 테드는 제대로 생각할 틈이 없었다. 거의 4일 가까이 잠을 자지 않아 머리에는 희미한 두통까지 느껴졌다.
마법으로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오늘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드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듯 손가락으로 두 눈을 비볐다. 몸의 컨디션은 최악이고, 정신도 멀쩡하지 않았다. 그것을 완성하는데 너무 몰두했다며 뒤늦게 후회한다.
“테드님.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는 군요.”
“애쉬님의 말이 맞습니다. 주인님. 제가 안아들고 갈테니 조금이라도 주무시는 게 어떤지요?”
애쉬와 사이나의 걱정에 테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회귀전에는 열흘 넘게 자지 않고 전투에 임했던 적도 있었다. 고작 4일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고 이런 것을 보면 자신의 정신이 풀어질대로 풀어져 있다는 뜻이다.
‘나쁘지 않아. 그때와 다르다는 거니까.’
평화에 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에 찌들어 있는 것 보다는 낫다.
“괜찮아. 사탄교가 활동할 기미도 안 보이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굉음이 울리고 땅이 한 차례 흔들렸다. 상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호위들이 제각각 무기를 손에 쥐었다.
테드는 뒷목을 잡으며 굉음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그곳은 앞쪽, 토벌대가 있는 쪽에서 시작되었다. 토벌대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토벌대원과 상인들은 모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경악과 경외를 담은 눈으로 하늘위에 솟구친 그것에 집중한다.
수 천 명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는 것은 녹색의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대저택과 맞먹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드래곤은 황금색 용안을 빛내며 제몸의 2배는 될 법한 커다란 날개로 하늘에 떠있었다. 그린 드래곤의 머리에는 6개의 뿔이 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날카롭고도 단단한 발톱은 자이언트 오우거 따위는 단숨에 도륙 낼것이고,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한 입에서는 드래곤의 상징과도 같은 브레스를 뿜어낼 것이다.
이 세상에 현존하는 3마리의 에이션트 드래곤 중 하나이며 드래프리온을 지키는 수호룡.
녹룡 지르켈리안.
그가 상징하는 것은 번영.
[크루티이이이이이이익!!!]
지르켈리안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드래곤 마운틴이 격동하고 나무가 흔들린다. 심약한 자들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래곤의 포효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의 폭거가 그 포효안에 담겨있었다.
이곳에 있는 토벌대원들은 녹룡이 분노한 이유를 몰랐다. 그가 왜 흑룡의 이름을 외치는지 몰랐다. 그저 벌벌 떨면서 위대한 존재의 자비가 내려지기를 바랬다.
“이건 또 웬 봉변이야…!”
테드는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터진 위기상황에 마력이 자연스럽게 활성화되고 두통이 사라졌다.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네가 그러고도 드래곤이라 할 수 있느냐!!!]
지르켈리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는다. 드래곤 피어가 사방을 짓누른다. 단숨에 토벌대원의 전의를 앗아갔다. 그리고 마나를 느낄 줄 아는 자들은 눈치 챘다. 지르켈리안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엄청난 양의 마나를.
“이건… 나설 수밖에 없나.”
지르켈리안은 흑룡 크루틱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테드는 순간적으로 사탄교의 개입이 있는 것인지 의심했다.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낮았다. 지르켈리안과 크루틱이 자신들을 이용했다는 것을 눈치 챈다면 그들의 분노를 감당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었다.
[수호룡으로서의 맹세를! 최후의 에이션트 드래곤의 긍지를! 친우와의 약속을 깨트릴 셈이냐?!!]
폭풍의 기세가 담긴 질문에 테드는 몸을 멈칫했다.
처음에는 분노해 내뱉는 단순한 혼잣말인줄 알았다. 그러나 지르켈리안은 상대방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크루틱이… 여기에 있다고?!”
지르켈리안의 바로 위, 허공에 검은색 안개가 뭉실 거리며 나타난다. 그것은 연기가 퍼지듯 사방으로 펴져나간다.
두 눈을 가늘게 뜬 테드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저것은 안개가 아니다. 작은 쇠파리가 수 십 만이 모여서 안개로 보이는 것뿐이다.
“……다크 스웜(Dark Swarm).”
흑마법 계통 최고위에 위치한, 메테오에 버금가는 재앙급의 마법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다크 스웜은 흑룡 크루틱이 나오는 전설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상징과도 같은 마법이다. 크루틱은 이곳에 있다.
“…쿨럭!”
애쉬가 입을 막고 기침을 토했다.
갑자기 목이 따갑고 답답해지더니 기침이 올라왔다. 마나를 수련한 애쉬가 일반 감기에 걸릴 일은 없다. 애쉬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입에서 튀어나온 따뜻한 무언가가 손바닥에 묻었다.
“이건… 피? 갑자기 무슨….”
갑자기 기침을 하는 것은 애쉬만이 아니었다. 토벌대원과 상인들과 호위까지 모두 입을 가리고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테드의 얼굴이 다크 스웜을 봤을 때보다 더 굳어졌다.
“……플레이그(Plague). 크루틱 이 미친 새끼가….”
토벌대 전원이 감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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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