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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에이션트 드래곤.
“여긴 무슨 볼일이시죠. 그레온 그레모리.”
짙은 적의와 함께 지배의 권능을 발동한다. 그레온이 있는 공간을 지배한다.
단숨에 공간채로 짓눌러 버린다. 그레온이 마력을 뿜어내 권능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구겨진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진짜 용서 없네. 저기. 사이나. 우리가 만나는 건 이걸로 몇 번째지?”
그 마력량을 보자면 현재의 사이나보다 더 강하다. 이곳이 중간계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은 있다. 사이나와 같은 방법이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2번째인가요.”
“아니, 아니. 똑똑한 넌 기억하고 있잖아. 일곱 번째야 일곱 번째. 그 중 첫 번째가 70년 전이지 아마. 난 너와 만난 날을 전부 말할 수 있어. 로맨틱하지 않아?”
“소름끼치는군요. 그리고 기억 하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겠지요.”
그레온이 웃는 모습을 보며 정말 기분 나쁘다고 사이나는 생각했다.
사이나는 자신의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레온은 강하다. 성격을 둘째 치고 서열 32위의 악마다.
시스템의 제약을 받고서도 자신의 권능을 저항할 정도면 정면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이나는 판단을 내렸다.
그보다는 우선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테드의 손을 풀어내야 했지만.
“아, 잠깐. 미리 말해두는데 난 싸우려 이곳에 온 게 아니라고.”
그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사이나를 향해 오른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럼 뭐하러 오셨습니까? 당신이 사탄교라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적의가 없었다. 그에게서 사탄교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사탄교? 그래. 맞아. 그런 단체였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과 관계없어. 널 만나러 온건 순전히 내 독단이야.”
그레온은 마계에서부터 항상 충동적으로 행동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 말도 거짓말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사이나에게 제안하기 위해 온거야.”
“거절하겠습니다.”
“그 칼같은 단호함도 매력적이긴 한데. 지금은 일단 한 번 들어봐. 맹세코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보나마나 사탄교에 가담하라는 제안이겠죠. 하지만 저는 주인님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거라면 아스타로트가 포기했어. 사탄교의 상황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최악이야. 이 지경까지 왔는데 널 끌어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특히나 아스타로트는 성격 탓에 말은 안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이나와 테드를 죽이기 위한 온갖 방법을 생각 중이다. 시도하는 일마다 방해받았으니 이가 갈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3번째는 애시온 녀석을 시켜서 했고. 이번이 4번째네.”
그레온은 큼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신의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최대한 신사적으로 보이기 위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나랑 결혼해줄래?”
“죽어도 싫습니다.”
돌아온 것은 살기마저 섞여있는 냉대였다. 그레온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해가 안 가는데. 나 이래보여도 인기 좋다고? 부인이 7명이나 있을 정도야.”
“그런 저급한 것들과 같은 취급하지 마시죠.”
그레온은 서열 32위의 능력 있는 악마다. 부인들은 모두 그레온이 아니라, 그레온이 가지고 있는 힘과 지위를 사랑해 모여들었다.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는 이유로 자신의 몸을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안 되고 저 인간은 된다는 거야? 도대체 뭔 차이인지 모르겠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저 필멸자 보다는 내가 더 낫잖아. 저놈은 언젠간 죽어 기껏해야 100년을 넘을까 말까야. 네 나이를 생각하고 장기적으로 생각해 사이나.”
그레온의 경박한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험악해졌다.
악마나 천사의 수명은 일신에 지니고 있는 힘에 따라 다르다. 대악마의 경우엔 수명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며, 보통의 악마라 해도 천 몇 년은 살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저는 주인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
침묵이 깔렸다.
그레온은 두눈은 휘둥그레 뜨고서 사이나를 쳐다봤다.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해 권능을 사용해 과거까지 보았다.
그레온의 입가가 조금씩 실룩였다. 바람 빠진 소리같던 웃음소리는 이내 커지기 시작한다.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최고의 광대가 펼치는 쇼를 본 사람처럼. 이 이상 유쾌할 수 없을 정도로 웃었다. 한동안 정신줄 놓고 웃던 그레온은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한 손으로 닦아냈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꺽꺽 소리를 냈다.
“…하하, 악마가 사랑이라니. 천계에 있는 천사놈들도 웃지 않고는 못 배길 거야.”
사이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했다.
마계에는 사랑을 하는 악마도 당연히 존재한다. 악마도 감정을 느끼는 것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악마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멸시한다. 사랑은 처음엔 뜨거울지 모르나 시간이 갈수록 식고, 나중에 가면 쓰레기 이상의 가치는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시원하게 웃었어. 설마하니 네가 사랑이란 단어를 꺼낼 줄은 몰랐거든. 아 그래도 널 아내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아. 넌 내가 본 악마들 중에서 가장 예쁘거든.”
더 이상의 볼일은 없다는 듯 그레온이 몸을 돌렸다. 사이나가 그를 향해 권능을 발휘하기 전에 한 발 앞서 테드의 목소리가 울렸다.
“기다려. 내 결계는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거든.”
“……깨어있었습니까.”
테드는 자신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는 사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자신의 결계에 당당하게 들어온 것이다.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레온이 떠나는 발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았다.
“그냥 조용히 넘어가지 그래? 널 아직까지 살려두고 있는 건, 네가 죽으면 사이나가 마계로 역소환 되기 때문이야. 아까처럼 자는 척이라도 해.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고. 응?”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온 걸 놓칠 바보는 아니라서.”
지면과 하늘에서 뻗어나온 검은 쇠사슬이 몇 개가 차르륵 굴러가며 그레온에게 쇄도한다.
그레온이 손을 들며 디스펠을 발동한다. 테드의 다크체인이 맥없이 사라졌다.
테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디스펠로 다크체인을 없앴다는 것은 다크체인에 대한 마법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기에.
“……어떻게 내 다크체인에 관해 알고 있지?”
“네 다크 체인은 아니지. 네가 만든 마법이 아니잖아?”
그레온이 밟고 있는 지면에서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그레온은 마법의 기척을 감지했지만, 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불기둥은 악마의 육체는 물론이고 그가 입고 있는 옷자락마저 태우지 못했다.
그레온이 테드를 지긋하게 쳐다봤다.
돌연 찌릿한 정전기 같은 것이 안구를 통해 느껴졌다. 테드의 홍채가 붉은색으로 변한다. 외부로부터 가해진 자극에 자연스럽게 고결한 눈이 발동한 것이다.
“…호오. 내 권능에 저항했다고? 과연 사이나의 계약자답게 평범한 놈은 아니란 건가.”
“……권능을 사용했다고?”
사이나는 몇 번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가 테드가 풀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얌전히 안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과거시의 권능입니다. 상대방을 보는 것으로 대상의 과거를 볼 수 있습니다.”
“내 과거를 보려다 실패 한 건가.”
테드의 등 뒤로 식은땀이 맺혔다. 만약 권능이 통했다면 그는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회귀전의 과거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상당히 위험하다. 고결한 눈이 언제까지나 방어해준다고 확신할 수 없으니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
“……됐어. 이제 꺼져.”
테드는 더욱 사이나를 더욱 끌어안았다. 그리고서 그녀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이가 없네. 방금 전까지 살기등등한 모습은 어디 가셨나?
“인형놀이는 취미가 아니라서. 그리고 사이나랑 진득하게 놀아야하니 좀 꺼지시지?”
테드의 고결한 눈이 그레온을 포착한 순간 그가 본신이 아니라 인형임을 알아냈다. 인형은 주술적인 처리가 되어 있어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일단 인형의 역추적은 시도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실력도 만만찮아서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
“좀 많이 짜증나는군. 일단 내 사이나에게 떨어지지 그래?”
“내 사이나라는 말이 거슬리는데. 사이나의 과거를 보면 알잖아. 이미 쌀은 밥알이 됐고, 게임은 끝났어. 인마!”
“그래봤자 네놈은 필멸자에 불과해. 스스로가 사이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 진심으로 안타까워. 사이나가 내품에 안기는 날이 기대되는걸.”
“오케이. 너 어디 사냐. 당장 주소 불러. 현피 뜨자. 네 똥같은 머리에 궁니르를 거하게 꽂아주지.”
“지금을 즐기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사이나의 곁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레온에게서 마력이 휘몰아쳤다. 그의 신체가 점점 붉은색을 띄더니 이내 선홍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테드가 앱솔루트 배리어를 펼쳤다.
그레온의 몸이 거대한 소리와 함께 폭발한다. 폭발의 저택은 집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였다. 다행히 폭발은 결계를 박살낼 정도의 위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결계 덕분에 천막에서 잠을 청하던 사람들이나, 경계를 서던 자들이 모여드는 일은 없었다.
“짜증나는 놈이야. 그리고… 위험한 놈이기도 하고.”
그레온이 디스펠로 다크체인을 없앴을 때는 경악했다. 아무리 프로텍트가 걸리지 않은 마법이라 해도 다크체인 자체만으로도 난이도가 높다. 정확한 마법진을 연구하지 않는 한 디스펠로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레온은 서열 32위의 악마입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는 저보다 강합니다. 인형이 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본체는….”
“중간계에서 온전히 제 힘을 발휘한다고 봐도 되겠지. 사이나처럼 계약악마인가. 어쩌면 사탄교에 그런 악마가 많을 수도 있겠어.”
그레온처럼 서열을 가진 악마가 아니더라도 시스템의 제약 없이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 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테드와 사이나 둘이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철저한 준비라고 하신다면?”
“마법사의 준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경우엔 마도구라 할 수 있겠네. 오딘의 마법상점의 힘을 보여줘야지.”
운 좋게도 그동안 모아놓은 재료가 아공간에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또한 근처에 있는 자들도 전부 상인이었다. 부족한 것은 구할 수 있었다.
“그럼 슬슬 자러 가볼까.”
사이나를 안은 상태에서 그대로 일어났다. 그녀의 허벅지와 등을 잡아 옆으로 비스듬히 안아든다.
“저… 주인님.”
“응?”
“저는 절대로 그레온 따위에 가지 않습니다.”
테드는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런 것 정도야 알고 있어. 나도 사이나를 가게 두지 않아.”
결계를 해제하고 자신들의 임시 보금자리인 천막으로 향한다.
“뭐, 그래도. 오늘은 곱게 재우지 않을 거지만.”
“…언제는 편하게 재우셨는지요.”
사이나가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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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