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87화 (187/277)

187====================

25. 에이션트 드래곤.

생각했던 것보다 데이록의 입김이 강했던 것인지 이틀째부터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귀족인 테드와 인연을 쌓기 위한다는 목적을 숨기고서 다가왔다. 실제로 마도구를 원하는 상인들은 별로 없었다.

야영이 익숙하지 않은 상인들은 드래곤 마운틴의 밤이 춥다는 소리를 가십거리 삼아 해댓다. 우연히 들은 테드가 그들에게 일회용 난로(Disposable Stove)마법을 권했다. 테드가 직접 만든 저급의 마법으로 12시간 동안 자신의 몸을 난로로 만들어 자신을 따뜻하게 해주는 매직 스크롤이다.

만드는 것에 몇 초밖에 걸리지 않기에 조금 싼값에 팔았다. 그러다 소문이 퍼져나가더니 상인들과 그들의 호위들이 자신에게 팔라고 아우성쳤다.

적은 시간과 수고로 스크롤을 만들 수 있었기에 수요에 맞춰 공급하는 것은 문제없었다.

3일째 되던 날에는 저녁 식사 후에 토벌대원들이 상인들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토벌대의 뒤를 따르는 상인들의 주 고객인 그들은 저녁 식사 후부터 잠이 들기까지 자유시간을 가지기 때문이다.

토벌대원들에게도 상인들의 소문이 미쳤는지 그들이 오딘의 마법상점을 찾아왔다. 원하는 것은 일회용 난로의 효과를 담은 마법 스크롤이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5일째 되던 날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디스포사블 스토브 매직 스크로 10장주시오!”

“난 100장을 원하오!”

“300장! 돈이라면 일시불로 지급하겠소!”

1장 2장 사가는 상인보다 수 십장 이상 사가는 상인들이 많아졌다. 수백 장을 사가서 뭘 하려는 지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사재기를 하든 비축을 하든 관심이 없었다.

“……장사 접자. 접는게 좋겠어. 우린 장사하기 위해 온게 아니잖아?”

테드의 입장에선 스크롤 장사는 푼돈이었다. 수 천 장을 팔기 위해선 수 천 장의 스크롤을 만들어야 했고, 들어가는 수고에 비해 돌아오는 이익은 적었다. 차라리 거대 몬스터를 사냥하는 쪽이 더욱 수익이 높았다.

“여기서 갑자기 장사를 접으면 상인과 토벌대원들에게 원성을 살 수 있습니다.”

사이나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현재 디스포사블 스토브는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갑자기 판매를 멈추면 원망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물량이 없다는데 지들이라고 뭐 어쩌겠어.”

“그들은 주인님이 스크롤을 만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위의 상인들에게서 재료를 구할 수 있으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겠죠. 여기서 멈추면 더욱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미리 수 백 장을 사뒀던 자들은 폭등한 가격에 스크롤을 팔겠지요.”

“……섣불리 스크롤을 제작한 내 잘못이지.”

스스로의 멍청함에 한탄한다. 주위에는 항상 다른 상인과 그들의 호위들이 있다. 모두 똑같은 목적으로 토벌대의 뒤를 따르기 때문에 군집은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눈을 완벽하게 피하려면 천막 안으로 들어가거나 고등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낮에는 토벌대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천막에 들어갈 수 없었고, 고등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근처에 모습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탄교가 신경 쓰였다. 결국 대놓고 스크롤을 제작했다.

물론 지켜보는 이들은 한 번에 하나만 제작하는 줄 안다. 실제로는 한 번에 수 십장을 제작하고 있다.

7일째의 되던 날은 평소와 달리 정오 무렵에 토벌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동안 쉬지않고 움직인 토벌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단순히 이 앞부터는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부턴 따로 편성된 정찰대가 먼저 움직이고 그 뒤를 토벌대가 움직인다.

오늘은 정찰대만이 움직여 근처에 몬스터가 모여 형성한 군락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할 것이다. 군락이 있다면 토벌하고 없다면 지나간다.

본래라면 토벌 대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토벌대의 대장인 크리크는 관대하게도 경계를 제대로 선다는 조건하에 자유를 허락했다.

그 때문에 상인과 토벌대원은 기쁨의 비명을, 테드는 절규의 비명을 질렀다. 모여 드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가게를 보는 사이나의 뒤에서 의식없는 기계처럼 마법 스크롤을 제작한다.

“아가씨 인간족 치곤 예쁜데? 이름이 어떻게 되지?”

귀족의 부인이기 때문에 추파를 던지는 인물은 거의 없었으나, 다른 종족을 깔보는 용인족 몇몇은 인간의 귀족이라는 작위도 개의치 않고 추파를 던졌다.

“죽고 싶으신 겁니까? 물건을 살게 아니라면 비켜주십시오.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옷. 까칠한데! 꼭 용인족 여성들을 보는 것 같아. 더더욱 마음에 들어. 어때, 등 뒤에 숨어 있는 남자 놈은 버리고 나랑 놀지 않겠어?”

“자살 지망입니까. 주문은 확실히 받았습니다. 이번엔 특별히 서비스로 해드리겠습니다.”

용인족 남자는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필사적으로 땅바닥을 굴렀다. 주위에 있던 동료가 빠르게 물을 붓지 않았다면 거대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 이후로 사이나에게 대놓고 추파를 던지는 이들은 사라졌다.

“자네들이 오딘의 마법상점의 주인들인가?”

하늘이 파랗게 물들어 저물기 시작했을 무렵에 찾아와 말은 건넨 것은 흑발흑안의 날카로운 분위기를 가진 미청년이었다. 입고 있는 갑옷은 은빛으로 반짝거렸으며 마법이 걸려 있었고, 허리춤에 달아놓은 검집은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그의 어깨에는 붉은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용의 문장은 드래프리온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용왕의 문장이다. 그 문장을 사용한다는 의미는 명백했다.

그가 올해 드래곤 마운틴 토벌대의 대장인 크리크였다.

“네. 그렇습니다. 무슨 볼일인신지요.”

뒤에서 스크롤을 제작하고 있는 테드를 대신해 사이나가 대답했다. 물론 그녀도 그의 크리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이나는 눈앞에 국왕이 있어도 주눅 들지 않는 여인이었다. 예의는 갖추었으나, 제 주인 말고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으음.”

크리크는 사이나를 머리위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차례 훑어봤다. 추잡한 욕망이 담긴 눈이 아니라 먹이를 판별하는 맹수의 눈이었다. 무저갱같은 검은 눈은 이윽고 테드에게도 향했다.

“요즘 대원들 사이에서 오딘의 마법 상점이라는 이름이 번번이 오르더군. 그래서 한 번 찾아와봤다.”

“영광입니다.”

둘의 목소리는 무덤덤해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발 뒤에 있는 테드는 흡사 인형들이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디스포사블 스토브라는 매직 스크롤을 판다고 들었다. 내가 처음 들어보는 마법이더군. 자네들이 직접 만든 마법인가?”

“서방님께서 만든 마법입니다.”

사이나는 남들이 근처에 있을 때에는 주인님이 아니라 서방님이라 불렀다. 대외적으로 테드와 사이나는 부부 사이기 때문이다.

테드에겐 서방님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 아주 뛰어난 마법사만이 가능하다고 들었지. 자네는 굉장한 마법사로군.”

“과찬이십니다. 이미 존재하는 하급의 마법을 약간 변형시켰을 뿐입니다.”

테드는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크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보통의 마법사는 자네가 말하는 것처럼 변형시키는 것도 못하니 겸손은 필요 없다. 떳떳하게 말해도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크리크는 칭찬을 하고서 떠나갔다. 정말로 그저 호기심에 찾아 온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목적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쉬 씨. 저자의 정체가 뭐죠?”

토벌기간 내내 테드와 떨어져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던 애쉬를 향해 테드가 물었다.

크리크라는 자에게는 보통의 인물은 가질 수 없는 위엄이란 것이 있었다. 그것도 억지로 만들어낸 위엄이 아니라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크리크 레콘. 아주 옅게나마 왕족의 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정확한 출신은 아직 밝히지 못했어요. 용왕이 의도적으로 숨기려 하고 있어 쉽지가 않아요.”

실은 용왕의 사생아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목에서 삼켰다. 그건 애쉬 개인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육감에 의거한 의심에 불과했다. 확실한 정보가 아닌 것을 괜히 입밖으로 내어 화근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보통 인물은 아니에요.”

“사탄교와 연관이 있을까요?”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죠.”

“한 번 조사해보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애쉬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며 크리크에 대해 생각했다. 놀라운 점은 그가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법은 입문이 쉽지 않다. 너무 방대하기도 하면서 시간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크리크는 딱 보기에도 마법사 보단 전사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나이로 보자면 20대 초중반이고 마법검사라 하기엔 디스포사블 스토브가 자작마법임을 단숨에 꿰뚫어 볼 정도의 실력이 말이 되지 않는다.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의 천재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크리크라는 이름은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었어.’

과도한 경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다시 몇 만개 째인지 모를 스크롤 제작에 들어갔다.

⁂ ⁂ ⁂

저녁 식사 후 다시 불어 닥친 고객들을 모두 상대하고 천막에 들어서 잠자리에 들 시간에 사이나는 앉은 상태에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큰 나무 아래에 기대어 앉은 테드가 자신의 무릎 위에 그녀를 앉히고 양팔로 단단히 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나가 마음먹고 힘을 주면 간단히 자신의 몸을 속박하는 팔을 풀어버릴 수 있었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 테드가 바라는 대로 힘을 풀어 등을 그의 품에 기대었다.

“주인님 바람이 차갑습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니. 이대로 있어도 따뜻한데.”

거짓말 하지 않고 둘 다 추위를 타지 않았다. 테드는 위광이라는 쩔어주는 아이템으로, 사이나는 악마의 사기적인 육체로 추위를 극복하고 있었다.

테드가 머리를 떨구어 사이나의 어깨에 기댔다. 뺨을 타고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의 감촉이 느껴졌다. 갈색으로 염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발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향기가 신체에 들어온다.

언제 맡아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기였다.

스크롤을 반복적으로 제작하며 알게 모르게 누적된 정신적인 피로와 마음을 편안케 해주는 향기, 끌어안은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테드의 눈꺼풀을 점점 무겁게 만들었다.

테드는 더욱더 그녀를 끌어안았다. 옷 너머로도 그녀의 부드러움이 여실히 느껴졌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안고만 있을게.”

“말씀과 달리 허벅지와 가슴을 쓰다듬고 있습니다만….”

“……이런 나도 모르게 무심코. 결계를 쳤으니 괜찮지 않을까.”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테드는 사이나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예전에 밤하늘을 보고 있는 사이나에게 밤하늘이 좋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검은 하늘에서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마계에선 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사탄교와 주권결정전만 잘 끝내면…… 진정한 의미로 여행을 할 거야.”

“정말 기대하고 계시는군요.”

테드는 눈을 감고 사이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애쉬는 내버려두고 둘이서 여행하자. 유명한 도시를 찾아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별이 예쁜 곳을 찾는 거야. 그리고 신비한 생물도 보고… 그리고 희귀한 보물도 얻고… 그리고 같이….”

천천히 이어지던 테드의 말이 끊겼다. 그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사이나는 눈을 감았다. 그가 말했던 것을 상상해본다.

심장이 약간 빠르게 뒤었다.

“……그렇군요. 정말 분에 넘치도록 즐거울 것 같습니다.”

사이나는 잠시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궁리를 세웠다. 몸을 꽉 안고 있는 팔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풀려고 했다간 테드가 잠에서 깰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다른 수단은 권능을 이용해 그와 자신을 함께 천막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이 자세 그대로 허공에 둥둥 떠가는 것이니 이건 다른 사람들 눈에 너무 뛴다.

남은 것은 천막 안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것이다. 텔레포트라면 테드에 비해 준비하는 것에 조금 많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사이나도 사용할 수 있었다.

사이나가 작정을 하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준비하려는 찰나였다. 테드가 만든 작은 결계안에 누군가가 침입해왔다.

“우와. 사이나. 이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네. 안 본 사이에 염색도 했네? 난 은발 쪽이 더 좋은데 말이야.”

검은색 가죽 갑옷을 입은 탁한 금색 단발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경박한 표정을 지으며 인간의 품에 안겨 있는 사이나를 가늘게 뜬 붉은색 눈동자로 살폈다.

그리고 무언가를 보았는지 폭소를 터트렸다.

“인간의 품에 안기다니… 정말 타락했구나. 사이나. 악마의 귀감이야. 네 아비가 보면 피눈물을 흘렸겠어.”

“여긴 무슨 볼일이시죠. 그레온 그레모리.”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