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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86화 (18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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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에이션트 드래곤.

“자네 부인이 아주 똑 부러지는군 그래.”

데이록은 아주 약간 테드를 측은하게 쳐다봤다. 빈틈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여성에게 붙잡혀 있는 남자의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 자랑스러운 아내죠.”

“…….”

마주보고 있는 데이록은 사이나의 어깨가 흠칫한 걸 놓치지 않았다. 풍겨지는 분위기를 보면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녀의 성격이 마냥 차갑지만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좋은 거래였네. 혹시나 해서 묻는 거네만, 이런 물건이 또 있나?”

“비슷한 물건이라면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건 지금 팔 생각이 없습니다.”

“그거 참 아쉽군.”

사이나의 말에 데이록은 정말 아쉬운지 테드를 향해 간절히 쳐다봤다. 그러나 테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이나가 팔지 않는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데이록이 상자를 가지고 가는 것을 바라보며 테드가 사이나를 향해 물었다.

“이왕 기회가 온 거 팔면 안 돼? 보존의 상자라면 몇 개 더 있잖아.”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의 심층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테드는 이참에 아공간을 정리해 돈이나 벌 속셈을 가지고 말했다.

“안 됩니다. 그건 주인님이 고생을 하며 얻은 전리품입니다. 헐값에 팔순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방금 전의 거래도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처분만 한다면 1,500 골드 가까이는 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이나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평소에는 반론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그녀였지만, 유독 생활과 관련된 일에는 고집이 있었다. 요리의 재료라거나 옷의 상태, 지금과 같은 금전이 오가는 상황이 바로 그랬다.

“그, 그래….”

가정생활에 있어서 전문분야가 아닌 테드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주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한 번 사이나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 적도 있었다. 다만 돌아온 것은 잔소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논리적인 말들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말에는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이 전제하고 있었다. 테드로선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번은 테드가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가에게 전시되어 있는 조각품을 발견했다. 평소였다면 시선도 두지 않았을 조각품이었지만, 그의 시선에 들어온 조각품은 지구에서 흔히 말하는 프라모델이었다. 그것도 어렸을 적에 굉장히 좋아했던 거대 로봇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프라모델이다.

테드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가게의 문을 열고 조각품을 구입했다. 단순한 취미 활동이라고 할 수 있기에 사이나의 잔소리를 들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각품의 가격이 문제였다.

1,200골드를 에누리없이 지불한 것이다. 단순한 나무로 만든 조각품을 말이다.

테드는 상인에게서 들은 말을 곧이곧대로 사용했다. 비록 그 재료가 흔히 볼 수 있는 단풍나무지만, 이것은 이름 높은 조각가가 만든 물건이라고 어필했다.

그런데 사이나는 그 이름높은 조각가를 조사해서 찾아냈다. 그는 조각가가 아니라 B급의 모험가였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프라모델을 자신이 취미로 만든 것임을 말했다. 덤으로 몇 년 전에 행상인에게 30실버에 판 물건이다.

테드는 30실버짜리 물건을 무려 1,200골드에 산 것이다. 바가지라는 말보다 사기 당했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망연자실해 있는 테드를 향해 사이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한심하다는 눈빛과 함께 정말 걱정된다는 눈길로 쳐다봤다.

사이나의 그런 눈빛을 처음 보는 테드는 잊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주인님이 돈을 쉽게 버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렇다고해서 쉽게 사용해버리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벌어들이는 돈이 더욱 많으니 괜찮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미래는…….”

잔소리가 시작하려는 조짐이 보였다. 테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머리를 비웠다. 괜찮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스킬이라면 지구에 있을 적에 마스터했다.

“이전에도 주인님은 업적 점수를 사용해 쓸데없는 것들을….”

“아니 잠깐!”

테드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로선 흘러들을 수 없는 말이 나왔다. 테드는 업적 점수를 소모해 구입한 모든 것들에게 조금의 후회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나. 그건 절대로 쓸데없는 것들이 아니야. 삶을 풍족하게 해주는 멋진 것들이라고!”

“……네. 그렇다고 하죠.”

아주 약간의 침묵 끝에 사이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겨우 마법 효과를 가지고 있는 옷을 귀중한 업적 점수를 사용해 구입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인님이 저에게 말씀만 하셨어도 직접 만들었을 것입니다.”

퀄리티가 다르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사이나는 전반적으로 모든 일에 능했다. 재봉은 물론이고 대장장이 기술까지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괜히 테드가 그녀를 두고 만능 메이드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저기 사이나. 요전번에 업적 점수가 부족해서 구입하지 못 한 게 있는데…….”

대마수를 토벌하고 얻은 업적 점수가 있어 지금 가면 구입할 수 있지만, 거리가 가리다 보니 불가능했다.

“그 고양이 의상말이군요. 어떤 디자인인지 가르쳐 주신다면 제작하겠습니다.”

이미 테드의 부탁을 예상한 사이나가 선선히 말했다. 테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이었다. 이참에 평소에 생각해둔 것들을 부탁할 때였다.

“저… 여기가 오딘의 마법 상점이 맞나요?”

테드와 사이나의 사이를 끼어든 것은 남자치곤 상당히 높은 목소리였다. 가죽 옷을 입은 그는 상당히 작은 체구의 인간 남성이였다. 연갈색의 머리카락은 단발에 안 그래도 작은 체구인데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 어딘가 겁먹은 작은 동물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의 등에는 커다란 갈색 배낭이 들려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무슨 볼일이신지요?”

방해를 받아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테드를 대신해 사이나가 서둘러 말했다.

“신크룬님에게 좋은 마도구 상인이 있다고 들어서…. 혹시… 무게 경감 배낭도 파나요?”

데이록이 떠나 간지 15분도 지나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입이 얼마나 수다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문득 테드는 토벌기간 중에 손님들이 몰려오지 않을까하는 불길한 상상을 해버렸다.  그건 결코 테드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무게 경감 배낭도 팔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게에선 최고급만을 고집하기에 상당히 가격이 나가는 편입니다.”

“최, 최고급품이라면…?”

“1/100 무게 경감 배낭입니다.”

무게 경감 배낭은 얼마나 무게를 경감시켜 주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가장 하급품이라 취급받는 1/10은 가격도 싸고 물량도 많아서 어떤 마도구 상점을 가든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1/100의 경우는 도시에서 제일 큰 마도구 상점이 아니면 팔지 않았으며, 상인들의 인기 품목이다 보니 빠른 시간에 팔려나갔다.

작은 체구의 남자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눈에는 겉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탐욕이 머무른다.

“저… 골드가 부족해서 그런데 혹시 현물로도 거래가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어떤 물건을 가지고 계신지요?”

남자가 어깨에 메고 있는 배낭끈을 놓았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여지없이 발휘되었고 배낭은 빠른 속도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쿵하는 무거운 소리가 주위에 울렸다. 그는 보기보다 힘이 장사였다.

“저는 행상인인 빌이라 해요. 주로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가지고 오지에 있는 마을 등에서 팔고 있죠. 이번엔 행상인 동료와 함께 토벌대의 뒤를 따르기로 했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무게 경감 배낭이 갑자기 고장이 난 것 같아서요.”

빌은 말을 하면서도 배낭 속을 뒤적거렸다. 밥그릇, 싸구려 목걸이, 비누, 향신료 등의 온갖 것들이 나온다.

“배낭이 고장 난 것이라면 수리 해드리겠습니다.”

“수, 수리할 수 있나요?”

“네. 할 수 있습니다. 저희 가게의 배낭을 구입하시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현물이 부족해 보이는 군요.”

“그, 그럼 수리로 부탁할게요! 얼만가요?!”

“일단 한 번 배낭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이나가 배낭 쪽으로 움직이자 빌이 뒤로 물러났다. 비록 테드에 비하자면 초라할지 몰라도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그녀의 마법 실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무게 경감 마법이라면 순식간에 고칠 수 있었다.

그녀가 배낭을 살피기 위해 허리를 약간 숙이자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이 드러나며 로브에 감싸여 있던 하얀 얼굴의 아랫부분이 드러났다. 기껏해야 코와 입과 턱 부분이 드러난 것뿐이지만 빌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드러난 일부분이 굉장히 아름답다면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얼굴이 상상된다.

테드는 멍하니 있는 빌의 어깨를 감쌌다. 화들짝 놀란 빌이 두 눈을 크게 뜨고서 테드를 바라봤다.

“남의 부인 그렇게 쳐다보는 거 아니다. 이 자식아! 닳으면 책일 질거야? 엉?”

“히익! 죄, 죄송합니다!”

약간의 마력을 내보이며 위협적으로 말하자 빌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의 모습에 테드는 피식 웃었다. 단순한 위협에 이정도로 반응할 정도로 심약하다면 어떻게 행상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빠르게 수리가 가능하겠군요. 이 정도라면… 8골드면 충분합니다.”

빌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배낭은 무려 1/70 무게 경감 배낭으로 3년간 빠짐없이 사용해온 보물이었다. 그에겐 8골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아예 새로 구입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감사합니다! 8골드는 드릴테니 수리해주세요!”

사이나가 배낭의 안쪽을 손가락으로 몇 번 건드리는 것으로 수리를 끝내고 배낭을 그에게 내밀었다. 빌은 엄청나게 가벼워진 배낭의 무게를 느끼며 주머니에서 8골드를 꺼내 지불했다. 빌은 연신 감사인사를 하면서 떠나갔다.

“겨우 8골드 가지고 뭘 호들갑스럽게….”

테드의 중얼거림을 들은 사이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겨우 8골드가 아닙니다. 주인님에겐 푼돈일지도 몰라도 저들에겐 상당한 거금입니다.”

실수했다. 그렇게 후회한 테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그렇지! 그들에겐 큰돈이겠지! 내가 잘 못 했네! 하하하!”

⁂ ⁂ ⁂

토벌대의 참가원들은 토벌 기간 내에 모든 식량과 장비를 국가에서 지원을 받는다. 허나 거짓말로도 썩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식량은 좋은 것들이나 요리사의 실력이 바닥을 기어서 농담으로도 맛있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이며 무장은 모두 낡아빠진 것들로 간신히 제 용도를 다하는 것들뿐이다.

그렇기에 장비에 한해서 토벌대원들은 자신들의 사비로 마련한 것들을 사용한다. 무기와 방어구를 우선적으로 구하고 나머지는 의복류로 챙긴다. 그러나 무기와 방어구에 아끼지 않고 돈을 쓰다보면 옷을 살 돈이 부족해지고 전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의복류는 국가에서 보급해주는 것을 입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산맥의 밤은 춥다. 특히나 드래곤 마운틴은 밤이 되면 기온이 확 떨어진다. 구멍이 난 천막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보급품인 의복은 얇아서 따뜻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은 가을이었다.

토벌이 시작된 지 겨우 3일이 지났지만 토벌대원들은 아직까지도 추위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한 명의 대원의 사정은 달랐다. 다른 대원들이 석식을 해결하고 추위에 벌벌 떨며 온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 그는 바닥에 대자로 발라당 누웠다.

“어우 뜨뜻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근처의 대원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자신들과 똑같은 보급품이란 것을 알았다. 심지어 담요도 걸치지 않고 누워있는데 그의 얼굴은 정말로 따뜻한 것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이 기묘해 말을 걸었다.

“추워 뒤지겠는데 뭐가 따뜻하다는 거요?”

그가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내 손을 잡아 보소. 그럼 다 알게 될 테니.”

대원은 그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투박하고 거친 손을 통해 느껴지는 것은 집에서나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었다.

“어허! 기분 나쁘니 남의 손을 너무 쪼물딱 거리지 마쇼.”

“이, 이게 무슨 일이요?!”

“잠깐 마법을 사용했지.”

“대, 댁이 마법사였소?!”

“디, 디쓰포… 씨블? 싸블? 뭐시기 스토브라는 마법이요. 아까 오딘의 마법 상점에서 구입한 스크롤이요. 사용하면 12시간 동안 몸을 따뜻하게 해주오.”

“스크롤은 비싸지 않소?”

“비싸지. 오늘 수익의 삼분지일이 날아갔으니. 그래도 추워 뒤지는 것보단 낫소.”

토벌대원들은 자신이 사냥한 몬스터를 그대로 상인들에게 팔아 수익을 얻는다. 그가 오늘 사냥한 것은 고블린 2마리가 전부였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수익을 나눴으니 돈은 별로되지 않는 것이다.

“이게 그 마법 스크롤이요.”

그는 내친김에 자신의 주머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그건 손바닥 보다 작은 사각형의 양피지였다.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 반쯤 찢어진 스크롤에는 비교적 단순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거만 있으면 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는 거요?

“바로 맞췄수. 산맥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필수라 할 수 있소.”

동료들에게 자랑을 하기위해 떠벌렸지만 그는 곧 후회하게 된다. 잠자리에 들자 온기를 찾는 동료들이 그를 향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팔과 다리 심지어 머리까지 껴안는다. 대원들이 여자였다면 그도 기꺼이 즐겼을 것이다. 허나 동료들은 다리털이 가득하고 땀내가 진동하는 남자 놈들이었다.

“아! 씨발! 좀 비켜보소! …씨발! 거기 만지는 새끼 누구야!”

그는 몸은 따뜻했지만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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