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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닷길.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테드가 날카로운 눈으로 당황하고 있는 루인과 시리엘을 노려봤다.
일단 옆에 있는 사이나와 애쉬를 데리고 그들과 자리를 벌렸다. 주위에 있던 승객들도 그를 따라 뒤로 물러났다.
루인과 시리엘을 중심으로 한 원형진이 자연스레 완성됐다. 도망치고 싶어도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꽂혀 있어 불가능하다.
“설마 나를 암살하기 위해서 인가…!”
테드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머리는 지극히 냉정했다. 지금 현재 자신의 신분은 카인드 트링거다. 알려지지 않은 몰락 귀족의 신분으로 원한 관계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카인드 트링거가 암살 당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또 다른 가능성. 루인이 테드 크루시안을 노렸을 때의 일이다. 테드는 천족과 마찰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집히는 것이라면 사탄교의 천사인 메타엘을 죽인 것뿐인데 그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오, 오해 입니다!”
“그, 그래요. 이 자에게 무언가 지병이 있던 게 아닌가요? 천주를 마시는 순간 지병이 발병한게 틀림없어요!”
루인과 시리엘이 주위 사람들을 향해 자신들의 무죄를 어필했다. 그래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점점더 날카롭게 변할 뿐이었다.
“지병? 천주를 마시면 피를 토하며 죽는 지병도 있나?”
테드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 끝에 선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게 보였다. 모두 손에 칼과 창같은 흉기를 들고 있다. 밧줄을 들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술에 독이 든게 아닙니다! 제가 증명해보이겠습니다!”
루인이 손에 든 검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천주는 절반 정도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입안에 털어 넣듯이 부어넣고 꿀꺽꿀꺽 마셨다. 평소에는 줄어드는 술이 아까워서 천천히 감미하며 마셨던 술이었다. 루인은 상황 탓인지 술을 마시는 건지 음료수를 마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보, 보십시오! 제가 멀쩡하지 않습니까!”
입가에 흘러내리는 천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양팔을 활짝 펼쳐 자신의 멀쩡함을 증명했다. 천주에는 독이 들어 있지 않다고.
“…잔에다가 독을 발랐을 수도 있지.”
유명한 암살 방법이다. 음식이 아니라 자주 사용하는 식기에 독을 발라 상대를 암살하는 것.
“그 잔은 제가 준비한게 아니라 이곳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트링거 님도 잔에 입을 대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테드는 잔에 입을 대었다. 아무렇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잔에 독이 발라져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그럼 자네 말대로 천주와 잔에는 독이 없다면, 도대체 이 자는 왜 피를 토하면서 죽었나?”
테드의 목소리에 담긴 적의가 약간이지만 사라졌다. 물론 루인과 시리엘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냉정히 생각했을 때 마시면 바로 죽는 극독을 가진 암살자가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며 활동하겠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암살자가 직접 마시는 순간 발동되는 극독이 든 음식을 가져다준다? 그건 암살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저 놈이 죽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가지고 있는 지병 탓이 아니라면… 뭐가 뭔지….”
루인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는 라이오스가 독에 의해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독은 마족과 악마에게만 발현되기에 이렇게 잡아 떼면 무죄를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은 ‘천사의 성혈’의 존재를 모른다. 알 리가 없었다.
“잠깐만요. 혹시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면 발동하는 독 같은 게 아닐까요? 예를 들면 이전에 먹었던 음식과 독이 위장에서 만나 반응 한다던가…. 그런 특이한 독 말입니다.”
조용히 있던 애쉬가 안경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방대한 정보가 있었다. 그 중에서 마시면 피를 토하는 독을 검색하고, 조건에 들어맞는 독을 검색한다. 부합되는 독이 몇 개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마시는 순간 즉발로 효과를 발휘하는 독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신이 미리 해독약을 먹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죠.”
애쉬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루인은 포식거미를 떠올렸다. 사람보다 커다란 몸을 가진 포식거미는 매끄러운 실을 내뿜어 사람의 몸을 옭아매어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고 강인한 턱으로 뼈까지 씹어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그런!”
“물론 당신의 말대로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라이오스에 대해서 적어도 당신보다는 알고 있습니다. 풀네임은 라이오스 스오라. 올해로 37세이며,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오우거와 마주쳐 타계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소개했듯이 와인 상인입니다. 술을 굉장히 좋아하고, 가지고 있는 지병은 없습니다.”
“혹시… 그가 친우분이셨습니까?”
“아, 그건 아닙니다. 오늘 처음 만났지요. 다만 저도 상인이다 보니 정보에는 민감해서요.”
애쉬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방에 박혀 있는 동안 수정구를 이용해 부하들을 시켜 여객선에 탑승한 승객과 선원들의 신상정보를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신상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애쉬가 모르는 신상 정보는 눈앞에 있는 두 명의 천족 정도다.
그들의 주위로 무장을 갖춘 13명의 선원들이 모여들었다. 제각각 굳은 얼굴로 루인과 시리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쉬가 힐끗 그들을 바라봤다. 선원들은 모두 병사와 모험가 출신이다. 만만치 않았다. 애쉬는 당장 루인과 시리엘을 구속하려는 그들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귀족의 권위가 선원들을 막아 세웠다.
“당신의 무죄를 판단하는 건 우리가 아닙니다. 드래프리온에는 우리 펠리스 왕국의 대사관이 있습니다. 거기서 당신의 죄를 판단하고 처벌을 하게 되겠지요.”
“저는 천주에 독을 타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술을 마시고 한 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사건을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죄의 유무를 판단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루인은 숨을 삼켰다. 정의를 실행한 후, 구속되는 것 까지는 예상했다. 기꺼이 구속되어 사이나가 악마임을 밝히 예정이었다. 그리고 지금 구속된다 하더라도 자신의 뒤에는 프리티스 제국과 미카엘라 교단이 있으니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궁금한 것이라는 건?”
애쉬가 루인이 아니라 시리엘을 쳐다봤다. 시리엘이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녀의 신분입니다. 당신의 다섯 번째 날개보다 더 높은 직위라면 여섯 번째 날개와 일곱 번째 날개라는 것인데…… 그들 중에 시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분은 없습니다. 입고 있는 사제 복장을 보면 프리티스의 귀족 분은 아닐테고…. 정체가 뭡니까?”
“…시리엘 님은….”
루인이 입을 우물거리며 남모르게 시리엘의 표정을 살폈다. 내심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루인에게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그녀의 정체가 알려지면 세계 각지에 숨어 있는 악이 더욱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녀는 저의.”
은인이라고 대충 둘러 댈 생각이었다. 그렇게 설명하면 그도 대충 넘어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발 앞서 시리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미카엘라 교단의 세 번째 날개인 레아 메이필이에요.”
시리엘이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까의 당황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표정에는 여유가 흘렸고, 숨겨왔던 기품이 떠돌았다. 그녀의 행동은 사제가 아닌 귀족과 가까웠다.
“세 번째 날개……. 그런데 이름이….”
애쉬의 말은 대화 상대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굉장히 무례한 태도였으나 시리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루인을 바라봤다. 눈가가 살짝 휘어졌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어요. 그러나 이곳에서 악과 마주친 것은 둘도 없는 기회임은 변하지 않아요.”
“그 말씀은….”
“루인. 이곳에 있는 악의 처단하고 정의를 집행하세요.”
“예!”
루인이 크게 대답함과 동시에 시리엘의 몸에서 황금색의 빛이 뿜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 순간 루인이 근처에 검을 들고 있는 선원을 향해 민첩하게 다가가 팔목 관절을 비틀어 강제로 검을 빼앗았다.
교단에서 지급되는 검에 비하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검이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날개인 루인에 손에 들어오면 검의 품질은 더 이상 제약이라 할 수 없었다.
루인이 성력을 일으키자 은은한 백금빛이 검날에 머물렸다. 그리고 곧 바로 도약한다.
노리는 것은 테드의 옆에 있는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은발의 악마다.
그 증오스러운 목을 일격에 가르기 위해 스킬을 사용한다. 디바인 슬래시.
그러나, 캉! 하는 소리와 함께 루인의 검이 사이나가 들고 있는 백색의 검에 막혔다.
“이… 더러운 악마가!”
“과연. 노리는 것은 저였습니까.”
목과 가슴 등의 급소만을 노리고 들어오는 루인의 검을 태연자약하게 맞받아친 사이나가 말했다. 기세 좋게 달려든 것과 달리 그는 생각이상으로 약했다.
“큭! 시리엘 님!”
사이나의 힘이 담긴 일검에 뒤로 날아간 루인이 시리엘을 불렀다. 그러나 시리엘의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성스러운 인기척도 사라졌다.
“천사라면 주인님이 데리고 가셨습니다. 당신을 도와줄 일원은 이곳에 없지요.”
루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드가 전이마법을 이용해 데려간 시리엘은 어디에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갑작스런 칼부림에 비명을 지르는 여성들과 선원들을 방패 삼아 뒤로 물러나면서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남성들이다. 사이나의 말대로 어디에도 루인의 편은 없었다.
루인이 빠득, 이를 갈았다.
“시리엘 님은 어디로 데려간 것이냐!”
검에서 백금색의 빛이 화려하게 반짝인다. 그것은 이내 검신에 흡수되듯 깃들기 시작한다. 마족과 언데드에겐 상극이라 할 수 있는 기운이다. 디바인 블레이드(Divine Blade).
프리티스 제국의 성기사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검이 발현되었다. 그것은 악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보다 완벽하게 멸살하기 위한 힘이다.
사이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악마인 사이나에게도 성가신 힘이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천사도 아닌 천족이 사용하는 힘이다. 사이나가 막 중간계에 소환되었을 때에는 위험한 힘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물음에 대답해라, 악마!”
루인은 성력을 이용해 몸을 강화시켜갔다. 우선은 가장 밑에 있는 부위인 다리에서부터 시작해 위로 올라간다.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말은 뜻밖에도 칭찬이었다.
“당신은 대단하십니다. 겨우 한 번이라곤 해도 저의 심장을 철렁거리게 만들었습니다.”
테드가 먹으려던 술을 라이오스가 대신 먹고 피를 토하며 죽었을 때, 심장이 땅에 떨어지는 감각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경험했다. 만약 라이오스가 아니라 테드가 먹었다면? 그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대마수를 앞에 두고도 느끼지 못한 기분이었다.
사이나의 몸에서 농도 짙은 마력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육체에 걸린 환상마법이 깨지듯이 사라진다. 그녀의 본모습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두려움을 한 순간에 잊게 만든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곁에 있던 애쉬는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물러났다.
‘진심으로 화나셨군.’
애쉬의 눈이 반짝였다. 어쩌면 대마수 토벌전에서도 보지 못한 사이나의 전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능성은 낮다. 상대역인 루인의 수준 탓이다.
“당신은 참으로 운이 좋습니다.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지만… 주인님께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니 살려두라고 하셨습니다.”
사이나의 모습이 드러난 순간부터 루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도 모른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이라면 교단에서 배웠다. 마음을 강하게 먹고 천사님을 생각하면 된다. 천사님의 뜻을 펼치고, 이 세계에 정의를 세우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까지 루인을 용맹하게 만들었던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이가 딱딱 부딪힌다. 숨쉬기가 힘들다. 손에쥔 검이 부들부들 떨린다. 성력이 약해진다.
그 모든 현상이 말해주고 있었다. 루인은 두려움에 질렸음을.
“허나, 말을 하는데 필요한 것은 머리 하나면 충분하겠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여객선이 크게 흔들렸다. 내부에서 온 충격이 아니라 밖에서온 충격에 흔들린 것이다. 승객들이 비명을 질렀고 선원들이 빠르게 그들을 진정시켰다. 루인은 작은 계기를 놓치지 않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시리엘 님을 위하여…!”
루인이 성기사가 되며 배운 성법을 발동한다. 교단의 일원이라면 누구나가 익히고 있으나, 평생 한 번 쓸까 말까한 성법인 《자기희생(Sacrifice)》가 발동한다.
사이나가 빈 왼손을 들었다. 새하얀 섬섬옥수가 허공을 어루만지듯 흔들렸다.
단지 그 간단한 행동에 세크리파이스가 박살났다. 강제 캔슬의 여파로 피를 토한 루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손이 흔들린다. 오른쪽 다리가 뒤틀리더니 찢겨나갔다. 루인이 고통과 두려움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공간에 막힌 듯 스스로를 제외하곤 아무도 듣지 못했다.
다시금 흔들린다. 왼쪽 다리가 폭탄이 된 듯 터져나갔다.
손을 내렸다. 루인의 양팔이 무언가에 무거운 것에 끼인 듯 압박을 받는다. 피가 피부를 터뜨리고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압력은 더욱더 가해질 뿐이었다. 결국은 오징어포처럼 납작하게 변했다.
루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눈물이 쉴 틈 없이 나오고 코와 입에선 피가 흘러내렸으며, 상상이상의 고통에 그의 눈동자가 흰자위를 드러내며 위로 넘어갔다.
잘생긴 천족 성기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힘이 권능이란 것입니까?”
마법과 스킬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음을 깨닫고 애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기를 바라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사이나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공간을 가득채웠 던 농도짙은 마력은 이미 흔적을 감추었다.
“네. 제 권능인 지배를 이용한 것입니다. 고작 사지가 박살난것에 기절하다니… 실망스럽군요.”
“…보통 팔다리가 저렇게 잘리면 기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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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가 잘린 적 없어서 기절하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