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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닷길.
여객선 측에서 준비한 선상파티는 ‘부라리요 호’에만 있는 이벤트다. 가끔 다른 여객선에서도 파티를 하긴 하지만, ‘부라리요 호’는 한 번 항해를 시작하면 꼭 선상파티를 연다. 이 선상파티 덕분에 부라리요 호의 승객비는 가장 낡은 여객선의 2배를 넘어간다.
그럼에도 승객들은 부라리요 호를 더 선호한다. 애초에 바다여행을 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면 부라리요 호의 승객비는 문제없고, 바다위의 선상파티는 두고두고 꺼낼 수 있는 추억이 되기 때문이다.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 대부분이 평민이라고 해서 파티를 즐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파티는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평민이라도 친인척끼리 모여서 즐기는, 파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파티를 몇 번은 경험해봤다. 또 평민들의 경험상 선상파티와 가장 비슷한 것은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파티라고 해서 별거 없다. 음식과 음료를 원하는 대로 먹고 처음 보는 승객과 하하호호 대화를 나누면 그게 파티다. 적어도 이곳의 파티는 귀족들의 언어로 된 창과 칼이 날아다니지 않으니 굉장히 평화롭다고 할 수 있다.
이 선상파티 안에서 루인은 푸른색의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오늘 선상파티의 요리의 질을 단숨에 끌어올리게 만든 원인을 찾았다. 그러나 수많은 승객들이 나누는 대화에 시끄러운 바다위에서 찾는 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상파티가 시작한지 30분이 지났는데 그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파티는 3시간 정도 지속되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인은 원인 모를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속셈을 눈치 챘나? 그래서 나오지 않는 건가?’
루인이 양손으로 조심스레 들고 있는 검은색의 술병을 꽉 쥐었다. 투명한 천주(天酒)가 들어 있는 병이다. 이 병 안의 천주에는 시리엘에게 받은 성물인 ‘천사의 성혈’을 섞여있다. 준비는 이미 끝났다.
천사의 성혈은 마족과 악마를 제외하고선 평범한 성수와 같은 효과를 보이는 성물이다. 그러나 마족과 악마에 한해선 극독으로 통한다. 마족에겐 성물은 독사에 물린 것보다 더 치명적이고, 악마라도 중간계에선 시스템의 의해 약해진 이상 치명적인 극독이다.
문제가 있다면 천사의 성혈은 병을 개봉하고 2시간이 지나면 효력을 잃어버린다. 즉, 앞으로 남은 1시간 30분의 시간제한 안에 천주를 악마에게 먹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루인이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고 있는 주된 이유였다.
“걱정할 것 없어요. 루인. 귀족인 그가 나오겠다고 말했다면 반드시 나올거에요. 귀족들이란 그런 존재가 아닌가요?”
“…….”
시리엘의 말에도 루인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프리티스의 귀족이라면 당연하다고 맞장구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귀족이다. 루인은 과거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부터 타국의 귀족들이 얼마나 간사한자들인지 귀족보다는 도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배웠다.
시리엘에게 대답할 말을 고르는 와중이었다. 돌연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몇 단계 내려갔다. 루인과 시리엘이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쫓았다. 거기에는 지금 막 파티장으로 들어오는 귀족 남녀 3명이 보였다.
카인드 트링거와 부인인 멜리나 트링거다. 귀족다운 말끔한 옷을 입고 있지만 환상마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루인과 시리엘에겐 검은 재킷을 입은 테드와 메이드 복을 입은 사이나로 보였다. 반면에 옆에 있는 안경 낀 귀족 남성은 환상 마법이 걸려 있지 않았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가 바로 상인으로서 귀족의 작위를 얻은 제딘 남작이다.
“…왔군요.”
“…예.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루인이 굳은 음색으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드디어 악의 중추를 없앤다는 사실에 환희의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그러나 그 감정은 너무 이르다. 루인은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배움과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천주라는 명주를 저들에게 가서 나눠 마시면 된다. 그뿐인 이야기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루인이 시리엘과 함께 테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평민들의 파티라고 해서 그가 평민들에게 꺼림을 받는다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오히려 귀족이기 때문에 줄을 대려는 평민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에 있는 평민들 치고 흙밭에서 괭이질이나 하는 평민들이 없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들은 부라리요 호의 선원들처럼 귀족을 대하는 법을 얕게나마 알고 있었다.
“트링거 남작님. 저는 푸리만이라 합니다. 이번에는 다름이 아니라 이곳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니…….”
“트링거 남작님. 혹시 트리미르 백작님을 알고 계신가요? 저의 머나먼 친척 분으로…….”
“드래프리온에는 저의 상회 지부가 있습니다. 혹시 원하시는게 있으시다면 제게 꼭 연락을…….”
제각각 목적을 드러내며 말하던 평민들은 루인과 시리엘이 다가오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프리티스 제국의 종교인들과 엮이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이 공공연연하게 알려진 탓이다. 그러나 피하지 않는 인물도 있었다.
이틀 전 여객선에 탑승하기 전에 루인과 마찰을 일으켰던 마족 상인이 그랬다.
두터운 뱃살을 뽐내고 있는 그에겐 파티용 정장이 굉장히 어울리지 않았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돼지에 사람용 정장을 입혀 놓은 꼬락서니라고 루인이 생각했다.
“트링거 남작님. 저는 딥크스에센 와인 판매로 제법 이름 높은 무역상인인 라이오스라고 합니다. 오늘 남작님을 뵙게 되어서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는 루인과 시리엘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서도 시선조차 주지 않고 당당하게 테드에게 말했다.
“입고계신 옷도 굉장히 멋지십니다. 물론 옆의 부인께서도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어디서 구입한 옷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두 분의 모습을 보니 저도 꼭 구입하고 싶군요.”
청산유수처럼 흐르는 라이오스의 말에 루인이 혀를 찼다. 간악한 놈. 누가 더러운 마족 아니랄까봐.
그러다 귀족의 눈이 루인에게 향했다. 테드는 웃으며 루인을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병을 향해.
루인이 씨익 웃었다. 끼어들 때다.
“드디어 오셨군요. 트링거 님. 약속했던 대로 천주를 가져왔습니다.”
“오오. 그게 바로 천주인가 보군!”
테드가 감탄했다. 저 검은 병안에 출렁이는 물이 고대하던 술이다. 도대체 어떤 맛일까.
“천주…? 설마 그 천주를 말하는 건가…! 아니,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라이오스가 큰 소리로 말했다. 테드는 물론이고 주위에 있는 평민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라이오스는 루인과 시리엘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천주는 아주 귀한 술이다. 그런 귀한 술을 네가 가지고 있다고? 그건 틀림없이 진짜인가?”
라이오스는 하대를 함에 주저함이 없었다. 말에 서린 것은 혐오감이었다. 단순히 상대가 천족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박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에 루인은 코웃음쳤다. 주제에 장소를 파악할 줄 안다는 건가.
“그렇다. 나는 미카엘라 교단의 다섯 번째 날개다. 천주 한 병 정도는 내 기량으로 사용하는 게 가능하지. 병의 밑동을 봐라, 여기에 각인되어 있는 표식이 진품이라는 증거다.”
라이오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가 내미는 병을 쳐다봤다. 천주를 보는 건 그도 처음이다. 확실히 검은 병의 밑동에 복잡한 문양을 한 표식이 각인되어 있었다. 라이오스로서는 진품인지 어떻게 판별할 수가 없다.
“내 눈에도 진품인 것 같소. 그럼 얼른 그걸 시음해봐도 되겠소?”
테드가 루인을 향해 물었다. 루인이 입을 꾹 다문 마족 상인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보였다. 마족놈이 자신의 신분을 알고 기죽은 모습을 보니 속이 후련했다.
“물론입니다. 마침 선원들을 시켜 와인글라스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준비한 잔은 총 3잔이었다. 하나는 루인 자신의 것, 하나는 테드의 것, 다른 하나는 목적인 악마의 것이다. 세리엘은 술을 좋아하지 않아 준비하지 않았다.
“준비성이 좋군. 정말 천주를 마셔도 되는 가?”
“그것 또한 물론입니다. 천사님도 트링거 님이라면 기뻐하실 것입니다.”
와인과 달리 천주는 뚜껑을 돌리는 것으로 간단히 열 수 있었다. 병의 뚜껑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 그곳에 있던 모든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바다내음을 순식간에 없애 버릴 정도로 진하고 향긋한 천주의 향기가 퍼진 것이다.
“과연 천주. 술이 아니라 꽃같은 향기로군.”
“아직 놀라시긴 이릅니다.”
“……쯧.”
라이오스가 혀를 차는 소리를 무시하면서 루인이 와인잔에 조심히 천주를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와 와인잔을 채운다. 작은 기포가 와인잔 바닥에서 올라와 허공으로 사라졌다.
“자 트링거 남작님과 부인 분의 것입니다. 드셔보시지요.”
“으음. 고맙소. 그런데 옆에 계신 여인은 부인이요? 천주를 안 드시나 보오?”
시리엘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루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시리엘 님은 저 같은 것의 부인이 아닙니다!”
“……시리엘 님?”
테드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다섯 번째 날개보다 더 높다는 것은 여섯 번째 날개 이상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추기경과 성녀급이란 것이다. 그런 자가 임무를 위해 드래프리온을 간다고? 의심이 들었다.
“……미카엘라 교단의 여섯 번째 날개인 시리엘이라 해요. 임무 탓에 신분을 숨길 생각이었으니… 그 점은 부디 너그러이 봐주세요.”
“……이거 실례. 미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카인드 트링거 남작이라 합니다. 이쪽은 부인인 멜리나 트링거와 친우인 제딘 남작입니다.”
“멜리나 트링거입니다.”
“애쉬 제딘 남작입니다.”
둘을 고개 숙여 인사 했다. 사이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고, 애쉬는 시리엘이라는 이름을 뇌속으로 검색하고 있었다. 오익 이상이라면 육익과 칠익이라는 건데. 이상하게도 그의 머릿속에서 시리엘이란 이름을 듣고도 신상정보가 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시리엘이 산뜻한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렇게 예를 표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임무를 향하고 있는 몸이니 저를 신경 쓰지 마시고 파티를 즐겨주세요.”
시리엘이 루인을 살짝 흘겨봤다. 루인은 그녀의 눈빛을 받고 흠칫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소.”
테드는 루인이 건네주는 잔을 받았다. 루인은 자연스럽게 사이나에게도 잔을 건넸다. 천주를 섭취하는 순간 그녀는 성물에 의해 죽을 것이다. 암살범으로 몰리겠지만, 성물의 특성을 이용하고 테드의 정체를 까발리면 충분히 무마할 수 있었다. 테드는 지명 수배까지 내려진 죄인이니까.
테드가 잔을 들었다. 대충 주워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선은 코를 잔에 가까이 대 향기를 맡았다. 천천히 음미를 하듯 맡아보니 확실히 꽃향기… 허브 향기같았다. 그 중에서 희미하게 박하향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 잔에 입을 대었다. 와인잔을 잡은 손을 조금만 들어올리면 천주가 테드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잠시만.”
라이오스가 말을 걸었다.
“정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도 맛볼 수 없겠소? 와인 상인으로서 천주라는게 어떤 맛인지 정말 궁금해서 그렇소.”
“……천주를 달라고? 어이가 없군. 네놈 따위에게 줄 천주가 아니다. 주제 넘는 욕심을 부리지 마라!”
루인이 으르렁 거렸다. 거사를 앞두고 신경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테드만 술을 마시면 뒤에 있는 사이나까지 자연스럽게 술을 마실 텐데 그걸 라이오스가 훼방을 놓았다. 거기다 주제도 모르는 마족놈이 천주를 탐했다는 사실에 그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분노의 말을 쏟아내고 난 뒤, 머리가 조금 식자 상황을 파악했다.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다. 낭패였다.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 군. 여러분 보았소? 천족이 저렇게 이중적이라오.”
라이오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때 시리엘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라이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천주를 마시고 싶다 하셨지요. 좋습니다.”
“시, 시리엘 님!”
“하지만 트링거 남작님과 그 부인께서 먼저 드시고 난 뒤에 당신에게 드릴게요.”
라이오스가 만족했다는 듯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쪽의 천족 여자는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군.”
테드는 잠시 그들을 쳐다봤다. 마족과 천족이 만났으니 어느 정도 갈등을 예상했다. 그래도 이정도면 좋게 끝난 편이다. 모험가 길드에서는 천족과 마족이 마주쳐도 싸우지 않는다는 제약이 있기에 문제없지만, 상인과 종교인에겐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대가 먼저 먹도록 하게. 와인 상인이라면 소믈리에 능력도 있겠지. 먼저 마셔 감상을 말해주게.”
“생각하신 대로입니다. 술에 관해서 제가 전문이지요. 그럼 주제넘지만 먼저 받도록 하겠습니다.”
루인과 시리엘이 끼어들기 전에 서둘러 테드의 잔을 받아 들었다.
“자, 잠깐 멈춰라!”
“멈춰요! 그래도 트링거 님이 먼저 드셔야…!”
루인과 시리엘의 만류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향을 즐겼다. 잔을 살짝 흔들어 출렁이는 천주를 눈으로 즐기고 망설임 없이 마셨다.
라이오스의 육중한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땅과 부딪혔다. 와인잔이 박살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라이오스의 벌러진 입과 코에서 붉은 피가 소리없이 흘러내려 선상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모두는 잠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테드가 날카로운 눈으로 당황하고 있는 루인과 시리엘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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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