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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78화 (17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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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바닷길.

여객선 ‘부라리요 호’는 선장실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서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여객선을 조종해 항해한다.

선장실의 바로 아래에는 VIP들을 위한 방이 있다. 테드 일행이 머무는 곳으로 총 3개의 VIP룸이다. 평민들도 돈 만있으면 사용할 수 있는 이 VIP룸은 굉장히 비싸 상인들도 꺼릴 정도다. 한달에 몇 번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 이 VIP룸은 이번에 테드와 사이나가 한 방, 다른 한 방은 애쉬가 사용하고 있다.

VIP룸에는 필요한건 전부 갖추어져 있으며 호텔처럼 룸서비스까지 있어서 밖으로 나갈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바다를 보기 위해 나가는 정도인데, 광활한 바다도 한 10분 보면 질린다.

방금 막 VIP룸 전용 셰프가 만든 요리를 끝낸 테드는 지나가던 선원으로부터 이후 일정을 물어 답을 듣고 있었다.

“날씨도 굉장히 좋아서 순항중임으로 내일 오전 11시 무렵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원래는 오후 2시쯤에 도착하는데 이번 항해는 많이 빠른 편입니다.”

테드가 보기에도 요근래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바람도 약해서 그런지 파도의 높이도 낮았다. 덤으로 해양 몬스터의 습격도 없었다.

“아, 저녁에는 선상 파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파티?”

“원래 계획되어 있는 이벤트입니다. 우리 ‘부라리요 호’에선 둘째날에 모든 승객들이 즐길 수 있는 파티를 엽니다. 아, 물론 트링거 남작님께서 참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유 참가입니다.”

“호오. 그거 참 재밌어 보이는 군. 파티에 귀족이 빠질 수 없지.”

애쉬에게서 귀족처럼 행동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귀족 대부분이 파티에 사족을 못쓰는 작자들임을 알고 있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항해 중 지루함을 달랠 선상파티에 대한 흥미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조출한 파티입니다. 트링거 남작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서민들이 어떤 파티를 하는지 궁금했던 참이다.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한 쪽 입가를 끌어 올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선원은 재수 없는 귀족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웃음을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트링거 남작님의 성에는 차지 않으시겠지만, 부디 파티를 즐겨 주십시오.”

선원은 예의를 바탕으로 당당하게 귀족을 대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은 그가 부라리요 호의 선원이기 때문 일 것이다.

인사를 하고 떠나는 선원을 보면서 테드는 아공간을 열어 낚싯대를 꺼냈다. 오랜만에 꺼내는 마법 낚싯대는 새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실제로 사용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요트와 달리 여객선에서 낚시를 할 곳은 없다. 여객선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드에겐 마법이라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적재적소로 사용한다면 여객선에서도 충분히 낚시를 즐길 수 있었다.

“자, 그럼 가볼까.”

테드가 향한 곳은 여객선의 뒤쪽이었다. 밖으로 나와 있는 승객이 여럿있었지만, 그들에게 신선도 주지 않고 난간에 기대 듯 앉았다. 해양 몬스터 습격 등의 사태를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던 선원이 황급히 테드에게 다가갔다.

“트, 트링거 남작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걱정 마라. 아주 잠깐만 낚시를 즐길 뿐이니.”

“아, 안됩니다! 여객선 내에서 하는 낚시는 금지 되어 있습니다!”

귀족이란 신분을 특별하다.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법을 피해갈 수 있을 정도다. 귀족이라는 이름에 권력이라는 힘이 담겨 있었다.

“네가 조금만 못 본 척 하면 된다. 설마하니 저 평민들이 나를 고발하겠나.”

테드가 근처에 있는 승객들을 한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귀족이 자신을 가리키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귀족과 평민, 그 신분의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저… 트링거 님. 이곳에 있는 베나치오 선장님이 준귀족이십니다.”

“요즘은 준귀족도 귀족 취급을 하나?”

“베나치오 선장님은 펠리스 왕가로부터 여객선에 한해 즉결처분의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게 설령 트링거 남작님이라 하셔도…….”

선원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테드는 뒷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처벌하겠다는 것이겠지.

“쯧.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여객선의 속도가 빨라서 낚시도 제대로 즐길지 못할 테니.”

낚싯대를 거둬들이며 짐짓 불쾌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실제로는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냐는 생각뿐이다. 사이나는 셰프에게서 요리에 대해 묻고 있고, 애쉬는 방안에 박혀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나오지를 않았다.

“하해와 같은 배려. 정말 감사드립니다. 트링거 남작님!”

“…….”

테드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렸다. 테드의 발달된 청각에 선원의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그냥 침대위에서 뒹굴 거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프리티스 제국의 성기사들이 주로 입는 하얀 성기사 정복을 입은 금발의 미청년이 천천히 테드에게 다가왔다. 복장을 보면 천족이 확실한데 천족의 특징인 문신은 옷에 가려져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루인은 테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십분 활용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악마의 소환자인 테드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을 붙여가며 욕하고 있었지만.

“트링거 남작님이시죠? 저는 프리티스의 미카엘라 교단의 다섯 번째 날개 성기사인 루인이라 합니다.”

다섯 번째 날개, 오익(五翼)이란 말에 테드의 눈이 커졌다.

프리티스에 있는 모든 성기사와 사제들에게는 등급이 존재한다. 일익(一翼)이 최고로 낮은 등급이고 칠익(七翼)이 최고로 높은 등급이다. 오익이라면 대주교 급이다.

교단의 영향력이 강한 프리티스에서 루인은 자작 혹은 백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크흠. 카인드 트링거 남작이요. 뭐… 영지는 가지고 있지 않는 귀족이오만…. 무슨 일이오?”

환상 마법을 간파했나? 간파했다면 테드의 본모습에 관해서 추궁했을 것이다. 그리고 간파해도 상관없었다. 마족의 황태자를 죽인 테드는 천족에게는 영웅의 일이라 찬사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다가온 것일까.

아무리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테드라도 대주교 급의 성기사를 막대할 수는 없었다.

“특별한 일이 있어 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무료하던 참에 트링거 님이 보여서 대화라도 나눌까 싶어 말을 걸었습니다.”

“으음. 대화라. 본인은 딱히 할 말이 없소만?”

“매정하게 굴지 마시고… 이렇게 바다위에서 만난 것도 인연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소. 그럼 미카엘라 교단의 오익이나 되시는 분께서는 어쩐 일로 드래프리온에 가시나?”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여행이라는 시덥잖은 이유로 타국으로 가기엔 그의 신분이 너무 높았다.

“이건 비밀인데… 트링거 남작님에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는 본 교단에서 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드래프리온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루인이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서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테드로선 비밀인데 쉽게 말해주는 그가 이상하게 보였다. 혹시 머리가 조금 모자르나. 임무는 핑계이고 드래프리온으로 좌천 명령을 받은 게 아닐까. 그가 속된 언어로 빡대가리가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그 임무란 것은?”

“이건 아무리 트링거 님 이시라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저의 임무는 네메스 대륙의 정의를 위한 것입니다!”

루인이 흥분해 외쳤다.

“정의! 그렇습니다! 저의 임무와 행동은 모두 정의를 위한 것입니다! 아아, 천계에 계신 천사이시여 저의 행동을 보고 있으십니까!”

“…….”

테드는 병찐 표정을 지었다. 천족 중에서 교단에 속한 자들은 유독 이상한 놈들이 많았다. 눈앞에 있는 루인이 좋은 케이스였다.

“아 이런. 무심코 천사님에게 심취하고 말았군요. 트링거 님을 눈앞에 두고 이런 결례를 저지르다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트링거 님.”

“난 괜찮소.”

천천히 옆으로 움직여 루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려 했다. 그리고 생각대로 되었을 것이다. 한 발 앞서 그가 먼저 입을 열지만 않았다면.

“그런데 트링거 님께선 어떤 일로 드래프리온에 가시는 지요?”

“……여행이오. 본인은 얼마 전에 아내와 결혼했소. 말하자면 신혼여행이라 할 수 있겠지.”

“여행! 마음의 쉼터가 되고, 추억도 쌓이는 좋은 것이죠. 하지만 귀족 두분이서 타국으로 향하는 여행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평민들도 아무렇지 않게 여행하는데 귀족인 본인에게 무슨 문제요.”

“그것도 그렇군요. 그런데 부인 분이 보이지 않으시군요. 혹시 탈이라도 나셨습니까?”

“부인은 바다가 익숙치 않아 방에서 쉬고 있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테니 걱정할 것 없소.”

“그거 참 다행이군요. 아, 트링거 님은 혹시 오늘 저녁에 벌어지는 파티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바다위에서 하는 파티! 정말 낭만적이지요.”

“선상파티라면 익히 들었소.”

“혹시 트링거 님 께서도 부인과 함께 파티에 참가하십니까?

루인이 산뜻하게 물었다. 은발의 악마를 처리하고 싶어도 VIP룸에서 나오지가 않는다. 대놓고 쳐들어가서 죽이는 방법은 시리엘이 금지했다. 어디까지나 성물을 이용한 암살이어야 한다고 시리엘이 말했다. 정의로운 행위를 왜 암살자처럼 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으나, 시리엘의 명령이었기에 따르기로 했다. 문제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 생각하는 중이오. 부인의 상태도 걱정되고 말이오.”

“트링거 님! 부인과 함께 참가해주십시오! 이런 특별한 파티를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겪어 보겠습니까! 거기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특별히 천주(天酒)를 대접하겠습니다.”

“처, 천주라면 설마… 그 유명한?!”

천주는 프리티스 제국에서만 생성되는 아주 유명한 약주다. 체력회복, 정력회복, 피로회복, 상처회복 등의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맛까지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교단의 사제들이 직접 만드는 술로서 가치가 높기에 프리티스 제국에서는 법으로 규제를 하여 쉽게 구할 수 없는 술이다.

“예! 바로 그 천주 입니다! 임무를 끝마치고 스스로 축하하기 위해 챙겨온 한 병이 있습니다.”

“그, 그럼 지금 먹을게 아니지 않소?”

“모처럼 만난 인연이니 아낄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우리들의 만남을 축복하기 위한 더할 나윌 물건입니다!”

테드는 천주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프리티스가 관리하다보니 물량은 한 정되어 있고, 굳이 술에 집착하는 성격도 아닌지라 찾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기회가 생기면 꼭 한 번 쯤은 먹고 싶었다.

듣기로는 한 번 마시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미주라고 한다.

“으음.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알겠소. 부인과 함께 파티에 참가하겠소. 천주를 먹을 시간이 벌써부터 기대 되는군.”

“저도 정말 기대 됩니다.”

하하하. 루인과 테드가 웃었다. 이후 시시한 잡담을 주고받고 그들은 헤어졌다.

루인은 방으로 올라가는 테드의 등을 보며 승리자의 웃음을 지었다. 계획대로 악마를 끌어들였다. 그 악마가 비참하게 바닥을 구르며 죽어가는 모습이 벌써부터 그려졌다.

정의가 자신의 손으로 구현되는 것을 상상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자니 복도를 지나가던 시리엘과 마주쳤다.

“시리엘 님!”

“루인. 그렇게 웃고… 무슨 기쁜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시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행동에 살짝 흔들린 후드 속에서 황갈색의 부드러운 머리칼과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보석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드디어 정의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악이 하나 떨어지고 정의의 빛이 더욱더 찬란해질 것입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루인을 보며 시리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교단에서는 어렸을 적부터 성력의 재능을 가진 아이를 골라서 키운다.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 교육시켜 완벽한 신자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현재의 루인은 세뇌수준의 정신교육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었다.

시리엘이 그를 선택한 것은 루인이 가진 능력이 뛰어나고 배신할 가능성도 적으며, 이용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때로 통제가 힘들 때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어제 마족 상인과 부딪힌 것이다.

“부디 그 성격이 일을 그르치지 않아야 할 텐데.”

============================ 작품 후기 ============================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매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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