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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마수.
“돌아가. 넌 날 막지 못해.”
어디까지나 평탄한 어조로 당연한 것을 말하는 것처럼 테드가 말했다. 메피아는 그점이 도리어 참을 수 없는 조롱이며 굴욕이었다.
“막지 못한다고?! 아니, 짐은 막을 수 있다!”
스스로가 한 말이 치기가 짙음을 잘 알고 있었다. 상대는 시간을 멈추는 괴물이다. 그는 그녀의 스승이 도와준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십이각의 전원을 데리고 수 만 에 이르는 병사들을 이끈다면 그를 처리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계산하다가 메피아는 자신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메피아는 테드를 개인이 아니라 국가로서 상대하고 있었다.
“짐만이…! 네놈을… 막을 수 있다!”
두려움을 떨쳐내듯 외쳤다. 두 눈에 힘을 주고 눈앞의 테드를 노려봤다.
“억지 부리지마. 지금 네가 말하고, 움직이고, 볼 수 있는 건 모두 뛰어난 아티펙트 덕분이지. 그 아티펙트도 없는 지금 내가 다시 시간을 멈추면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해.”
반박할 수 없는 진실이 메피아의 정신을 강타한다. 자신의 생사여부는 이미 그에게 넘어갔다. 메피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여기서 짐을 죽이도록 해라. 짐은 언젠가 반드시 네놈의 앞길을 막을 것이다!”
메피아의 두 눈이 의지로 타오른다. 그러나 테드는 그 안에 숨겨진 불안을 파악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녀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냥 뒷일 생각 않고 죽여 버릴까. 진심으로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메피아를 죽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딥크스는 현재 황제의 권력이 최고인 시점이다. 귀족들이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시기인데 메피아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물러 줄 후계가 없다. 황족의 피를 가지고 있는 인물도 적고, 그들이 메피아처럼 능력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메피아가 죽는다면 지금 바닥을 기고 있는 딥크스의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개를 들고 자신들의 권리를 부르짖으며 제국을 손아귀에 넣을 것이다. 누구나가 예측할 수 있는 귀족들의 권력 투재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내전을 두고 볼만큼 마족의 적인 천족은 착하지 않았다. 도발은 물론이고 습격까지 할 것이 안 봐도 뻔하다. 마족은 당연히 천족 따위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 반격할 것이고.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테드는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머리가 아파왔다. 《시간정지》를 60초 이상 유지했기 때문이다. 레칸의 지식과 위광의 효과로 《시간정지》의 유효 시간이 늘어난 것은 좋으나, 아직 권능의 위치까지는 닿지 못했다.
“안 죽여. 널 죽이는 것으로 내가 얻는 이득은 내 기분이 조금 나아진다는 것 밖에 없으니.”
“……짐은 황제다.”
“알고 있어. 그것도 역대 딥스크의 황제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만큼 유능한 황제지.”
“……짐의 힘은 제국에서 나온다.”
“당연한 말이지. 네 명령 하나에 수 십 만이 움직이겠지.”
“……너는 지금 굉장히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이번과 같이 허술하지 않을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계획을 짜고, 시간과 돈이라는 공을 들여서 확실하게 네놈의 목을 노릴 것이다.”
“그렇겠지. 넌 그런 황제이니까. 하지만….”
76초. 멈췄던 시간이 다시금 흐리기 시작했다. 얼음 입자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살갗을 베는 듯 한 추위가 메피아를 덮쳤다. 그곳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메피아와 테드에게 꽂힌다.
“그래도 넌 날 막지 못해.”
이를 악물고 무리를 한다면 80초까지 시간을 멈추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지금 멈춘 것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것만으로 충분히 메피아에게 자신의 힘을 각인 시켰다. 목적은 달성했다.
테드가 몸을 돌렸다. 마침 사이나와 테리는 서로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테드와 메피아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그들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메피아는 허술해 보이는 테드의 등, 검은색 바탕에 있는 황금새의 문양을 쳐다봤다. 몸안의 마력이 다시금 그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여기서 기습을 한다면 그를 죽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그럼 4,000명의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안타까운 말이지만 메피아는 테드의 마법 한 번에 휩쓸려 전멸하는 광경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막을 수단이 없었다.
메피아가 양 주먹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굴욕이다. 싸움에 져서 꼬리를 만 개와 다름없지 않나. 아니, 그보다 못하다. 적어도 개는 싸우기라도 했지. 이건 싸운 것도 아니다.
메피아는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자 피를 보기 전에 힘을 뺏다. 분노로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은 하등 이익이 없는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마운, 테리!”
메피아가 자신이 데려온 두 명의 기사를 불렸다. 테리가 재빨리 메피아의 곁으로 뛰어왔고, 마운이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가리는 바이저에 의해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갑옷 틈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 분명 고통으로 일그러졌을 것이다.
“역적 놈들은 고대 유적에서 얻은 보물을 사용해 이 자리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놈들의 도망을 막지 못 했다.”
사이나의 곁에서 그녀의 몸 상태를 세심하게 살펴보는 테드를 적의를 담아 한껏 노려본다. 테드는 의도하는 것인지, 무감각한 것인지 메피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대 들은 이곳에서 본 것, 들은 것, 경험한 것, 모든 것들을 함구하라.”
“폐하의 뜻대로.”
2명의 기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메피아는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녀는 기사를 이끌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정말 어디 다친 곳 없어? 저 여자 진짜 보통이 아니던데.”
검은 눈동자로 돌아온 테드가 사이나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사이나는 한 번 다크 체인에 묶여 황궁으로 납치 된 적이 있었다. 사이나에게 있어 다크 체인은 극상성이라 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들은 제게 상처 입힐 실력이 아닙니다.”
대마수에 의해 메이드 복이 조금 찢어졌을지언정 상처는 전혀 없었다. 테드는 치마를 젖혀 허벅지 안쪽 까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여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아무리 그녀가 걱정되더라도 남자놈들 눈호강 시켜줄 생각은 전혀 없다.
“테드 님. 여황을 죽이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애쉬가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잘 몰랐다.
그저 어느 사이엔가 테드가 메피아의 앞에서 말하고 있었고, 메피아 황제가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돌아간 이유도 모른다. 그래도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어렴풋이 알았다.
“그녀를 죽이는건 어리석은 선택이니까요.”
“이야, 저는 테드님이 도망가거나, 병력이고 뭐고 그냥 다 쓸어버릴 줄 알았죠. 그런데 제 예상을 뛰어넘어 여황을 돌려보내 실 줄이야….”
애쉬가 긴장을 풀기 위해서 과장된 몸짓을 하며 감탄했다.
“그나마 일이 좋게 해결되어서 다행이오. 그런데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오? 본인의 생각엔 어서빨리 딥크스에서 벗어나 신분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소만.”
브렌이 모험가를 데리고 다가오며 물었다.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다. 메피아가 정말로 그들에게 지명수배를 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다. 모험가들이 단숨에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테드처럼 재주 좋게 현상금 사냥꾼을 피하면서 대륙을 여행 할 능력이 없었다.
“브렌님의 괜한 걱정이라 생각되는 군요. 아마 메피아는 모험가 여러분을 쫓을 생각이 없을 겁니다. 저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괜히 적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까요.”
테드가 말했다. 인망이 깊은 브렌이다. 모험왕이라는 명성도 있는 그에게 지명 수배를 내릴 일은 없다. 메피아가 얻을 것은 화풀이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험가들과 척을 져 손실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래도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딥크스에선 하루 빨리 벗어나야죠. 고대 유적에 관한 것은 모험가 길드가 알아서 할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에요.”
“당신은 어디로 갈 생각이오?”
“일단 펠리스 왕국이네요. 브렌님은?”
“본인은 네미슈로 돌아갈 생각이오. 그곳이 본인이 활동하던 주된 무대이기도 하고… 본인이 대마수 토벌에 참가한 것은 무녀님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오. 그러니 일단 돌아가서 무녀님에게 보고를 해야 하오. 혹시 급하지 않다면 본인과 같이 네미슈로 가지 않겠소?”
테드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도 여행이 아니라 목적이 있어서 펠리스 왕국으로 가는 것이기에.”
“목적이 있다면 강요하지 않겠소. 무녀님이 조금 아쉬워 할 것 같기도 하오만, 본인이 잘 말해 주겠소.”
“고마워요.”
테드와 모험가들을 밖을 포위하고 있는 딥크스의 병사들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테드가 움직인 것은 30분 정도 지나서였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죠. 대마수의 시체는 모험가 길드에 들러 맡기도록 할게요. 언젠가 인연이 되어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테드가 마지막 인사를 하며 애쉬와 사이나를 데리고 석양이 지는 쪽으로 움직였다.
다음 목적지는 드래프리온.
용인(龍人)족인 드라칸의 왕국이다.
그곳에서 또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힘내라! 테드! 완결까지 달리는 거다!
⁂ ⁂ ⁂
메피아는 아무도 없는 황궁의 홀의 옥좌에 앉았다.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옥좌는 실용성이 없어 편안함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메피아는 여느때라도 이 옥좌에 앉으면 기분만큼은 편안해졌다.
그러나 오늘은 전혀 달랐다. 신하들을 모두 내보내고 홀로 옥좌에 앉아도 그녀의 심기는 조금도 편안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늪에 빠지는 것처럼 더욱더 가라앉았다.
“테드 크루시안….”
그녀를 고뇌하게 하는 원인을 직접 입을 열고 내뱉었다. 지금 심정이 한층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메피아는 황궁에 오자말자 스승인 메티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메티스의 도움을 바래서가 아니라 한 가지를 물어보기 위해서다.
테드가 사용한 《시간정지》에 관해서 물어보기 위해서다. 메티스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아무리 마법이 만능이라고 해도, 시간정지는 다른 차원에 있어 마법으로 구사 하는게 불가능 하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공간정지》는 마법으로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메피아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였기에 조금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외라고 한다면 메티스가 모르는 고대마법일 경우다. 고대 마법이라면 시간을 멈춰도 이상하지 않다.
“놈은 위험해…. 너무 강해졌다. 일신의 무력이 국가와 맞먹는다는… 그딴 전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그가 어느 나라에 소속되는 순간 네메스 대륙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정말 최악의 경우, 메피아로서는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네메스 대륙을 지배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주권결정전이 문제가 아니다. 주권결정전에서 이긴다고 해도 놈을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오늘 확신했다. 자신이 주권결정전을 위해 준비한 것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들임을. 테드가 말했던 것처럼 막을 수 없다.
“무슨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내버려 둔다는 선택지는 최악의 수다. 국가에 필적한 힘을 가진 자를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은 아무런 야욕도 보이지 않지만, 미래에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알 수 없다.
“방법은… 아직….”
초조하게 중얼거리던 메피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방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방법은 메피아의 자존심을 내다버려야 한다.
“프리티스 제국을 끌어 들이면… 으득.”
생각만으로도 이가 갈렸다. 프리티 제국은 마족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천족의 국가다.
‘하늘의 눈’을 통해서 본 것을 환영 마법으로 구현하여 프리티스의 상부와 연락해 보여주면 끌어들일 수 있다. 다만 그럴 경우 메피아가 직접 그들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은근슬쩍 넘겨주는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
이를 갈던 그녀는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다. 미래에 테드라는 존재는 필히 딥크스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지금의 굴욕 정도는 씹어 삼켜 주마…!”
다음날 메피아는 프리티스의 천왕궁 카일라로 연락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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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아직 대략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완결이지만…. 300회는 안넘는다고 확신… 을 못하겠군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